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0년간 아랍권의 대표적 친미국가이며 동맹국인 사우디 아라비아를 ‘악의 핵’(kernel of evil)'로 분류하는 충격적 내용의 보고서가 작성돼 미 정부의 고위 정책자문기구에 보고된 것으로 밝혀져 미-사우디 관계의 앞날에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6일 “지난 7월10일 국방전문 싱크탱크인 랜드연구소(RAND)의 로랑 무라윅(전 프랑스 국방장관 참모)이 국방정책기획단(DPB) 위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사우디 아라비아는 우리의 적’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지난 해 9.11테러의 용의자 19명 중 15명이 사우디인이며 테러자금의 상당 부분이 사우디에서 조달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미국내 반사우디 감정이 고조된 것은 사실이지만 사우디를 적으로 규정하는 보고서가 미국의 정부기구에 보고되고 논의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국방기획단은 국방정책과 관련, 미 국방부에 정책자문을 하는 정부기구로 저명한 학자와 전직 각료 등으로 구성돼 있다. 국방정책기획단 위원 중에는 전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와 전 국방장관 제임스 슐레진저. 해롤드 브라운, 전 부통령 댄 퀘일, 전 하원의장 뉴트 깅그리치와 토머스 폴리, 그리고 데이비드 제레미아. 윌리엄 오웬스 등 예비역 장군 등이 포함돼 있다. 이번 발표현장에는 모두 24명이 참석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발표된 보고서는 심지어 사우디 아라비아를 중동지역의 ‘악의 핵, 가장 위험한 적’ 등으로 규정했다.
무라윅은 “사우디 정부에게 전세계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 대한 자금 지원과 사우디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미·반이스라엘 선전활동을 금지하도록 하는 한편 사우디 정보기관 요원 등 테러활동와 연계된 자들을 처형하거나 격리시키라고 미국이 강력하게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말 안들으면 사우디 유전·금융자산 장악하라**
이번 연구발표에서는 그는 “사우디인들은 정책입안자부터 금융가, 그리고 간부에서부터 일반 병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각종 테러활동에 연루돼 있다”면서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사우디의 유전과 미국내 사우디 금융자산 등을 장악할 필요가 있다”고 촉구했다.
이처럼 사우디가 테러지원국가로 매도당하게 된 배경에는 사우디의 실질적 통치자이며 친미 성향인 압둘라 왕세자가 확고한 권력 장악에 실패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그동안 중동평화안을 제시하며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해결 등에 노력해 왔으나 정책기조가 친미적이어서 중동지역 아랍권 국가들로부터 외면받아 왔다. 사우디 왕실 내부에서도 압둘라 왕세자의 반대파가 득세하고 있다.
현 국방장관이 압둘라 왕세자의 최대 정적 술탄 왕자이며 그는 압둘라의 친서방정책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주미 대사도 술탄 국방장관의 아들 반다르 왕자다. 또한 술탄 왕자의 형제인 나이프 내무장관은 국내 시위와 관련된 정보들이 외국으로 새나가지 못하도록 사우디 언론에 대한 통제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사우디 정부내 반압둘라 세력들은 최근 잇따라 발생하고 있는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의 테러활동도 지원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때문에 서방 군사전문가들은 사우디의 현 정권이 붕괴돼 과격파가 정권을 장악할 가능성도 우려하고 있다.
압둘라 왕세자와 술탄 왕자를 둘러싼 사우디 왕실내 갈등은 중병을 앓고 있는 파드 현국왕이 사망하면 더욱 심화될 전망이다.
미국이 최근 이라크 침공을 서두르는 것도 사우디 정국에 대한 불안감으로 사우디에 대한 석유의존도를 줄이고 안정적인 유전 확보를 위한 속셈도 있다는 것이 군사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지난 91년 걸프전 이후 미국은 사우디의 석유자원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사우디에 미군을 주둔시키고 있는데 이 때문에 아랍권의 반미감정이 증폭되고 있으며 오사마 빈 라덴 등에 의한 반미 테러의 빌미가 되고 있다.
이라크의 원유 매장량은 사우디에 이어 세계 2위로 영국과 노르웨이가 공유하고 있는 북해유전의 7배에 해당되는 규모여서, 이라크 유전을 확보하게 되면 사우디에 대한 압박수단도 된다는 계산도 이라크 침공 전략에 포함돼 있다.
***미 행정부내 신보수강경파 목소리 높아져**
사실 이번 연구발표가 사우디에 대한 경각심과 적개심을 높인 최초의 주장은 아니다. 지난 해 9.11테러 이후 신보수파들이 발행하는 잡지들이 비슷한 논문들을 잇따라 게재한 것이다. 일례로 댄 퀘일 전 부통령의 수석보좌관이었던 윌리엄 크리스톨이 편집하는 ‘위클리 스탠더드’(7월15일자)는 ‘사우디와의 결전’을 예측했고 미 유대인협회가 발행하는 ‘커멘터리’ 최신호는 ‘우리의 적, 사우디’라는 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이번 보고서는 미 국방부의 정책 결정에 조언과 자문을 하는 국방정책기획단에 발표됐다는 점에서 민간부문의 반사우디 주장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더욱이 연구발표장에 있었던 소식통에 따르면 발표를 듣고 난 후 반대 의견을 밝힌 위원은 헨리 키신저 뿐이었다. 몇몇 위원도 키신저의 견해에 동의했지만 대다수는 반대의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반사우디적인 연구결과에 대해 가장 환영하는 이들은 외교정책에서 신보수파로 불리는 부류로 이들은 숫자로는 적지만 부시 행정부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참모였던 케네스 아델만은 “사우디 아라비아를 우호적인 국가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국방기획단 위원이기는 하지만 발표현장에는 없었던 그는 “사우디가 미국의 적이라는 견해에 동조하는 이들이 1년전보다는 확실히 많아졌다”고 주장했다.
미 행정부 특히 국방부는 아직 사우디를 공식적으로 우방으로 부르고 있다. 국방부 빅토리아 클라크 대변인은 5일 "지난 번 연구발표 내용이나 DPB위원들의 발언은 국방성의 공식 견해와 상관없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하지만 체니 부통령과 펜타곤의 정책지휘부에서는 사우디에 대한 문제의식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DPB위원인 엘리엇 코언 존스 홉킨스대 교수(군사전략 전문가)는 “사우디 아라비아는 적이라기보다는 애물단지에 가깝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워싱턴포스트는 이러한 견해는 미 행정부의 본류와는 거리가 멀다고 지적하고 있다. 미 군부와 빈번한 접촉을 하고 있는 로버트 오클리 전 주파키스탄 대사는 “사우디 아라비아와 직접 부딪치는 것보다는 사우디 내부의 개혁을 유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접근법”이라면서 “개혁으로 사우디가 변화하길 바라는 것이 우리의 최대 희망이며 그것은 오직 사우디 내부로부터 나올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소식통이 전한 키신저의 발언도 “사우디는 우리의 우방으로서 어려운 곳에서 정책을 펴나가야 하는 입장이다. 미국은 사우디에 대한 관계조율을 결국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요약된다.
키신저는 이번 발표에 대해 언급하기를 거부했지만 자신이 경영하는 컨설팅회사가 사우디 정부에 자문하지 않고 있으며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큰 사업을 하는 고객도 없다고 말했다. 사우디와의 사업적 이해관계 때문에 사우디를 두둔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는 “사우디가 가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을 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전략적 의미에서 미국의 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시대가 바뀌면서 친미 정권이 흔들리자 오랜 동맹관계도 하루 아침에 ‘적’으로 매도하는 미국의 ‘감탄고토’ 전략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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