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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한당들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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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한당들의 시대

소설 <불한당들의 시대> ①

이우학교 미술교사이기도 한 노길상 작가의 픽션 <불한당들의 시대>를 연재합니다. <불한당들의 시대>는 7세기 경의 한반도 역사를 극화(劇畫:그림이야기) 형식의 판타지 소설로 창작한 것입니다. 부석사의 연기 설화를 바탕으로 의상과 선묘, 그리고 두 사람과 관계된 실존 또는 가상의 인물들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편집자)

1. Intro

서기 660년 7월

백제국은 항복했다.

ⓒ 노길상

황산벌의 육지와 미자진의 바다에서 백제의 군대는 자멸하거나 뿔뿔이 흩어졌다.

백제왕은 스스로 성문을 열고 나와 무릎을 꿇었다.

일그러진 왕의 얼굴 뒤로 태자 효(孝)와 문무대신, 백성들은 머리를 땅에 박고 흐느껴 울었다.

신라의 태자 법민(法敏)은 백제 왕자들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길길이 날뛰었다.

법민은 칼을 빼어 들고 망국의 왕자들을 위협하며 고함쳤다.

"내 누이의 원수, 네 놈들을 갈가리 찢어발기고 말 것이다!"

당(唐)의 대총관 소정방(蘇定方)이 역정을 내고서야 법민의 난동은 잦아들었다.

소정방은 신라의 왕 김춘추를 곁눈질하며 법민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신라에는 무례함만 가득하도다. 먼 이국의 절박한 사정을 가상히 여겨 사지(死地)를 마다하지 않고 온 신국(神國, 당나라)의 군사들 앞에서, 태자라는 자가 경거망동을 하는구나!"

김춘추가 술잔을 받들어 권하고서야 소정방의 노여움은 사그라들었다.

분이 가시지 않은 법민은 여전히 칼자루를 움켜쥐고선 숨을 거듭 몰아쉬었다.

ⓒ 노길상

이후,

의자왕과 태자 효는 무릎걸음으로 나아가 소정방에게 큰 절과 함께 술잔을 올렸다.

소정방은 호쾌하게 웃으며 술잔을 비우고 김춘추에게 잔을 건넸다.

의자왕은 다시 술을 따랐다.

김춘추는 의자왕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잔을 비웠다.

그 광경에 백제의 문무대신과 백성들은 목 놓아 울었다.

밤새도록 당나라 군사들의 왁자한 노래와 함께 흥을 돋우는 백제국 악사들의 풍악소리가 어지럽게 뒤섞였다.

사비성과 웅진성 곳곳에서 미쳐 날뛰는 신라군들의 방화로 불길은 하늘마저 빨갛게 물들였다.

ⓒ 노길상

이로써,

칠백여 년 삼십 일 대(代)를 이어온 백제국은 더 이상 세(世)를 잇지 못하였고,

망국의 왕은 김춘추의 위협에 소정방을 따라 줄행랑치듯 당(唐)으로 피신했다.

태자와 왕자들, 그리고 문무대신 팔십 여 명과 귀족 일만여 명이 버선발로 그 뒤를 따랐다.

곳곳에서 신라군의 학살과 약탈로 백제인들의 절규와 비명이 세상을 가득 채웠지만,

망국의 귀족들은 더 이상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무사안녕만 도모할 뿐이었다.

ⓒ 노길상

앞으로의 이야기는 백제 멸망 즈음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것이나, 등장인물들의 다단한 사연들은 그 이전의 세월에서 비롯된다.

하여,

이야기의 서막을 다소 장황하게 늘어놓아야 할 것이기에 636년 신라의 서라벌로 거슬러 올라가기로 하겠다.

때는 선덕여왕의 치세가 오년에 접어들었던 해였고, 그 해 오월에는 도처에서 개구리 소리가 유난하였다.

2. 개구리

ⓒ 노길상
ⓒ 노길상
ⓒ 노길상
ⓒ 노길상

636년.
여왕의 치세(治世)는 오년을 맞이하였다. 국인(國人:나라사람)들은 여왕을 성조황고(聖祖皇姑)라 칭송하였다.

여왕은 홀아비와 홀어미, 과부와 고아들을 두루 살폈으며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왔다. 대당(大唐)에 사신을 보내 소국(小國)으로서의 질서를 도모하였으며, 신궁(神宮)에 나아가 친히 제사를 주관하였으며, 죄수들을 대거 석방하였다. 조(租:귀족이 백성에게 부과하는 세금)와 세(稅:귀족이 나라에 바치는 세금)를 한 해 동안 면제하였으니...

방방곡곡에서 여왕을 찬양하는 노랫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그 소리는 마치 소서(小暑)가 지난 들판에 붉은 눈이 툭 불거진 성난 개구리울음과 같았고, 그 함성은 마치 끊임없이 밀려오는 동해 바다의 검푸르고 사나운 폭풍우와 같았다.

ⓒ 노길상


* 신국(神國:당나라)

ⓒ 노길상
ⓒ 노길상

* 분황사(芬皇寺:향기로운 여황제의 절이란 의미로, 선덕여왕의 등극을 경축하기 위해 건립된 사찰)
ⓒ 노길상

그해 오월.
여왕은 삼월부터 몸져누웠지만 백약이 무효하였고, 법력 높은 비구(比丘:남자 승려)의 기도소리 또한 공허한 메아리와 같았다. 여왕의 기력이 쇠하면 할수록 신음소리는 더더욱 깊어지고 잦아졌다. 비구들은 여왕의 쾌유를 빌며 인왕경(仁王經:왕을 보호하고 편안케 하는 불교 경전)을 소리 내어 읽었으나, 월성(月城) 밖 극성스러운 개구리울음 소리에 묻혀 버렸다.

자기 그림자에 불현듯 놀란 개들이 연이어 컹컹대기 시작했다.
삼경(三更)이 지난 깊은 밤이었지만 여왕은 쉽게 잠을 청하지 못했다. 여왕은 미륵존상(彌勒尊像) 앞에 엎드려 있었다. 자신의 몸을 두 팔로 지탱하기도 힘들어 두꺼운 보료에 묻히듯 했다. 내관의 그림자가 침실 격살 문에 길게 드리워졌다.

"도착하셨느냐?"

"니예~ 지금 막 당도하셨습니다."

"국인(國人)들의 이목은 잘 속였느냐?"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그래 수고했다. 어서 드시라 하여라."

끼익 하는 돌쩌귀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내관을 앞세우고 검은 그림자가 들어섰다. 여왕은 무릎을 짚으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머리까지 둘러 쓴 가사를 벗으니 파르스름한 머리가 등불에 반사되어 번득였다. 자장 법사(慈藏法師)였다. 자장은 미륵 존상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정성스럽게 경배를 올렸다. 침향의 연기가 더더욱 짙어졌다.

"밤이 깊은데 먼 길을 마다하지 않으시니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황송하옵니다. 황고마마께서 겪으시는 고통에 비할 바 아닙니다."

"여름이 가까우니 개구리들의 야로가 극성입니다."

자장은 여전히 합장한 손으로 미륵 존상을 우러러보았다.

"선왕이 물려주신 미륵존께서는 만고에 빛날 성상(聖像)입니다. 친견할 때마다 용안에 살포시 기댄 옥수의 형상에 경외심을 억누를 길 없습니다. 인자한 미소는 과연 황고 마마의 모습 그대로이십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여왕은 씁쓸하게 웃었다.

"더 이상 아바마마의 유훈(遺訓)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미륵의 영험이 저를 지켜주실 것이라 하셨습니다만..."

"황고 마마께서 미륵의 현신(現身)이라 믿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 믿음 저버리지 마십시오."

"그들도 조만간 저 개구리들처럼 기광스러워질 것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자장은 여왕을 향해 돌아서며 실눈을 뜨고 좌우를 살폈다. 경계하는 자장을 보며 여왕은 헛웃음을 지었다.

"괜찮습니다. 개구리들은 도처에 있습니다. 이제 숨길 것도 드러낼 것도 없습니다."

"소승이 밤길을 좇아 마마를 황급하게 알현 코저 한 이유는..."

또다시 자장은 주변을 의식하고 있었다. 여왕은 문밖에 시립한 내관을 향해 말했다.

"이(爾:왕이 아랫사람을 부를 때의 호칭)야~ 침전 주변으로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 못하게 하여라. 너 또한 대궁(大宮:왕의 거처) 기단 밖으로 물러나 있어야 할 것이다."

사위가 적막해지자 자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장군 알천(閼川)과 소장 한신(韓信)이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개구리들의 비밀 회합지도 알아냈습니다. 마마께서 결단만 내리시면 됩니다."

"일이 간단하겠습니까?"

"저들의 기고만장함이 오히려 화를 불러일으키는 형국입니다. 함부로 개구(開口:입을 열어 말한다는 뜻이나 여기에선 여왕을 향한 중상과 모략을 일삼는 언사를 가리킨다)하여 마마의 존엄을 농락하고 성체를 우롱하는 자들은 모조리 씨를 말려야 할 것입니다."

"그럼, 결행일은 언제입니까?"

여왕의 물음에 자장은 본능적으로 좌우를 살피느라 잠시 뜸을 들였다.

"명일(明日)입니다."

"내일? 그렇게 빨리요?"

"그렇습니다. 개구리들이 눈치 채기 전에 전광석화처럼 해치워야 됩니다."

여왕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자장은 소매에서 짤막한 묵서가 적힌 지편을 여왕에게 건넸다.

"이렇게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자장은 애써 환한 낯빛을 지으며 결연한 어투로 답했다.

"그렇습니다. 성조 황고 마마~ 이번 거사를 통해 개구리들은 마마의 하해와 같은 성은을 뼛속 깊이 각인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황천길을 다투느라 경황이 없겠습니다만, 하하하~"

여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자장을 응시했다.

"대자대비 석존(釋尊)을 모시는 분께서 하실 말씀은 아닌 듯합니다. 호호~"

자장은 눈에 힘을 주며 다시 말했다.

"원광국사(圓光國師)께서도 살생유택(殺生有擇)이라 하셨습니다. 입적하시지 않았다면 힘을 보태셨을 것입니다. 황고 마마의 안위가 곧 나라와 백성의 안위입니다. 미륵이신 마마의 뜻이 곧 석존의 가르침이기도 하고요...”

여왕은 잔잔한 미소와 함께 자장을 향해 합장했다. 자장은 무릎을 꿇고 엎드리며 말했다.

“이번 거사로 되방지게 개구(開口)하여 마마를 업신여기는 모든 자들을 모조리 척결할 것이옵니다. 알천과 한신의 계획은 빈틈이 없습니다."

여왕은 고개를 들어 미륵존상을 쳐다보았다. 미륵존상의 화려한 광배(光背) 조각에 불빛이 아롱지며 스멀스멀 굼틀했다. 여왕은 선왕(先王)의 영령이 서리고 있어 그리 보이는 것이라 생각했다.
“아바마마~ 저를 굽어 살펴주시옵소서.”

굵은 눈물방울이 살구 빛 뺨을 촉촉이 적셨다. 자장은 오체투지와 함께 인왕경을 나지막이 독송했다. 그의 두 뺨도 상기되기 시작했다.

그날 밤, 자장의 독송 소리는 첫닭의 홰 소리가 들리며 잦아들었다.

이윽고 먼동이 트자 도처에서 왁자했던 개구리울음소리도 잦아들었다.

(계속)
·그림 : 노길상

ⓒ 노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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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길상

이우학교 미술교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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