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2> 불한당들의 시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2> 불한당들의 시대

소설 <불한당들의 시대> ②

이우학교 미술교사이기도 한 노길상 작가의 픽션 <불한당들의 시대>를 연재합니다. <불한당들의 시대>는 7세기 경의 한반도 역사를 극화(劇畫:그림이야기) 형식의 판타지 소설로 창작한 것입니다. 부석사의 연기 설화를 바탕으로 의상과 선묘, 그리고 두 사람과 관계된 실존 또는 가상의 인물들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편집자)

3. 옥문지(玉門池)의 사변(事變)

날이 밝았으나 내관은 여전히 안절부절 하였다. 대궁(大宮:왕의 침전) 기단 밖에서 대기하라는 여왕의 지엄한 명이 거두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가 중천에 뜬 이후에야 기침(起枕) 소리가 들렸다. 여왕은 직접 문을 열고 내관을 찾았다.

"이(爾)야~ 이(爾)야~"

내관은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여왕은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 조하(朝賀:신하들이 왕에게 아침 문안과 함께 국정을 논하는 자리)를 열 것이다."

ⓒ노길상

어제까지만 해도 식음을 전폐하며 두문불출하던 여왕이었다. 내관과 사인(舍人:하급관리)들은 어리둥절할 겨를도 없이 여왕의 명에 따라 내성부(內省部:왕궁 행정부서 밀집 구역)를 기광스럽게 헤집고 다녔다. 월성(月城) 전체가 왁자해지기 시작했다. 수개월간 잠잠했던 조하가 열린다는 소식에 문무백관들은 먼지 앉은 관복을 꺼내 입고 입궐을 서두르느라 분주했다. 내성부를 총괄하는 내성사신(內省私臣) 김용수(金龍樹)는 그의 아들 김춘추(金春秋)의 부축을 받으며 제일 먼저 입궐했다. 간밤의 꿈이 뒤숭숭했던 그는 새벽 동이 희뿜해질 무렵 아들을 불러 입궐을 서둘렀다. 이번에도 그의 꿈자리는 영험했다. 알고 있었다는 듯, 오두방정을 떠는 내관과 사인들을 단속하며 김용수는 여왕의 침전으로 향했다. 여왕은 하명했다.

"대신들의 입궐이 굼뜨는군요. 서두르라 하세요. 오늘 조하에서 할 말이 있습니다. 조하가 끝나면 궐 밖으로 행차할 것입니다. 내성부에서 차질 없이 준비하세요."

"어디로 행차할 것이 온 지..."

"행선지는 대신들 앞에서 직접 말하겠습니다. 조하부터 서두르세요."

매사에 전전긍긍하던 여왕이 아니었다. 하룻밤 사이에 여왕은 다른 임금이 되어 있었다. 김용수는 오래된 습관에 따라 현상으로 드러난 인과(因果)를 추리하기 시작했다.

'침전에만 틀어 박혀있던 여왕이지 않았나?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누가 여왕을 만났는가? 누군가를 만나본들 여왕이 하루아침에 기세등등할 이유가... 그랬다는 것인데,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도대체 누구를 만났단 말인가...'

유달리 큰 코는 차치하고, 듬성드뭇한 백발과 퀭한 눈 때문에 노회 한 것인지 노회하기 때문에 그런 용모인지 두서없지만 외관과 다르게 김용수의 추리는 언제나 날카로웠다. 그는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끈질기게 추리했다. 가당치 않은 원인으로 유발된 결과를 믿지 않았고, 귀납적 과정이 부실한 원인을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특이한 점은 그의 인과적 추리과정이 모두 수면 중에 활발해진다는 것이었다. 김용수는 그의 혜안을 꿈자리라고 두루뭉술하게 말하는 것을 즐겼다.

권력의 핵심부인 내성사신 자리를 십오 년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유별난 꿈자리 덕분이었다. 그 때문인지 그는 틈만 나면 졸았다. 궁둥이를 붙이기만 하면 순식간에 고개를 끄덕이며 졸았고 기둥에 기대든 식사 도중이든 그의 수면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김용수에 대해 전설처럼 내려오는 일화도 있었으니, 얄궂은 호사가들은 '부자똥통반익사적일대사변(父子똥桶半溺死的一大事變)'이라 부르며 호들갑을 떨었다. 허나, ‘일대 사변’이란 수식에 현혹될 일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호사가들의 입방정에 불과하고, 대변을 보다 깜빡 조는 바람에 똥통에 빠져 죽다 살아난 일일 뿐이었다. 마침 아들 김춘추가 주변에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는 똥통에서 유명을 달리할 수도 있었다. 그때부터 김용수는 똥독으로 인한 탈모 현상에 시달렸으며 피부 또한 급속한 산성화 현상을 겪었다.

김용수는 이 사건으로 더더욱 세간의 유명세를 타기도 하였으나, 자신은 이 사건을 좀처럼 입에 담지 않았다. 김용수와 절친한 사이를 자랑하던 어느 인사는 김용수 사후에 이런 너스레를 남겼다.

"부끄럽기도 했겠지만서도, 우리 문흥대왕(文興大王:김용수의 시호)께서 금지옥엽 외동 아드님이 아비를 구출하다 똥통 바닥에 숨어있던 화마(火魔)의 발화로 죽을 뻔했던 일을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것이라 사료되는 바이요.“

그랬단다. 그러나, 훗날 태종무열왕이 되시는 그의 아들 김춘추는 이때의 일로 백제 잔존세력들의 함정에서 구사일생 목숨을 구할 수 있었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을 기약한다.

여하튼 김용수의 졸음은 세간의 놀림감으로 자주 오르내렸으나, 그는 깨어있는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이 처리해야 할 일을 신속 정확하게 처리하였으며, 자신이 위치해야 할 곳에 한 치의 오차 없이 서 있었으며, 그가 해야 할 말을 오해 없이 공평무사하게 전달하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탁월하고 적확한 처세술의 비결을 꿈자리 덕분이라고 농담처럼 말하였으나, 그의 꿈자리는 과거의 일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신묘한 능력이 있었고, 앞으로 벌어질 일 또한 정확하게 예언하기도 하였으니... 훗날, 그의 손자 김인문(金仁問)은 이런 글을 남겼다.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낌새를 미리 잘 알아차리신 경우가 많았다.'

뒤숭숭했던 꿈자리와 딴사람이 된 여왕, 지금이 그의 모든 인과적 추리를 쏟아부어야할 때라는 것은 자명했다. 김용수는 스르르 눈을 감았고, 잠시 후 거추장할 정도로 큰 코의 울림통으로 웅장한 코골이가 시작되었다.

ⓒ노길상
ⓒ노길상
ⓒ노길상
ⓒ노길상
ⓒ노길상
ⓒ노길상
ⓒ노길상
ⓒ노길상
ⓒ노길상
ⓒ노길상
ⓒ노길상
ⓒ노길상

섬뜩한 잔상에 김용수는 경기를 일으키며 잠에서 깼다. 생각하면 할수록 예사롭지 않았다. 여전히 안개 속을 걷는 것 같지만, 그러나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꿈은 무사안전한 곳으로 인도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김용수는 대궁 소속의 내관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지난밤 여왕의 침전에서 특이한 일이나 배알을 청한 이가 있었는지를 엄히 물었으나 내관들은 입을 다물었다. 조하 준비에 경황없는 내관들을 계속 잡아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대장군 김서현(金舒玄)과 그의 아들 김유신(金庾信), 대신 을제(乙祭)와 상대등 수품(水品)을 비롯한 문무백관들이 조원전으로 모여들었다. 저마다 갑작스러운 조하를 놓고 설왕설래하고 있었다. 어떤 자는 여왕이 잠시 정사를 내려놓고 궁을 떠나 순무(巡撫)할 것이라 하였고, 어떤 자는 건강을 위해 심산유곡에서 조섭(調攝)할 것이라 하였고, 또 어떤 자는 적정인원을 초과한 용양군(龍陽君:여왕의 남색) 남용에 대한 심심한 사과문을 발표할 것이라 하여 빈축을 샀고, 또 어떤 눈치 없는 자는 내성사신에게 선양(禪讓)을 발표할 것이라 하여 상대등 수품을 비롯한 주변 인사들을 기함케 했다. 그러나 이 모든 말들은 어느 것 하나 인과가 분명하지 않았고 각자의 구재(口才)를 뽐내는, 이른바 사교적 허사(虛辭),즉 말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무료한 일상에 단비 같았던 허사는 여왕의 등장과 함께 막을 내렸다. 여왕의 뒤를 쫄쫄 따라 나온 내관들이 다섯 자(尺)가 넘는 황금빛 횡축(橫軸:가로로 길게 꾸민 족자)을 펼쳐 들었다. 족자의 엄청난 크기에 대신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림엔 큰 대야 크기의 붉은 모란이 빼곡히 그려져 있었다. 여왕은 근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 그림의 출처에 대해 아시는 분이 있으시오?"

여왕의 느닷없는 질문에 백관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눈을 굴릴 뿐이었고, 사교적 언변을 자랑하던 대신들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이 없었다. 여왕은 쥐 죽은 듯 숨죽인 백관들을 둘러보다 김용수를 응시했다.

"내성사신께서는 오랜 세월 그 자리에 계셨으니 아실 법도 합니다만?"

김용수는 거대한 코를 킁킁거리며 그림을 뚫어져라 살펴보았지만 도무지 출처를 알 수 없는 그림이었다. 지난밤 꿈자리와도 연결되지 않았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대신들을 살펴보던 여왕은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

"경들이 기억을 떠올릴 수 있도록 제가 단서를 하나 밝히지요. 이 그림은 천가한(天可汗)께서 보내주셨습니다."

대신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천가한이라면 당의 황제, 즉 당태종을 가리키는 것 아닌가! 신국(神國:당나라)의 황제께서 언제 그림을 보내왔단 말인가. 근래 당과의 사신 왕래는 뜸했고, 저 정도의 큰 선물을 보내왔다면 월성 내 소문이 자자했을 것이다. 여왕이 은밀히 사절을 보내기라도 했다면, 대신들 중 누군가 그 역할을 담당했을 터인데, 돌연 행적이 묘연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제가 너무 짓궂었나 봅니다. 호호호. 경들이 모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 그림은 선왕(先王:진평왕)께서 저를 후계로 결정하시고 신국(神國)에 알리자, 천가한께서 경하의 뜻으로 하사한 그림입니다."

김용수는 기억을 더듬으려 부단히 애를 썼으나 그림과 관련된 어떤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이런 속사정을 여왕에게 들킬 수는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까마득하게 잊었던 일들이 호롱불처럼 밝아지는 듯하군요. 당시 천가한께서 그림을 비롯하여 많은 예물을 보내오셔서 기억하지 못했나 봅니다. 소신의 우매함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여왕은 쓴웃음을 지었다. 김용수는 여왕이 하문(下問)하기 전에 먼저 질문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림을 찬찬히 보니 꽃은 많으나 봉접(蜂蝶:벌과 나비)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인지요?"

꽃과 봉접은 서로 인과적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김용수는 평소의 사고 습관 때문에 꽃이 있으면 당연히 봉접이 있어야 한다는 인과적 판단을 내리게 되었고, 어느 누구보다 먼저 봉접이 없는 사실을 간파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용수의 질문은 여왕으로 하여금 말로써 미당기는 지난한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본론으로 직입 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고야 말았으니...

"바로 그것입니다. 천가한께서 이 그림을 보낸 이유는 봉접이 없는 꽃을 조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연히 이 꽃은 저를 가리키는 것이고요."

좌중은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했고, 대신들은 서로의 숨소리만 확인할 뿐이었다.

"경들도 보는 바와 같이 이렇게 크고 잎이 무성한 화왕(花王:모란꽃)인데 벌과 나비가 날아들지 않습니다. 보기엔 좋으나 향기가 없는 껍데기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천가한의 속내였습니다. 선왕께서도 이 그림을 보시고 마냥 기뻐하시다 저의 설명을 듣고 두 번 다시 거들떠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경들께서 이 그림의 존재를 모르실 수밖에요."

여왕은 좌중을 한 번 훑어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대신들은 숨죽였다.

"여자라면 국색(國色)으로서 남자들이 따르게 하고, 이는 꽃이 향기로서 봉접을 따르게 하는 것과 같은 자연의 순리일진대, 신라의 왕은 어찌하여 후계를 아녀자로서 잊게 하려 하느냐? 이 같은 천가한의 능멸을 저 이외에는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순간 김용수를 비롯하여 상대등 수품, 대신 을제, 대장군 김서현 등의 모든 대신들은 선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여왕의 말은 자신을 업신여기는 신하들을 향한 경고와 진배없었기 때문이다.
"고담준론에 밤새는 줄 모르시는 경들께서 어찌 묵묵부답이십니까? 천가한의 그림이 이 나라의 국왕을 조롱하고 있는데도 분하지 않으십니까? 차마 천가한의 선물에 대놓고 욕지거리를 할 수 없어서 그러십니까, 아니면 경들의 가려운 곳을 천가한께서 시원하게 긁어줘서 그런 것입니까? 이런 마당에 짐(朕)이 어찌 경들을 믿고 정사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여왕의 호통 소리는 조원전 내부를 쩌렁쩌렁 울렸다. 여왕의 격노에 대신들은 더 이상 서있을 힘도 없을 지경이었다. 하나 둘 고목나무처럼 쓰러져 연신 조아리며 울부짖었다. '소신들의 불충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성은이 망극 하와, 소신을 죽여주시옵소서~', '조상 대대로 여왕께 충성을 맹세했건만 소신의 목을 치소서~', '구족을 멸해도 소신은 성조황고마마를 원망치 아니하겠나이다~'등의 간절한 목소리가 조원전 내부를 가득 채웠다. 그나마, 구재(口才)로 단련된 대신들이었기에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적절한 표정과 몸짓, 무엇보다도 여왕이 흡족해할 만한 언사를 순식간에 쏟아내고 있었다.
대신들의 아우성이 소란스러워지자 여왕은 눈살을 찌푸리며 표표히 사라졌다. 대신들은 여왕이 보이지 않게 되자 더더욱 극성스러워졌다. 참다못한 한 내관이 큰소리로 여왕의 마지막 하명을 대신들에게 전달했다. 내관 특유의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는 조원전 내부를 날카롭게 관통하며 끝날 줄 모르던 대신들의 소란을 중지시키기에 이르렀다. 여왕이 남긴 말은 이와 같았다.

"영묘사(靈廟寺)로 행차할 것이니, 문무백관들은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어가를 호종하라!"

침전에 도착한 여왕은 어질어질한 몸을 겨우 가누었다. 시녀들은 향초와 향화의 진액을 탄 목욕물을 준비했다. 욕조에 몸을 담근 여왕은 아무 말 없이 간간히 헛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몸이 달아오르고 급기야 얼굴이 홍조를 띠고 나서야 여왕은 몸을 일으켰다. 늙은 여인의 몸매라곤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잘록한 허리와 탱탱한 둔부... 여왕의 선연(嬋姸)한 자태가 문틈으로 스민 햇빛에 반사되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부풀어 오른 피부의 모공과 체모 사이로 진한 향기가 스며들어 여왕의 몸에서는 향기로운 냄새가 진동했다. 착의와 화장, 그리고 가채 손질이 끝난 후 여왕은 사당(砂糖)을 입에 물고 오물거렸다. 사당은 혀로 녹이는 향즙구슬이었다. 그리하여 여왕은 숨을 쉴 때나 미세하게 움직일 때마다 형언키 어려운 향기가 풍겨났다. 천가한의 모란 그림과는 다른 화왕(花王)의 향내였다.

내관들이 어가의 출발을 알렸다. 영묘사는 진평왕의 원찰(願刹:죽은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사찰)이다. 여왕의 불호령에 이탈하는 신하는 단 한사람도 없었다. 김용수가 신하들의 선두에 섰다. 그는 아들 김춘추의 손을 꼭 잡고 아비에게서 떨어지지 말 것을 다짐케 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대장군 김서현도 아들 김유신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날따라 내로라하는 문무백관 자제들의 많은 수가 입궐하지 않았다. 조원전에서 혼이 났던 대신들은 자제들이 입궐하지 않은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겼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입궐치 않은 자제들과 회합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둘 다 아버지들의 엄명에 꼼짝도 못 하게 되었다.

결국 김용수와 김춘추는 행렬 선두에서 길을 열었고, 어가의 호위는 대장군 김서현과 그의 아들 김유신이 맡았다. 특이했던 점은 외성(外城) 경비를 맡고 있던 장군 알천과 부장 한신이 예고 없이 호위군에 합류한 사실이었다. 간간히 있어왔던 일이라 김서현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영묘사에 당도한 여왕은 선왕을 모신 원당(願堂)에서 제(祭)를 올렸다. 여왕이 제를 올리는 모습은 마치 전투를 앞둔 무인의 그것과 같이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구재를 뽐내고 싶었던 어느 대신은 여왕의 모습이 마치 도솔천에서 사바세계로 일억 팔천년 만에 하생하신 미륵보살의 모습 그대로라며 침을 튀겼다. 여왕의 일거수일투족이 일어날 때마다 아름다운 향기가 원당에 가득 퍼져 대신들의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제를 마친 여왕은 월성으로 귀환하지 않고 대신들과 함께 원내를 거닐었다. 여왕은 모란이 잔뜩 피어있는 길을 따라 말없이 걸었고, 대신들은 여왕의 향기에 이끌려 벌과 나비처럼 그 뒤를 따랐다. 이윽고 영묘사 경내의 연못, 옥문지(玉門池:여성의 성기 모양을 닮은 연못)에 다다랐다. 더욱 극성스러워진 개구리 소리에 귀가 멍할 지경이었다. 여왕은 연못을 빤히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개구리 소리가 유별나구나."

내관들이 연못으로 뛰어들어 돌을 던지거나 막대기를 휘저으며 개구리들을 쫓으려 애썼다.

"허망한 짓 그만하여라. 그런다고 개구리들이 숨기라도 하겠느냐? 명줄을 끊어놓지 않고선 어림없다."

여왕의 말에 대신들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어느 누구도 여왕과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고, 김용수는 유난히 큰 코에 달린 구멍을 벌렁거리며 씩씩댔다.

"내성사신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네?"

깜짝 놀라는 김용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여왕은 말을 이었다.

"근래 들어 이 옥문지의 개구리들이 이다지도 극성인 이유를 말입니다."

"그야~ 올해 유난히 가물어 개구리들이 쉬를 슬지 못해 그렇다고..."

"그래요? 물이 말라 그런다고요?"

"네~ 세간에 떠도는 이야기 옵니다. 괘념치 마시옵소서~"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여왕이 입을 열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옥문지의 극성스러운 개구리울음은 선왕께서 저에게 지기(知機:기미나 낌새를 미리 알아차림)를 나타내 보이려 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아바마마께서 저에게 보내는 위험의 경고라는 말이지요. 내성사신의 꿈자리가 용하다던데, 경의 꿈에는 옥문지의 개구리가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주춤하는 김용수를 보며 여왕은 다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김용수는 직감했다. 구재로서 모면하는 말은 여왕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할 것이라는 것을. 여왕은 미리 계획된 말과 행동을 할 뿐, 다른 말이 끼어들 틈은 애초에 없었다. 여왕은 옥문지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자고이래로 개구리의 툭 불거진 눈은 군사(軍士)의 형상이라고들 한다지요?"

"네~ 언뜻 들어본 듯합니다."

김용수는 고개를 기웃하며 대답했다. 그는 여왕의 의중을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몹시 불안했다.

"알천과 한신은 게 있느냐?"

대신들을 밀쳐내며 알천과 한신이 여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여왕은 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개구리의 노(怒)한 눈은 군사의 형상이다. 내 일찍이 선도산(仙桃山)너머 월성의 서남쪽 변경에 여근곡(女根谷:여성의 성기를 닮은 계곡)이라는 요상한 계곡이 있다 들었다. 이 옥문지처럼 말이다. 그곳에 짐을 해하려는 이적(夷狄)들이 잠입해 있을 지도 모를 일! 너희들은 당장 군사를 이끌고 수탐(搜探)하라!"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어디서 나타났는지 오백여의 기병들이 장군 알천과 부장 한신의 뒤를 따랐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육중한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흔들었고, 병사들은 예행훈련이라도 한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군성(軍聲)이 잦아들자, 여왕은 대신들을 향해 몸을 돌리며 단호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알천과 한신이 돌아올 때까지 경들은 이 옥문지를 떠나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단 한 사람도..."

ⓒ노길상

(계속)
·그림 : 노길상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노길상

이우학교 미술교사, 작가.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