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재판에 넘겨진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의 1심을 맡은 재판부가 검찰의 공소사실이 불필요하게 장황한 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5부(박남천 부장판사)는 25일 오전 양 전 대법원장 등의 첫 공판준비기일을 열고 공소사실을 정리하면서 이렇게 밝혔다.
재판부는 "지금 최초로 공소장에 기재된 공소사실을 그대로 두고 재판을 진행하기는 조금 부적절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검찰의 공소장에 일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그러면서 구체적인 검찰 공소사실을 예로 들었다.
일례로 양 전 대법원장과 박 전 대법관이 2014년 전교조 법외노조 효력 정지 처분에 대한 고용노동부의 재항고 사건을 무리하게 뒤집으려 했다는 공소사실에서 당시 주심 대법관이던 고 전 대법관이 사건 처리를 지연하고 있었다는 부분이 지목됐다.
재판부는 "이 부분은 고영한 피고인에 대해 기소된 것은 없는데도 고영한 피고인이 한 행위의 내용을 이렇게 기재했다"며 "기소되지 않은 피고인의 행위를 이렇게 기재하는 것이 어떤지 잘 모르겠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이 부분은 양승태·박병대 피고인이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과 공모해 행정처 심의관에게 재판의 독립을 침해할 수 있는 내용의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해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했다는 결론으로 공소사실이 마무리된다"며 "그런데 임 전 차장이 이 사건을 정부 운영에 대한 협력 사례로 보고받았다는 것은 한참 뒤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일단 기소된 부분의 공소사실이 다 특정이 됐는데, 직접 관련이 없는 결과·영향 등을 계속해서 기재하고 있는 것"이라며 "이런 내용으로 법관이 피고인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이나 편견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지적했다.
재판부가 검찰의 공소사실이 '공소장 일본주의(一本主義)'에 위배되는 면이 있다고 지적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공소장 일본주의란 검사가 기소할 때 원칙적으로 공소장 하나만을 법원에 제출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 밖에 법원에서 예단을 갖게 할 서류나 기타 물건을 첨부·인용할 수 없다는 취지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례로 확립됐다.
앞서 고영한 전 대법관 측은 지난달 재판부에 검찰이 공소장 일본주의를 위배했다는 취지의 의견서를 제출한 바 있다.
재판부는 이 밖에도 공소사실이 명확하지 않거나 공소 제기된 취지가 불분명한 부분 몇 가지를 지적한 뒤 "최초 공소장 기재대로 재판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변경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검찰은 "공소장 일본주의란 실체 파악에 장애가 되는지에 따라 판단해야 하고, 실제 일본주의에 위반된다고 판단되는 사례는 극소수인 것으로 안다"며 "이 사건은 조금 다른 측면이 있다고 보고 싶다"고 해명했다.
검찰은 "이 사건의 공소사실은 양 전 대법원장이 6년간 여러 동기와 배경에 의해 이뤄진 범행으로 지휘계통에 따라 다양하고 반복적으로 이뤄진 성격이 있다"며 "주된 죄명이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라는 점도 참작해달라"고 밝혔다.
이어 "직권남용은 정당한 직무권한 범위 내의 범행이므로 정확히 설시하지 않으면 왜 범죄가 되는지, 피고인이 뭘 방어해야 하는지 등 오히려 방어권 행사에 방해가 되는 측면이 있다"며 "그런 점을 고려해 피고인들이 어떤 직권에 기댔는지, 전후 사정과 동기는 무엇인지 상술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이와 관련해 검찰과 피고인 측의 의견을 다시 한번 서면으로 받은 뒤 정식으로 공소장 변경을 요구할지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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