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출근하자마자 평소 친분이 있는 한 시중은행의 지점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연말을 앞두고 소주나 같이 하자는 얘기인 줄 알았더니, 전혀 예기치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어제 대통령후보들이 제출한 재산신고 내역을 보다가 도통 이해가 안가는 대목이 있어 전화를 했다는 거다.
"박형, 경제신문을 보다가 아무리 여러 번 되풀이해 읽어도 도통 이해가 안가서 도움을 얻을려고 전화를 했으니 시원하게 답 좀 해주시오. 대통령후보라는 분들이 재산내역을 신고했는데, 항목중 하나가 지난 3년간 납세실적입디다.
무심코 들여다 보다가 아주 이상한 점을 발견했어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지난 3년간 낸 세금이 4백50만원밖에 안되고, 민주당 노무현 후보도 4백46만원밖에 안 된다는 점입니다. 해마다 평균 1백50만원씩 세금을 냈다는 얘긴데, 이게 나같은 월급쟁이 상식으론 이해가 안갑니다.
궁금해서 도대체 나는 얼마나 세금을 냈나 찾아봤어요. 그랬더니 내 연봉이 6천만원인데, 지난해 낸 세금이 7백만원 가량 됩디다.
이회창 후보는 각료 출신인 데다가 현역 국회의원으로 나보다 연봉이 몇배나 많은 걸로 알고 있고, 노무현 후보도 현역의원은 아니나 집권당의 대통령후보라면 나보다는 소득이 많고 씀씀이도 클 걸로 생각되는데 어떻게 나같은 별 볼 일 없는 월급쟁이보다 세금을 턱없이 적게 낼 수 있는지 도통 미스테리에요.
아침에 기사를 쓴 경제신문에게 전화해 물어봐도 '나도 이해가 안간다'는 답만 들어 박형한테 전화한 거니, 시원하게 답 좀 해주시오."
솔직히, 시원한 답을 못해줬다.
***이회창, 노무현 1년에 낸 세금은 1백50만원**
전화를 끊은 뒤 27일 대통령후보 등록을 하면서 제출한 각 후보들의 재산 및 납세 신고자료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이회창: 재산 12억8천5백만원, 납세 4백50만3천원(소득세 3백45만5천원, 재산세 44만4천원, 종토세 60만4천원)
노무현: 재산 2억6천2백63만원, 납세 4백46만1천원(재산.종토세 납부실적 없음)
권영길: 재산 5억3천3백6만원, 납세 1천4백81만5천원(소득세 1천3백82만2천원, 재산세 47만2천원, 종토세 52만1천원)
가장 가난한 정당인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가 이회창, 노무현 후보보다 3배나 세금을 많이 낸 것으로 나타났다. 세 후보진영에 어찌된 연유인지 물어보았다.
이회창 후보진영은 "세무소에서 납세자료를 떼다가 낸 것일뿐, 자세한 건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
노무현 후보진영은 "4백46만원은 모두가 소득세이고, 재산세와 종토세는 집이 부인 명의로 돼있어 이번에 신고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권영길 후보진영은 "1천3백여만원의 소득세는 지난 99년 권후보가 모친으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으면서 낸 양도소득세"라고 말했다.
***세비+연금*고급주택**
이회창 후보는 며칠 전까지 현역 국회의원이었다. 올해 의원 1인당 세비는 9천만원대다.
여기에다가 이후보는 세비와 별도로 거액의 연봉을 받고 있다. 30여년간의 법관 생활을 거쳐, 감사원장, 국무총리 등 최고위직 각료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연금 수입만 해도 웬만한 중산층 직장인 연봉보다 많다.
이 후보는 올초 호화빌라 파동이 나기 전까지만 해도 1백여평이 넘는 호화빌라를 세 채나 빌어 살았었다. 평당 분양가가 1천2백만원대에 달하던 빌라였다. 그후 빌라파동이 나자 현재의 옥인동 3층 주택을 사 이사했다.옥인동 주택은 대지만 1백6평에 달하는 넓직한 집이다.
이런 이후보가 지난 3년간 해마다 낸 세금이 1백50만원이라는 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과연 '절세 비법'은 무엇인가.
절세 비법의 핵은 '정치후원금 면세조항'이다.
국회의원도 달마다 세비를 받고 세금이 원천징수되기란 일반 월급쟁이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가 다르다. 낸 세금의 거의 다를 소득공제 형태로 되돌려 받기 때문이다. 소득공제를 받는 대부분은 '정치후원금 명목'이다. 때문에 국회의원들 중에는 서로 정치후원금 영수증을 주고받아 근로소득세를 연간 몇만원 정도 내거나 아예 한푼도 안내는 이들도 숱하게 많다.
이회창 후보는 국내 최대정당의 대표다. 그러다보니 내야하는 정치후원금 액수가 엄청날 것임은 분명하다. 어쩌면 세비보다 많은 후원금을 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같은 전후 사정을 모두 고려하더라도, 거액의 세비와 연금 소득이 있고 일반인은 쉽게 꿈도 꿀 수 없는 고급주택에서 살고 있는 이후보가 초년병 샐러리맨 수준의 세금만 내고 있다는 대목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나보다 씀씀이가 적은 국민보다 세금을 적게 내는 건 아닌가'**
노무현 후보의 경우 이회창 후보와 비교하면 현역의원이 아니니 세비 수입이 없고, 잠시 해양수산부 장관을 한 까닭에 연금수입이 있긴 하나 그 액수는 보잘 것 없다. 살고 있는 집도 명륜동 45평 빌라로 이후보의 집보다 자그마하다. 노후보의 소득은 대부분 변호사 수입으로 잡혀있다.
하지만 지난 3년간 4백46만원의 세금만 냈다는 대목이 과연 일반국민의 눈에 어떻게 비칠 것인가를 본인 스스로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회창, 노무현 두 후보 모두 법에 밝은 법조인 출신이다. 때문에 절세를 하면 했지, 탈세같은 일을 했을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다. 절세는 결코 범죄가 아니다. 그러나 절세를 할 때 하더라도 한가지는 반드시 생각해봐야 한다.
'내가 과연 나보다 씀씀이가 적은 국민보다 혹시 세금을 적게 내는 것은 아닌지.'
이들은 단순한 법조인 출신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 헌신하겠다며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이 나라의 유력 대통령후보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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