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북한에 의해 제기된 '북한 핵무기 개발' 긴장국면은 한반도를 전쟁직전의 위기로 몰고갔던 지난 93~94년도 상황과 여러 모로 흡사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북한이 부시 미정부의 벼랑끝 협상을 위해 또다시 '핵카드'를 꺼내든 게 아니냐는 분석이다.
그러나 앞으로 전개과정이 과연 당시와 유사할지는 미지수다. 현재 북한의 협상대상은 비둘기파가 권력중심에 서있던 미국의 클린턴 민주당 정부가 아니라, 매파가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공화당 부시정부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3~94 위기상황은 앞으로의 상황전개를 가늠하는 데 한 바로미터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대단히 긴박했던 당시 상황을 돌이켜본다. 다음 글은 기자의 졸저 <세계를 움직이는 127대 파워>의 281~283쪽에 실린 '한반도 탈냉전 기폭제-영변' 내용을 재록한 것이다. 편집자주
***한반도 탈냉전 기폭제-영변**
1990년 4월 미국 국방부는 "북한의 평안북도 영변에 핵무기 원료인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는 핵연료 재처리시설이 완성 직전의 단계에 있다"면서, 그 증거로 이 일대 시설들을 찍은 한 장의 위성촬영사진을 공개했다. 당시 미국의 동북아 헤게모니를 위협하던 남-북, 북-일의 과속 접근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핵카드를 먼저 뽑아든 미국의 노림수는 동북아 냉전 존속이었고, 미국의 의도대로 90년대초 6공 정권 등에 의해 의욕적으로 추진되던 동북아의 자생적 탈생전은 그 싹이 잘렸다.
북한은 미국의 공세에 밀려 장기간의 실랑이 끝에 92년 1월 핵확산금지조약(NPT)에 서명한 데 이어 그해 5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사찰을 수용했다. 핵사찰은 여섯 차례에 걸쳐 일곱 개 시설에 대해 실시되었는데, 93년 2월 IAEA는 이것만 갖고는 불충분하다며 원래 사찰대상에 포함되어 있지 않던 두 개 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을 요구했다. 이것이 결정적 불씨가 되었다.
북한은 이들 시설은 핵과 무관한 군사시설이라며 사찰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자 한국과 미국은 중단한다고 이미 발표한 팀 스피리트 훈련 재개를 선언했고, 이에 대응해 북한은 NPT 탈퇴를 선언하는 동시에 준전시태세 돌입을 선언했다. 분위기는 일촉즉발의 초긴장 상태로까지 고조됐다. 그 무렵까지만 해도 북한은 객관적으로 미국의 외교공세에 밀리는 수세였다.
그러나 93년 미국에서 민주당 정권이 출범하고 중국대륙에서 중화경제권(CEO)이 가공할 모습을 드러내면서, 핵카드의 주도권은 북한쪽으로 넘어갔다. 핵카드를 정면에 내세워 '제2차 한국전쟁이냐, 한반도 탈냉전이냐'를 묻는 북한의 배수진 앞에 한반도 주변4강과 한국은 아연했고, 이때부터 길고 지루한 줄다리기, 총성없는 외교전쟁의 막이 올랐다.
12년만에 정권을 되찾은 미국의 빌 클린턴 민주당정권은 전쟁같은 물리적 해결방식에는 관심이 없었다. 미국의 주된 관심사는 미국의 경제이익이었고, 따라서 미국의 거대시장인 중화경제권이 등장한 동아시아에서 실속없는 제2의 걸프전을 치를 의사가 없었다. 북한이 일전불사의 배수진을 치고 나오자 93년 6월 미국은 차관급의 제1단계 북미 고위급회담을 개최했고, 이에 북한은 회담에서 NPT 탈퇴 유보를 선언했다. 영변이란 핵카드로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후 협상은 미국내 비둘기파(백악관, 국무부)와 매파(국방부, CIA)간 갈등과, 한국의 북-미 직거래 반발, 북한의 김일성 주석 사망 등으로 여러 차례 아슬아슬한 위기와 진통을 겪었다. 그러나 마침내 94년 8월13일 제3단계 제네바 고위급회담에서 북미 양국은 사실상의 수교 전단계를 의미하는 외교대표부 상호 설치와 경수로 건설 지원 등 경제교류 강화로 유약되는 획기적 관계개선에 합의했다. 4년간에 걸친 남북한과 한반도 주변국간 외교전쟁은 94년 10월17일 제네바에서 북한과 미국이 기본합의문에 서명함으로써 그 막을 내렸다.
이 외교전쟁에서 가장 큰 실속을 챙긴 나라는 중국이었다. 평양과 워싱턴 모두가 협상과정에서 장애에 봉착하면 중국에 SOS를 보냈고, 이 과정에서 중국은 일본을 멀찌감치 제치고 동북아의 외교중심으로 자리매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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