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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카키의 강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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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카키의 강풍

[‘바이크 보헤미안’ 최광철의 수상한 여행 3] ⑭기대의 대가

다음 날 아침, 테카포 호수에 손을 담갔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옥색이 손끝에 진하게 물들었다.

9시 반, 테카포 캠핑장을 나와 푸카키 호수(Lake Pukaki)로 향했다.
“어제 봐둔 길이 있어요. 날 따라오세요.”
인천 총각이 모처럼 앞장섰다. 출발 10분도 안 돼 찻길을 벗어나 샛길로 접어들었다.

언덕을 조금 내려가자마자 넓은 광야가 펼쳐지고 저 멀리 지평선에서부터 시작된 가느다랗고 시퍼런 봇물이 마치 동맥처럼 길게 뻗어 내게로 이어졌다. 알고 보니 테카포 호수 물을 3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푸카키 호수로 내려보내는 거대한 운하였다.

ⓒ최광철 여행작가·방송인

ⓒ최광철 여행작가·방송인

운하 제방 길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일직선이고 비포장도로였다. 엄청 깊어 보이는 봇물이 제방 가득 흐르고 있는데다가 가드레일조차 없어 공포감이 몰려왔다.

‘강풍이 불었다.’ 사방 광활한 분지에서 거침없이 휘몰아쳤다. 만년설 덮인 쿡 산 쪽에서 불어왔다.
“도저히 탈 수가 없어요.” 앞서 가던 만능 키가 자전거에서 내려 핸들을 잡고 밀기 시작했다.
“이쪽 제 옆으로 오세요.” 만능 키가 뒤따르던 추니에게 외쳤다. 바람을 조금이라도 막아주기 위해서였다.

바람이 설산 눈가루가 섞인 것처럼 차갑다. 강풍이 봇물을 제방 위로 회오리쳐 올려 내 옷을 적셨고, 흐려진 안경을 닦아낼 겨를조차 없었다. 나는 핸들을 꽉 잡고 머리를 숙여 바람의 저항을 줄이며 안간힘을 다해 한 걸음씩 겨우 발을 뗐다.

‘앗! 저거 뭐야.’
앞서가는 인천 총각의 자전거에 달린 트레일러 덮개가 열리면서 그 속에 들어있던 슬리퍼가 바람에 날려 내 눈앞을 홱 지나쳐 공중으로 날아갔다. 마치 종이비행기 같았다.
“여기요. 여기 봐요. 인천 총각님, 인천 총각님.” 불과 20미터도 안 되는 거리인데 내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보다.


ⓒ최광철 여행작가·방송인

“어, 이건 또 뭐야.” 이번엔 클립 달린 자전거 전용 신발이 또 날아왔다.
“인천 총각님, 인천 총각님.” 목이 터져라 외치며 있는 힘을 다해 자전거를 밀고 다가갔다.
“아니 그거.” 인천 총각이 내 손에 든 신발과 자전거 트레일러를 돌아보고는 깜짝 놀랐다.

“자. 안 되겠어요. 제방 아래로 내려갑시다.” 앞서가던 만능 키와 추니에게 소리쳤다.
나는 서둘러 자전거를 제방 경사면으로 끌어내려 눕히고 갈대숲 속으로 몸을 숨겼다. 강풍은 마치 내가 숨어있는 곳을 찾기라도 하려는 듯이 머리끝을 이리저리 예리하게 휙휙 돌다가 사라졌다. 제방 위 굵은 모래가 흩날려 얼굴을 때렸다.

“다시 가요. 계속 머물 수도 없고요.” 만능 키가 용기를 냈다.
“보 안에 가득 찬 물이 무서워요.” 추니가 말했다.
일행은 4킬로미터 남짓 운하 제방 길에서 세 시간 넘게 사투를 벌였다. 하지만 언제 바람이 잔잔해질지 알 수 없는 상황은 계속됐다.


ⓒ최광철 여행작가·방송인

“어느 길로 갈까요?"
일행은 운하 제방 길과 8번 도로 교차 지점에 모여 의견을 나눴다. 이 제방 길로 계속 직진하면 풍광 좋은 알프스 트레일(Alps Trail)을 따라 목적지인 푸카키 호수 쪽으로 갈 수 있지만 기진맥진해져 이젠 비포장길을 벗어나기로 했다.

하지만 아스팔트 편한 길을 택한 대신 강풍 속에서 차량과 함께 도로를 주행해야 하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흰색 차선에 바싹 붙어요.’ 도로 갓길이 거의 없었다. 오른편에서 부는 바람은 나를 자꾸 도로 바깥으로 밀어냈다. 하지만 바람이 차량이 질주하는 도로 안쪽을 향해 부는 것보다는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강풍에 밀려 도로 바깥으로 밀려나지 않으려고 비스듬히 도로 안쪽으로 몸을 기울인 채 달렸다.

‘앗!’ 때마침 초대형 트럭이 내 옆을 지나며 바람을 막아 비스듬히 기울인 채 달리던 자전거가 갑자기 중심을 잃어 차 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접촉 사고 일촉즉발이었다.
앞서 달리는 추니도 머리와 어깨를 잔뜩 구부린 채 휘청거리며 연신 위기를 모면하고 있었다.

한참을 달렸다. 노선이 바뀌어 뒤에서 강풍이 불었다.
가파른 고개를 오르는데 바람이 등 뒤에서 너무 세게 밀어 브레이크를 잡았다.

‘와! 푸카키 호수다.’ 큰 고개를 넘어서자마자 새로운 세상이 확 펼쳐졌다. 거대한 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넓은 호수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저게 바로 쿡 산이다.’ 3,754미터의 뉴질랜드 최고봉을 가장 가까이서 만났다. 그야말로 신비롭고 환상적이다. 원주민 마오리족은 쿡 산을 ‘구름을 꿰뚫는 자’라는 의미로 ‘아오랑기’라고 불렀단다.
푸카키 호수 건너 가까이 보이는 쿡 산은 그때 마침 지나던 구름을 꿰뚫어 흰색 장막 속에 몸을 감추고 있었다. 추니랑 푸카키 호수와 쿡 산을 배경으로 한 장 사진에 담을 수 있어 가슴 뿌듯했다.

ⓒ최광철 여행작가·방송인

“푸카키 연어가 유명하대요.” 추니가 말을 꺼냈다. 이곳 호수에서 가두리 양식 한 연어 회 한 접시에 십 달러(팔천삼백 원)였다.

연어 회 제맛을 느껴보려고 겨자 빼고 간장 소스만 살짝 찍어 입에 넣었다. 굵직하게 썬 살집은 한입에 가득 찼고, 고소한 맛이 콧바람으로 되돌아 나오며 매화 향기로 바뀌었다. 지그시 눈 감고 느릿느릿 씹었다. ‘입안에서 살살 녹는다는 게 바로 이런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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