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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 로지의 벽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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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에코 로지의 벽난로

[‘바이크 보헤미안’ 최광철의 수상한 여행 3] ⑨기대의 대가

나는 일행과 함께 필 포레스트 로지 정문을 나와 에코 로지 숙소를 찾아 핸들을 돌렸다.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도로변 작은 레스토랑에 ‘OPEN’이라고 쓰인 형광판이 눈에 띄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고 너무 반가웠다. 이토록 작은 마을에 늦게까지 문을 연 식당이 있다는 게 의외였다.

자전거 여섯 대가 레스토랑 마당을 꽉 채웠다. “영업 중이신가요?” 나는 삐걱거리는 목재 출입문을 열고 들어갔다.
“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침침한 조명 탓에 안쪽에 있는 여종업원을 얼른 알아차리지 못했다.
“잠깐만요.” 나는 바깥에 서있던 일행들에게 들어오라며 힘껏 손짓했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와∼, 따스해요.” 일행은 우비를 벗어들고 들어오며 모두 한마디씩 던졌다.

ⓒ최광철 여행작가·방송인

열 평 남짓 레스토랑 안쪽 바(BAR)에는 네 명이 맥주잔을 들고 여종업원과 마주 앉았고, 식당 홀에는 대여섯 명이 앉을 수 있는 빈 테이블 두 개가 놓여있었다.

‘와우, 하하하.’ 바에 앉아있던 손님들이 일행들을 보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소리쳤다.

“여기서 저녁 좀 먹으려고요.” 여종업원에게 말했다.
“네. 저기 빈 테이블에 앉으십시오.” 바 끄트머리 출입문을 번쩍 들어올리고 나와 메뉴판 여섯 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치즈 피자 라지 두 개와 콜라 1.5리터짜리 두 병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근데요. 혹시 이 근방에 에코 로지라고 있나요?” 주문을 받고 돌아서는 여종업원에게 물었다.
“에코 로지요? 네, 저기 저분이 에코 로지 매니전데요.” 바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 뚱보 거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키 2미터, 몸무게 100킬로그램은 족히 넘어 보이는 뚱보 거인의 덥수룩한 구레나룻이 경계심을 자아냈다.

“저기요, 저희 에코 로지를 찾고 있는데요.” 나는 가까이 다가가 정중하게 물었다.
“….” 뚱보 거인은 아무 말 없이 빙그레 웃음만 띠었다.

“한국에서 왔어요. 뉴질랜드 자전거 여행을 하고 있어요. 엊그제 크라이스트처치를 출발했습니다. 오늘 저녁 에코 로지에서 묵으려고 해요. 가능한지요?”
또박또박 단어를 끄집어냈는데 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 듯했다. 게다가 나는 뚱보 거인의 말은 한마디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필담이 오가고 착오를 거듭하면서 차츰 무슨 말인지 서로 조금씩 이해가 깊어졌다.

“1인당 십오 달러, 일행이 여섯 명이니까 모두 구십 달러입니다.”
“네, 좋아요.” 나는 즉답했다. 지금 가격을 논할 상황이 아니었다.
“위치를 알려드릴 테니 그곳으로 가시죠.”
“먼 곳에 있나요?”
“아뇨. 좀 외딴곳에.”
“그럼 잘 곳을 먼저 좀 확인할 수 있을까요?”
“….”
뚱보 거인은 반쯤 남은 맥주잔을 내려다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최광철 여행작가·방송인

“내가 갔다 올게요.”
피자를 기다리고 있는 일행을 남겨두고 뚱보 거인의 뒤를 따라 레스토랑을 나섰다.

“따라오세요.”
불과 100미터 정도 걸어 도착한 곳은 뚱보 거인의 집 차고였다. 그는 셔터 문을 들어올렸다.
“옆에 타십시오.” 작은 트럭에 올라타며 내게 말했다.
“예, 에코 로지가 먼 곳에 있나 봐요?”
“아뇨. 멀지 않아요.” 대답이 무뚝뚝하게 들렸다. 이렇게 덩치 큰 사람 옆에 앉은 적이 처음이다.

차고를 빠져나와 큰 고개를 넘어 한참을 달리자 오른쪽으로 들어가라는 손바닥 크기의 작은 에코 로지 방향 표지판이 전조등에 반사됐다.
뚱보 거인이 샛길로 핸들을 돌리자마자 곧바로 차량이 교행하기 어려울 정도의 좁은 진흙길이 나타났다. 누가 언제 이곳에 들어왔는지 흔적이 없고, 양옆에 잡풀이 무성해 도랑과 노면이 제대로 구분되지 않았다.

‘쭈르륵쭈르륵.’ 바퀴가 진흙에 미끄러지면서 길게 지그재그로 움직였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웅덩이를 텀벙거리며 연신 통과했다. 갑자기 푹 꺼진 도로를 넘느라 바이킹 타는 전율을 느꼈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이거 어쩌지.’ 나 혼자 중얼거렸다. 설사 가봐서 로지가 괜찮다고 하더라도 가로등도 없는 캄캄한 밤중에 일행들이 자전거를 밀고 들어올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그냥 돌아가자고 할까.’라고 생각했지만 차마 되돌아 나가자고 말하기엔 너무 깊이 들어왔다.
드디어 2킬로미터 넘는 진흙탕 길을 통과해 시커먼 건물 뒷마당에 차를 세웠다. 스무 평 남짓 마당을 에워싼 고목들이 으스스했다.

“들어오세요.” 뚱보 거인이 손전등을 들고 앞장섰다. 뚱보 거인이 거실 벽면을 더듬어 전원 스위치를 켜자 소파 두 개와 벽난로가 보였고,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쪽으로 오세요. 여긴 4인용 침대가 있고요, 저 방에 2인용 침대가 또 있습니다. 이 벽난로는….” 뚱보 거인은 내 눈길과 상관없이 이 방 저 방을 오가며 안내를 해댔다.

“저기, 잠깐만요. 집이 참 조용하고 예쁘네요. 그런데요.” 뚱보 거인의 안내가 계속되고 있는 도중에 말을 끊었다. 맘에 들지 않는다고 딱 거절하질 못했다.
“하지만 우리 동료들이 밤중에 이곳으로 들어오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가로등도 없고요, 진흙탕이라서요.”

“….”
뚱보 거인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 건지, ‘그렇다면 할 수 없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말이에요. 우리 동료들 오늘 밤 이곳으로 데려다줄 수 있어요? 차에 태워서요. 그리고 내일 아침에 다시 그곳 레스토랑까지 데려다주고요.”
“….” 뚱보 거인은 아무 대답 없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수고비는 더 드릴게요.” 대가 없이 부탁하기엔 꽤 번거로운 일이고 또 이것 이외는 다른 대안이 딱히 없었다.
“….” 뚱보 거인은 뭔가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요. 1인당 오 달러, 사천 원씩 추가됩니다.”
“네. 지불할 수 있어요.”
“숙박료 15×6=90, 운임비 5×6=30, 총 백이십 달러.” 벽에 걸린 작은 흑판에 분필로 적어가며 내게 말했다.


ⓒ최광철 여행작가·방송인

“알겠어요. 이해했습니다. 백이십 달러.”
“그럼 일행 태우러 가죠.”
“두 번 왕복해야겠네요?” 자전거 여섯 대와 가방이 스무 개나 돼서 두 번 왕복 운행 한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서 나는 미심쩍어 재차 물었다.
“아닙니다. 자전거는 저 아래 레스토랑 옆 창고에 두고 오늘 저녁에 필요한 짐만 갖고 이곳으로 오시면 됩니다.”
“아, 그게 좋겠군요.” 내가 생각지 못한 아이디어였다.
“내일 아침에 몇 시쯤 이곳으로 픽업하러 와야 합니까?” 뚱보 거인이 내게 물었다.
“열 시쯤이 좋을 것 같은데, 일단 돌아가서 우리 일행들에게 설명하고 최종 결정을 할게요.”
진흙길 텀벙거리며 미끄러져 다시 돌아 나올 때는 스릴이 느껴졌다.

“오래 기다렸지요?”
“어때요, 거기서 잘 수 있어요?” 일행들의 눈빛들이 잔뜩 긴장돼 보였다.
“그게 말이에요….”
배가 고파 나도 모르게 테이블에 손을 뻗었다. 식은 피자엔 차라리 김빠진 콜라가 더 어울렸다.

“자전거는 여기 창고에 집어넣고, 가방만 들고 한 차에 모두 탑시다.” 일행은 레스토랑 옆 뚱보 거인 집 창고에 자전거를 보관했다.

“와우∼, 짜릿짜릿해요.” 에코 로지를 향해 좌우로 쭈욱 쭈욱 미끄러지며 달려가는 일행들은 마치 놀이기구를 타고 있는 어린애들 같았다.

“자전거 끌고 여기 왔더라면 모처럼 유격 훈련 한 번 해보는 건데.” 만능 키가 말했다.
“어휴, 들어올 수가 없을 거예요.” 추니가 말했다.
“등을 진흙탕에 대고 총을 껴안은 채 한 뼘 높이 철조망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통과했는데 이 정도야.”
“군대 시절 얘기예요?” 추니가 물었다.
“드러누운 채 두 다리로 땅바닥을 밀었지요.”
“영화에서 본 적 있어요.”
“그때는 뭐 안 되는 게 없었어요.”
뚱보 거인은 우리가 킬킬대는 얘기를 마치 알아듣기라도 한 듯이 핸들을 이리저리로 홱홱 돌려댔다.

어느새 로지에 도착했다. ‘츠그측측 츠그측측.’ 깊은 산속 빗소리가 적막감을 더해주고 있었다. 나는 로지 방에 들어서기 전에 처마 밑에서 한동안 서성거렸다. 아까 뚱보 거인과 단둘이 왔을 때보다는 훨씬 마음이 평안했다.

꺼내놓은 옷가지들은 거실을 온통 덮었고 만능 키는 가스레인지에 불을 붙였다. 나는 바깥에 쌓아놓은 장작을 한 아름 안고 들어왔다. 인천 총각은 벽난로에 통나무를 넣고 불쏘시개로 잡지 한 권을 구겨 넣었다.

거실에 채 훈기가 돌기도 전에 벽난로 왼편엔 춘천댁이 매트 깔고 먼저 잠에 빠졌다. 오른쪽엔 만능 키가, 정면엔 인천 총각이 자리를 잡았다. 모두들 벽난로를 둘러싸고 뒤엉켰다. 마치 난민촌 같았다

나는 거실 맞은편 침대 방에 잠자리를 폈다. 방구석에 있던 담요를 몇 장 더 깔았는데도 눅눅하긴 마찬가지였다. 새벽 네 시에 장작 한 무더기를 더 들고 왔다. 오래된 빈집에서 텐트와 옷가지들이 건조되면서 풍기는 냄새는 고약했다.

내심 비가 내려 하루 더 머물고 싶었는데 아침 햇살에 실망했다. 크라이스트처치를 출발해 라카이아에서 1박 하고, 다시 이곳 필 포레스트에서 하룻밤을 보냈으니 오늘이나 내일쯤 하루 쉬는 게 체력 관리에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행 모두 먼동이 트기도 전에 이미 텐트와 침낭을 가방에 넣고 햇살과 함께 떠날 채비를 끝냈다.

10시, 에코 로지를 나와 뚱보 거인 집에 도착해 창고에 보관해두었던 자전거를 꺼냈다. 어젯밤 축 쳐졌던 일행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각자 물병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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