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의 단일화가 이뤄진 다음날. 실질적인 선거운동이 시작된 26일 찾은 경남 창원성산은 자유한국당 강기윤 후보와 정의당 여영국 후보 구도로 압축된 분위기였다. "가난한 사람을 대변할 노회찬 같은 인물을 뽑아야 한다"는 시민들과 "침체된 성산 경기를 살릴 한국당을 밀어줘야 한다"는 시민들의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노회찬과 황교안의 대리전이라는 관전평이 나오는 이유다.
창원성산은 LG전자, STX중공업, 두산중공업 등 굵직한 대기업 공장이 몰려있는 경남권 최대 공업단지다. 현장 노동자들은 노동자를 대변해온 노회찬 의원을 뒤이을 여영국 후보를 지지했다. 성산동 일대 중공업에 종사하는 58세 이 모 씨는 "진정으로 노동자의 눈물을 닦아주고 서민의 손을 잡아줬던 것은 노회찬"이라며 "그 빈자리를 노회찬의 정신을 부활시키겠다는 여영국 후보로 채우는 게 맞다"고 말했다.
S&T중공업에 33년째 근무한다는 60대 유 모 씨도 "노회찬은 노동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성산 시민들은 노회찬을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여영국 후보가 노회찬의 뒤를 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민주당과의 단일화에 비판적 의견도 있었다. 유 씨는 "민주당과의 단일화는 밀실야합이고 어차피 민주당쪽에서도 지지를 얻지 못할 것"이라면서도 "민중당 손석형 후보와 단일화를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투표방식에서 합의가 안됐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유권자들에게도 남아있는 앙금을 보여주듯 진보후보 단일화 논의가 결렬된 여영국 후보와 손석형 후보는 이날 민주노총 경남본부에서 열린 대의원대회에 나란히 참석해 취재진의 요청에 의해 나란히 악수를 주고 받았지만 특별히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반면 자영업자들은 어려워진 경기를 탓하며, 경제정책을 주도한 문재인 정권에 대한 심판론으로 한국당의 손을 들어줘야 한다고 했다.
상남동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36세 박 모 씨는 "원래는 바른미래당을 지지하는데 지금 민주당이 지역경제를 엉망으로 만들어서 어쩔 수 없이 한국당 후보를 뽑는다"며 "사업을 하다보니 경제에 민감하다. 민주당이 집권당인 만큼 책임을 져야한다는 의미에서 한국당 후보에게 힘을 실어줄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성산동 아파트형 공장 1층에서 국밥집을 운영하는 60세 이 모 씨도 "이 위에 공장이 700개가 있었는데 반 이상이 비었고, 근처 공장들은 일거리가 줄어서 폐업을 하는 등 지역경제가 말이 아니"라며 "문재인 정부가 탈원전 정책 등을 펼치면서 당장 두산중공업의 일자리가 줄어드는 등 이 지역 산업에 직격탄을 맞고 있다"고 말했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와 고(故)노회찬 의원의 대리전
"이번에 후보들이 유세하는 기 보믄 죽은 노회찬이하고 산 황교안이가 붙는 기 같데이."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와 고(故)노회찬 의원의 대리전. 창원성산에서 벌어지고 있는 강기윤 후보와 여영국 후보의 치열한 선거운동을 바라본 창원 시민들의 평가다.
S&T중공업에 근무한다는 유 모 씨는 "황교안은 사활을 걸고 성산에서 유세를 한다. 강기윤이 당선되면 황교안은 당내에서 대선후보로 발돋움 할 수 있는 면이 선다. 여영국이 국회에 입성하면 교섭단체로서 노회찬이 했던 캐스팅보트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황교안은 황교안대로 사활을 걸고 있고, 정의당은 정의당대로 노회찬 지역구를 지키려고 한다"고 말했다.
황교안 대표와 노회찬 의원의 인연은 197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두 사람은 경기고를 함께 입학한 동기동창이었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가는 길은 달랐다.
노회찬 의원은 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73년 10월 유신선포 1주년을 맞아 반유신 유인물을 뿌렸다. 고2 때인 1974년 4월에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시위가 일자 교실 문을 잠그고 수업 거부를 주도하기도 했다. 경기고를 졸업한 뒤 고려대에 입학한 노회찬 의원은 대학 시절 내내 유신독재 반대시위를 하다, 1989년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사건으로 구속돼 청주에서 옥살이를 했다. 1992년 출소한 그는 진보정당의 기반을 다지는 데 주력했고 2004년 민주노동당 소속 초선 의원이 됐다.
황교안 대표는 모범생의 길을 걸었다. 1~3학년 모두 반장을 지냈고, 고 3시절에는 '학도호국단'(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체제를 고등학교 때부터 각인시키려고 만든 군대식 학생조직) 연대장을 맡았다. 경기고 졸업 뒤 성균관대 법대에 들어간 그는 곧바로 고시반에 들어가 사법시험 준비에 집중했다. 1983년 검사가 된 뒤 '공안통'의 길을 걸었다.
2005년 이른바 '삼성 X파일 사건'때 이 둘은 다시 마주하게 된다. 당시 노 의원은 삼성그룹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떡값검사' 명단을 폭로했다가 수사를 지휘했던 황 대표로부터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국회의원직을 상실했다.
2016년 탄핵 정국 당시에는 국회 본회의 긴급현안질의에서는 노 의원이 황 대표를 상대로 "대한민국의 실세 총리가 있다면 최순실이다. 나머진 다 껍데기다. 알고 계시지 않나"라고 물었고, 황 대표는 "그렇게 속단할 일 아니다. 국정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고 맞섰다. 이에 노 의원은 "속단이 아니라 뒤늦게 저도 깨달았다. 지단이다"라고 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둘의 얄궂은 운명은 돌고 돌아 다시 성산에서 맞붙게 됐다. 시민들의 반응도 엇갈렸다. 성산동에서 중공업에 종사하는 이 모 씨는 "황교안 대표가 창원성산에 와있는 것이 진짜 이 성산 시민을 위해 강기윤 후보를 지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다음 발판을 노리기 위해 와있는 것 같아서 진정성이 없다"고 비판했다.
개인택시를 모는 55세 김명수 씨는 "노회찬 의원도 사실 연고가 없는데 이 곳으로 왔던 것이기 때문에 시민들 사이에서도 노 의원에 대한 반응은 제각각"이라고 말했다.
'노회찬의 부활' 여영국과 '경제는 한국당' 강기윤
'노회찬의 부활'의 내건 여영국 정의당 후보는 노 의원이 생전에 '여영국과 나는 쌍둥이'라고 말할 정도로 각별한 관계였다. 지난 총선 때 노 의원을 설득해 창원성산에 출마하게 만든 것도 여영국 후보였다. 1986년 창원 성산구의 자동차 엔진부품 공장에서 민주노조를 설립을 시도하다 해고당한 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정의당까지 노동정치의 길을 함께 걸어온 '동지'다.
여 후보는 지난 25일 민주당과 단일화 직후 반송시장을 찾아 "제가 서 있는 이곳 반송시장은 작년 그 뜨거웠던 여름, 우리 노회찬 의원님을 보내드리기 하루 전날 영정을 들고 찾았던 곳"이라며 "여영국을 통해서 우리 창원시민들께 반드시 노회찬을 부활시켜드리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노인센터에서 봉사활동을 하고있는 58세 박영숙 씨는 '노회찬 정신'을 뒤이을 정치인이 필요하다고 했다. "노회찬 의원은 노동자 편이고 약자의 편인 정치인이었다. 노회찬 의원같은 정치인이 창원성산에 필요하다"고 말했다.
'경제는 강기윤'을 내건 자유한국당 강기윤 후보는 창원 LG공장 노동자를 거쳐 지금은 지역에서 중소기업을 일군 CEO이기도 하다. 이 지역에서만 네 번째 국회의원에 도전하고 있다. 18대 때 권영길 후보에게 패했으나 19대 때는 손석형 통합진보당 후보를 꺾고 당선됐다. 이후 노회찬 의원에게 패한 뒤 이번 4.3 재보궐선거에 도전한다.
다만 강 후보의 선거운동 전면에는 황교안 한국당 대표가 있다. 강 후보는 선거운동원을 대동하지 않은 채 '뚜벅이 유세'로 시민들을 만나기 때문이다.
이날 5시에 진행된 퇴근길 인사만 하더라도 강 후보는 5시 35분이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황 대표는 5시경 쯤 강 후보보다 먼저 도착해 오래 머물다 자리를 떴다. 퇴근길 인사에서 황 대표를 목격한 36살의 도 아무개씨는 "강기윤 후보는 없고 황교안 대표만 있어서 황교안 대표가 선거에 나오는 줄 알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날 한국당 지지자들이 황 대표를 보러 창원성산에 내려오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빨간 점퍼를 입은 15여명의 한국당 지지자들은 강 후보의 퇴근길 유세 지원에 나온 황 대표 주위를 둘러싸고 "대전에서 황 대표님 보려고 왔다", "할렐루야 황대표님"이라고 하며 황 대표 주위를 에워쌌다. 그러자 황 대표의 수행보좌진이 "선거에 도움주려고 오셨으면 조금 비켜주셔야 한다"고 그들을 저지하기도 했다.
이렇듯 여 후보와 강 후보가 양강 구도를 형성한 이번 보궐선거에서는 손석형 민중당 후보와 이재환 바른미래당 후보의 득표율도 중요 변수가 될 전망이다. 상남동에서 야쿠르트 배달을 하는 53세 박 모 씨는 "민주당과 정의당이 단일화를 했다고 해서 민주당의 표가 곧이 곧대로 정의당으로 가지 않을 수도 있다"며 "민중당이 표를 더 많이 받게되면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겠다"고 전망했다.
초대 민주노총 경남본부장을 역임했던 손석형 후보는 "노동자 직접정치를 실현하겠다"며 노동 현장을 주로 찾았고, 이재환 후보는 이번 4.3재보궐 선거에서 유일한 30대 정치인임을 앞세워 "창원 시민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했다. 이밖에도 대한애국당 진순정, 무소속 김종서 후보 등이 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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