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른 내리막길에 추니가 200미터 앞서고, 만능 키님은 300미터 정도 내 뒤를 따라왔다.
‘엇, 왜 그러지?’ 앞서 가던 추니가 멈췄다.
‘아니, 길가에 누군가 쓰러져 있잖아. 설마 우리 일행은 아니겠지’ 하면서도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순간 애써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얼른 와보라’는 추니의 손짓이 거칠었다.
다가갈수록 선명해지는 춘천댁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시선을 먼 곳으로 돌렸다.
‘앗! 사고다.’
머리를 푹 숙인 채 춘천댁이 풀숲에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그 순간 지나는 차량 운전자들이 하나둘씩 춘천댁 주변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운전자들은 무언가 도우려고 웅성거리며 주위를 에워쌌다. 저 멀리 도로 양 끝에는 이미 누군가 수신호를 하며 사고 현장임을 알리고 있었다.
어떤 운전자가 도로 한가운데 나뒹구는 가방과 자전거에서 떨어져 나간 부품들을 마구 도로 바깥으로 끄집어내고 있었다.
“자, 숨을 쉬어보세요. 하나 둘 셋∼.”
“저를 보세요.”
“이번엔 왼팔을 들어올리겠습니다. 아프면 말씀하세요.”
“다음엔 오른팔입니다.” 어떤 젊은 여성이 춘천댁을 마주 보며 상태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자, 숨을 크게 들이마셔 보세요. 어디가 아프신가요?”
“….”
춘천댁은 아무런 말도 없이 머리를 끄덕여 왼쪽 가슴을 가리켰다. 얼굴이 하얗고 겁에 잔뜩 질린 모습이었다.
“자, 어깨 뒤를 보겠습니다. 아프면 말씀하세요.”
“아∼. 아파요.” 왼쪽 어깨 뒤를 누르자 고통스러워했다.
“응급차를 불러주세요.” 옆에 서있던 남자에게 얘기했다. 같은 차에서 내린 걸로 보아 남편 같았다.
춘천댁 왼쪽 어깨 뒤 찢어진 옷 사이로 심하게 긁힌 자국이 보이고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남편에게 연락 좀 해주세요.” 춘천댁이 앞서간 남편 뭔지를 찾았다.
“예, 연락했어요.” 전화를 했는데 받지 않는다는 얘기를 차마 하지 못했다.
‘카톡으로 메시지를 남겼으니 달리다가 쉬는 시간에 카톡을 보게 되면 되돌아오겠지’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소식이 없는 걸 보니 여전히 달리고 있는 상황 같았다.
“여러분들은 걱정하시지 말고 어서 가십시오. 저희가 뒷수습을 하겠습니다.” 응급 처치를 맡았던 젊은 여성이 주위에 몰려있던 다른 운전자들에게 말하자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지나는 차량 운전자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차에서 내려 혹시 뭔가 자신의 역할이 필요한지를 물어본 뒤에야 다시 떠났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수고해주셔서.”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인사를 했다.
“네. 휴즈(Hughes)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 아내고요.” 옆에 있던 남편 휴즈 씨가 응급 처치를 하던 젊은 여성을 소개했다.
“응급차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곳이 외딴곳이라서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휴즈 씨가 말했다.
나와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던 휴즈 씨는 차선 건너편 도로변에 정차해놓고 사고 처리를 돕고 있었다.
“휴즈 씨, 죄송하지만 부탁이 있는데요.” 나는 말을 억지로 꺼냈다.
“네. 말씀하십시오.”
“이분 남편이 저 앞에 먼저 갔는데 연락이 되질 않아요. 그분을 좀 데려와 주시겠어요?” 정말 염치가 없었다.
“네, 어느 정도 갔을까요?”
“약 7~8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갔다 오겠습니다.”
휴즈 씨는 조심스레 유턴해 뭔지를 데리러 떠났다. 마침 휴즈 씨의 승합차에는 자전거를 서너 대 실을 수 있는 트레일러가 달려있어 앞서간 뭔지와 인천 총각을 한꺼번에 싣고 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많이 아프시죠?”
“휴우, 미안해요, 사고를 내서.”
“어디가 가장 많이 아프세요?”
“옆구리가요. 숨 쉴 때 많이 결려요.”
“큰 일 날 뻔했어요. 어쩌다가.”
“강풍에 그만 핸들을 놓쳤어요.”
“차량들이 고속으로 달리고, 갓길도 없는데 그나마 천만다행이에요.”
“그때 곁을 지나는 차량이 없어서 2차 사고는 면했어요.” 춘천댁은 주변에 깨진 자전거 부품들과 가방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보험은 가입했지요?”
“네, 여행자 보험은 오기 전에 들어놨어요.”
반 시간 정도 지나 구급 차량 도착과 동시에 휴즈 씨도 뭔지를 차에 싣고 사고 현장에 돌아왔다.
“아니 웬일이야.” 남편 뭔지가 놀라 달려들며 춘천댁 손을 잡았다.
“아∼, 아파요." 춘천댁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눈물을 애써 감췄다.
“가장 가까운 제럴딘 병원으로 가겠습니다. 보호자도 이 차에 타십시오.” 구급 차량은 춘천댁과 뭔지를 태우고 쏜살같이 넘어왔던 고갯마루를 다시 넘어 사라졌다.
“구급차를 타고 간 두 분의 자전거는 제가 먼저 싣고 가서 제럴딘 파출소에 보관해놓겠습니다.” 휴즈 씨가 말했다.
“파출소가 어디 있어요?”
“제럴딘 시내에 있습니다.”
“아, 잠깐만요.”
나는 춘천댁 자전거 보관뿐만 아니라 앞으로 이 사고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했다.
“자전거 타고 천천히 되돌아오셔서 자전거를 찾아가세요.” 휴즈 씨가 다시 말했다.
“저기요. 휴즈 씨. 저를 제럴딘 시내까지 데려다주세요.” 내가 말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일행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장소를 구하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제 차에 같이 타시죠.” 휴즈 씨가 말했다.
나는 춘천댁 내외분 것과 내 자전거를 휴즈 씨 차에 싣고 왔던 길을 되돌아 제럴딘 시내로 향했다.
“먼저 가서 자리 잡고 연락할게요.” 일행이 자전거를 타고 되돌아오는 도중에 나는 장소를 정해 메시지를 주기로 했다.
“휴즈 씨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큰 도움을 주셔서요.” 제럴딘으로 오는 차 안에서 다시한 번 고마움을 표했다.
“별말씀을요. 저에게 이런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오히려 기쁩니다.”
“휴즈 씨, 혹시 제럴딘에 홀리데이 파크 있나요?”
“네, 한 군데 있어요.”
“그곳으로 저를 데려다주시겠어요?”
나는 홀리데이 파크에서 사고를 수습하는 게 여러모로 편리할 거라고 판단했다.
“제럴딘에는 작은 병원뿐이라서 영상 촬영이 어렵다고 합니다.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티모루 병원으로 다시 이동합니다.” 뭔지가 구급차를 타고 가면서 카톡을 보내왔다. 상황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았다.
“제럴딘 시내 홀리데이 파크로 오세요.” 나는 자전거를 타고 되돌아오고 있는 일행에게 카톡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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