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미국연방준비제도이사회 공개시장위원회(FOMC)가 40년래 사상최저 금리인 1.75%에서 1.25%로 0.5%포인트나 금리를 대폭 내린 뒤 지금 월가에서는 그 배경을 둘러싸고 ‘디플레이션 우려설’과 ‘그린스펀 음모설’이 팽팽히 대립하고 있다.
***디플레이션 우려설, "부동산거품은 끝내 터질 것"**
세칭 '디플레이션 우려설’의 골자는 한마디로 “얼마나 미국 경제의 앞날이 비관적이었으면 앨런 그린스펀 미연준 의장이 소비를 진작시키기 위해 0.5%포인트나 인하했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월가의 비관론자로 이름난 스티븐 로치(모건 스탠리증권 수석 이코노미스트)가 앞장서 펴고 있다.
그는 “이미 사상 최저금리 덕에 부동산 붐이 조성되고 이를 담보로 한 소비지출이 거의 극한으로 이뤄진 터라 더이상의 소비 촉진이 일어나기 힘들다”면서 “미국 경제는 디플레이션에 빠져들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 터질 것으로 보였던 부동산 거품붕괴가 초저금리 때문에 당분간 연장되는 효과를 가져올 뿐"라며 금리 인하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한다. 웰스파고 은행의 손성원 수석부행장 같은 경우가 이런 분석을 하는 대표적 논객이다.
***그린스펀 음모론, "미기득권층 보호 위해 필요이상 금리인하"**
반론도 만만치 않다. 현재의 미국경제 상황하에선 0.25%포인트만 내려도 충분한데, 0.5%포인트나 대폭 내린 배경에는 기득권 세력에 영합하려는 계산이 깔려있다는 이른바 ‘그린스펀 음모론’이다.
‘그린스펀 음모론’은 이번에 처음 제기된 것은 아니다. 지난해 1월3일 0.25%포인트가 아닌 0.5%포인트의 금리인하를 단행했을 때도 비슷한 음모론이 대두됐었다.
당시 월가에서 떠돌던 음모론은 다음 세가지였다.
첫번째가 인위적인 증시부양이다. 증시에서 뮤추얼펀드 등 기관투자가들이 대거 이탈하면서 주가가 폭락하자 이를 막기 위해서라는 주장이다. 그린스펀이 기득권 세력의 압력에 초연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많은 은행과 기업, 특히 인터넷기업들의 사활이 주가와 연관돼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두번째는 금융권의 위기를 막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지난해에에도 대형은행들이 파생금융상품 투자로 엄청난 손실을 보게 돼 문을 닫을 지경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었다. 미국 굴지의 은행인 뱅크오브아메리카(BOA)가 파생금융상품으로 큰 손실을 입으며 위기에 몰리자 연준이 긴급 처방에 나섰다는 것이다.
세번째로는 장기부채에 시달리는 기업들에게 당장 연말에 만기가 돌아오는 부채들을 상환하는데 도움을 줘 급한 불을 끄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상황은 올 들어 더욱 악화됐다. 주가는 더욱 떨어지고 장기부채에 시달리는 기업들의 자금난을 한층 심각한 상황이다. 또한 J.P. 모건 등 미국의 대형은행들이 파생금융상품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고 1천여개 헤지펀드가 연내 도산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떠돌고 있다.
이처럼 미국 기업과 금융기관들의 '골병'이 외부에 알려진 것보다 심각하자 그린스펀이 대대적 금리인하로 이들을 돕고 있다는 것이 그린스펀 음모론의 골자다. 요컨대 실패한 기업들에 대해 시장법칙에 따른 청산보다는 '대마불사형 구제조치'를 취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의 눈길이 던져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미연준은 지난 80년대말 미국최대은행인 시티은행이 파산위기에 처하자 극비리에 구제금융을 제공해 살린 전례가 있어 음모론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금리 대폭인하로 미경제 안정성 크게 훼손돼**
이같은 그린스펀 음모론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은 “미국경제가 지금 무슨 놈의 디플레이션 위기에 봉착해 있느냐”는 주장이다.
오하이오 주립대 경제학 교수 스티븐 세케티는 10일(현지시간)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에 기고한 칼럼에서 “디플레이션은 평균물가가 떨어질 때를 말하는 것이지 어떤 상품은 가격이 오르고 어떤 상품은 내리는 때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면서 “인플레이션이 0%에 가까워질수록 가격이 떨어지는 제조업체들이 많아지겠지만 그것은 가격안정이지 디플레이션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오히려 “수십년에 걸쳐 5~10%의 인플레이션으로 시달린 뒤에 가격안정시대에 가까워지고 있다”면서 “장기 성장의 안정적 기반을 마련한 정책당국자들에게 축하를 보내자”고 썼다.
그는 그러나“정작 걱정스러운 것은 경상수지 적자로 인해 달러가치가 급락하는 사태”라며 “이와 함께 미국 부동산시장이 붕괴하면서 가계재정이 악화되어 소비가 급격히 위축되는 일이 일어날까 우려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연방재정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을 우려했다. 정책결정자들이 90년대말에 누렸던 4% 이상의 고성장 유혹에 빠져 잘못된 정책을 취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세케티 교수는 “연준이나 의회의 기대가 지나치다가는 지난 80년대 저성장과 고금리를 초래했던 고인플레와 막대한 재정적자 시대로 회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요컨대 그린스펀의 금리 대폭인하는 미국경제의 장기적 안정성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한 극약처방에 가깝다는 비판이다.
과연 '디플레이션 우려설'과 '그린스펀 음모설' 가운데 어느 쪽이 맞는지는 아직 확인할 길 없다. 그러나 두가지 가설 모두가 미연준의 이번 금리인하는 근원적 치료가 아닌 '시간끌기형 대증요법'이라는 지적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미국경제는 지금 심각한 병에 걸려있다는 주장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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