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도와드리겠습니다.” 휴즈 씨의 자세한 사고 설명을 들은 캠핑장 여성 매니저 캐더린 호렐(Kathryn Horrell)씨의 말에 힘이 불끈 솟았다.
“휴즈 씨 정말 감사합니다.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남은 여정 안전하게 가십시오.” 운전석에 오르는 휴즈 씨의 모습이 새털처럼 가뿐해 보였다. 나는 정문을 나서 휴즈 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뒤따라 걸었다.
오후 5시, 추니와 만능 키, 인천 총각이 캠핑장 정문에 모습을 드러내자 왠지 다시 못 볼 것만 같았던 식구들을 만나는 느낌이 들어 울컥했다. 캠핑장 매니저가 지정해준 잔디 광장에 텐트를 쳤다.
“저희 오늘 밤 퇴원해 캠핑장으로 돌아갈 수 있어요. 병원에서 엑스레이 촬영을 했는데 일단 귀가하라고 하네요. 몸이 아파 텐트에서 자기는 어려우니 근처 호텔이 있으면 예약 좀 해주세요.” 그렇지 않아도 일행이 병원으로 막 출발하려고 하던 참에 춘천댁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캠핑장 매니저에게 부탁해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에스 모텔’ 방 한 개를 예약해놓았다.
“곧 캠핑장에 도착해요.” 밤 10시, 뭔지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많이 아프죠. 병원에서 뭐래요?” 추니가 택시 뒷문을 열고 나오는 춘천댁을 부축하며 물었다. 다행히 사고 당시의 축 처졌던 표정은 사라졌다.
“조금 나아졌는데 통증은 여전해요.”
“그나마 천만다행이에요.”
“사고 순간 깜빡 정신을 잃었어요.”
“그때 순간 바람이 엄청 강했거든요.”
“네, 알겠습니다. 다시 병원으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막 캠핑장을 떠나려던 택시 기사가 어디선가 전화를 받고 나더니 다시 병원으로 돌아갈 것을 춘천댁에게 요청했다.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헐, 집으로 가라고 했는데요.”
내일 아침에 담당 의사가 최종 엑스레이 결과를 보고 나서 퇴원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합니다. 어서 차에 타시죠.”
춘천댁 내외분은 다시 캠핑장을 떠나 티모루 병원으로 떠났고 예약한 모텔은 취소했다.
캠핑장 잔디 광장엔 세 개의 텐트만 자리했다. ‘이제 앞으로 어떡하지?’ 나는 텐트에 들어가지 못하고 밤늦도록 주변을 서성거렸다.
“엑스레이 결과 갈비뼈 두 대가 금이 갔대요. 약을 복용하면서 2주간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는 의사 소견입니다.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자전거는 더 이상 탈 수 없을 것 같아서 춘천 집으로 보내고 기왕 왔으니 차를 타고서라도 함께 여행을 하려고 해요. 퇴원 절차가 끝나면 곧바로 캠핑장으로 갈게요. 병원비는 무료랍니다. 뉴질랜드에서는 사고를 당하면 일체 경비를 국가에서 부담한다고 합니다.” 아침에 춘천댁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나는 일행들과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일단 이곳 제럴딘 홀리데이 파크에서 며칠 더 머무르며 상황을 수습하기로 했다.
우선 춘천댁 내외분이 뉴질랜드에서 여행을 하려면 버스를 이용하거나, 차량을 렌트해서 직접 운전하는 방법이 있기는 하지만, 숙소 예약이 안 돼있는 상황이고 더구나 아픈 몸을 이끌고 버스 여행을 한다는 건 어려웠다.
또 뭔지가 손수 운전하려면 국제 면허증이 필요한데 이는 출국 전에 미리 발급을 받아야 하고, 이곳 영사관을 통해 발급받으려면 기일이 꽤 걸리고 절차도 복잡하다는 캠핑장 매니저의 조언을 들었다.
‘좋은 생각이에요.’ 크라이스트처치 치치 언니 남편이 다음 주까지 휴가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혹시 시간 내서 춘천댁 내외분과 며칠간 동행하다보면 좋은 방법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네, 나흘 동안은 시간 있어요.” 치치 남편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내일 아침에 이곳 제럴딘 캠핑장으로 오겠단다.
“매니저님, 어려운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네, 뭐지요?”
“자전거 두 대를 한국 춘천으로 보내려고 하는데요. 어떻게….”
“방법을 알아볼게요.” 매니저의 적극적으로 도와주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매니저는 줄 서있는 캠핑장 입장객들을 관리하면서 틈틈이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자전거 박스를 구할 수 있는지 물어보고, 국제 화물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다.
해 질 녘 매니저 캐더린이 텐트로 찾아와 진행 상황을 일러줬다. “내일 아침 9시에 자전거 박스 2개를 여기로 가져올 겁니다. 이곳엔 자전거 전문 샵이 없어서 티모루에서 가져오기로 했습니다.”
“티모루는 이곳에서 꽤 먼 곳인데요.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염치없이 꺼낼 수 없어 잠시 망설였다.
“내일 10시 반에 화물 차량이 이곳에 들러 자전거를 가져갈 예정입니다. 그때까지 자전거를 박스 포장 해두어야 됩니다.”
“내일 오전에요?”
“약 2주 후에 한국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합니다. 화물비용은 무게와 부피에 따라 다르므로 나중에 알려드릴 테니 처리해주십시오.”
“네, 네, 감사합니다.” 사고 수습이 한꺼번에 일괄 처리되는 순간이었다.
무엇보다도 내 영어 수준이 왕 초보임에도 불구하고 매니저는 인내심을 갖고 대화에 임해줬다. 캐더린은 내 언어 표현에 있어 예의가 갖추어지지 않았거나, 얼토당토한 문장이 많았을 텐데도 항상 밝은 표정으로 대해줬다. 내 말을 끝까지 듣고 나서 본인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여부를 정리해서 되묻곤 했다.
다음 날 아침 9시 정각에 대형 박스 두 개를 실은 승합차가 캠핑장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자전거 두 대를 분해해 박스에 넣었다. 텐트도 가방도 안타까운 마음도 함께 넣었다.
9시 반, 치치 남편이 도착하고, 뒤이어 자전거를 한국으로 보낼 화물 차량이 정문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여행 도중 자전거를 다시 한국으로 돌려보낼 일이 생길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끝까지 함께하지 못한 책임감과 죄송함으로 자전거를 싣는 동안 마음이 무거웠다. 속상했다.
오늘의 목적지 테카포까지는 치치 남편 차량을 이용해 일행을 두 번에 나눠 이동했다. 카카후 고개 사고 지점(Kakahu 7991 NZ)을 다시 통과하고 싶지 않았다.
“여행하면서 자주 연락 나눠요.” 테카포 캠핑장에서 치치 남편 차량으로 먼저 떠나는 춘천댁 내외분과 이별의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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