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상 국무총리 지명자의 인사청문회 과정에 논란이 되는 대목중 하나가 장상 지명자가 이대총장 당시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김활란 기념사업'의 정당성 여부다.
한나라당 이주영 의원은 29일 "이화여대 총장 재임 당시 김활란 기념사업회를 주도한 것은 친일역사 청산에 역행한다"고 지적했고, 안대륜 의원은 "김활란씨의 친일행적이 속속 밝혀지던 지난 98년 김활란상을 제정하면서 '왜 김활란인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았느냐"고 따지기도 했다.
장상 지명자는 이에 대해 "그 분의 친일행적에 대해선 비판하되 우리 여성의 고등교육 등을 위해 애써오고 공헌한 부분에 대해선 그것대로 인정하고 평가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한 인간을 평가하는 데 공과 과를 함께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지명자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김활란이 (본인이) 학도병으로 나가라고 한 죄로 실명(失明)할 것이고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말했으며, 아무도 일본이 망한다고 말하기 전에 일본이 망한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이같은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김활란을 적극 옹호하기도 했다.
이같은 장 지명자의 반론에 대해 민주당 조배숙 의원은 그러나 "김활란상 제정이 '다른 일을 잘하면 국가배신행위를 해도 용납되는구나'라는 교육효과가 나올 수 있다"고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장 지명자는 그러나 "그 분의 친일행적에 대해 토론했지만 생애 전부가 반민족적인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면서 "이대 역사 최초로 존경하는 스승에 대해 판단을 내린 것"이라고 자신의 행위를 방어했다.
장상 지명자의 이같은 태도는 시민단체 및 심지어는 여성계로부터도 적잖은 비판대상이 되고 있다. 참여연대의 경우 장상 지명자의 '민족관'을 문제삼으며 '총리 부적격' 의견을 국회에 제출하기까지 한 상태다.
과연 이 논란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판단은 독자 몫이다. 단,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하나의 자료를 제시하도록 한다.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회장 김희선 의원)은 지난 2월28일 '친일파 7백8명' 명단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문제의 김활란을 위시해 대표적인 여성계 인사의 친일 행적도 상세히 기록돼 있었다.
이들 여성들은 교육과 여성운동의 선각자로 평가받아 왔으며 이들의 행적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재에도 이들이 설립한 학교와 여성지원단체가 활동 중이다. 당시 여성계 일부에서도 이들이 친일파 명단에 포함된 데 대해 크게 반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이 우리나라 여성운동 및 근대교육에 기여한 공로가 많다고 해서 이들의 친일 행적이 덮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자료를 통해 과연 김활란은 일제 전후기를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살펴보고, 과연 장상 지명자의 '논법'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를 알아보도록 한다. 편집자
***김활란(金活蘭)의 주요 경력 및 친일경력**
-1899년 인천생
-1918년 이화학당 대학과 졸업
-1923년 김필례(金弼禮), 유각경(兪珏卿) 등과 함께 YWCA를 창립
-1924년 미국 오하이오 웨슬레안 대학에서 교육, 철학 등을 전공하고 졸업
-1924년 9월 보스턴 대학원에 입학하여 문학석사 학위 받음
-1925년 6월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 및 학감에 취임
-1927년 민족, 사회 양진영이 손잡은 근우회(勤友會)의 창립 때 기독교 대표로서 발기총회 준비위원, 창립총회 임시의장, 초대 임시의장, 초대 중앙집행위원을 맡음
-1928년 7월 근우회 2차 중앙집행위원회 검사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임의로 활동을 중단
-1930년 도미하여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 받음
-1937년 조선부인문제연구회 상무이사
-1937년 작위를 받은 귀족부인들이 일본의 침략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금비녀를 뽑아 바치자고 조직한 '애국금채회(愛國金釵會)'의 간사
-1938년 6월 8일 조선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에서는 위원회를 개최하고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세계기청으로부터 퇴맹키로 결의하는 동시, 내선일체란 단일국민의 이념 하에 일본기청에 가맹키로 하였는데, 이때 경성실행위원이다.(매일신보 1938. 6. 9)
-1938년 6월 20일 이화여전과 이화보육의 4백명 처녀들로 '총후보국을 내조한다'는 애국자녀단을 조직
-1939년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이화보육학교의 교장으로 취임
-1940년 10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1940년 10월 16일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발기인, 이사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1941년 9월 16일에 전조선에 6개반을 동원, 10월 30일부터 1주일간 39개소에서 '부인생활정의'라는 연재로 강연반을 편성하였을 때 제5반으로 평양, 진남포, 안주, 신의주, 선천, 정주에서 강연활동
-1941년 10월 22일 현재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1941년 11월 15일 창립된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1941년 12월 2일을 기하여 저명한 부인강사를 각지에 파견하여 전국인식과 징병, 징용제의 취지를 철저히 하는 순회강연을 하기로 하였는데 김활란은 충청북도에 파견되었다.
-1941년 12월 27일 오후 2시 부민관 대강당에서 조선임전보국단 결전 부인대회를 결성하고 오후 6시 '여성의 무장'이라는 연제로 강연
-1942년 2월 15일 부민회관에서 열린 영(英) 동양침략의 아성 싱가폴 공략 대강연회에서 '대동아 건설과 우리의 준비'라는 연제로 강연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1946년 9월 파리에서 열린 국제연합총회 한국대표
-1956년 11월, 1957년 10월, 1958년 10월, 1959년 9월, 1965년 12월 등 다섯 차례에 걸쳐 국제연합총회 한국대표로 참석
-1961년 9월 이화여자대학교를 정년퇴직하고 명예총장 겸 재단 이사장으로 봉직
-1962년 11월, 1964년 11월, 1966년 11월의 제12~14차 유네스코 총회의 한국 수석대표 및 대표로 참석
-1963년 교육부문 대한민국장 수상
-1965~1970년 사망 시까지 대한민국 순회대사로 임명되어 활동함
-1970년 사망 후 대한민국 일등수교훈장이 추서됨
***김활란의 친일행적**
<<친일의 길 걸은 여성 지도자의 대명사>>
<교육, 기독교계 여성 지도자의 대명사>
김활란은 한국 근대여성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박사 1호이며 일제하에서 전문학교의 유일한 여성교장 그리고 YWCA 창립자' 등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교육,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혀 왔다.
그리고 8.15 해방 이후에는 이화여대 총장직과 여러 학교의 이사장직을 맡았으며, 사회단체로는 YWCA, 한국여성단체협의회, 대한부인회, 주부클럽연합회 등 여성단체를 설립하고 회장 등의 임직원을 역임하였고 정부수립 직후에는 유엔총회 한국대표, 공보처장, 대한민국 순회대사, 한국아시아반공연맹 이사 등 정치, 외교활동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의 공로로 교육부문 대한민국장, 대한민국일등수교훈장, 필리핀으로부터 막사이사이 공익부문상, 미국으로부터 종교지도자에게 주는 다락방상을 받았다.
그러나 교육, 여성계에서 그가 누렸던 명성과 지위만큼이나 일제말기에는 당시 활동한 어느 여성보다도 자주 친일단체에 이름을 내놓았고, 많은 친일 논설을 발표했으며,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부응하는 행동을 취했다.
<민족주의자 이화학당 교사 김활란>
그가 이화학당 대학과를 졸업하고 이화학당 교사로 있을 때 3.1 운동이 일어났다. 그 당시 그는 지하독립운동 조직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의 자서전 '그 빛 속의 작은 생명'을 보면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는 참으로 중대한 일을 맡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것은 발각되기만 하면 가차 없이 중한 형벌과 희생을 부를 만한 일이었던 것이다. 나는 비밀독립운동단체에서 일부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것은 학교와 교회여성단체로부터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단체로 보내는 독립운동자금을 중앙본부에 전하는 일이었다. 나는 엄중한 지령 하에 움직였다.'
이 일로 하여 1년 남짓 도피생활을 하고 그는 다시 이화학당 교사직을 맡았으며 1920년에는 이화학당 학생들로 조직된 전도대를 이끌고 평양, 신의주 등 북부지방 선교에 나서기도 하였다.
1922년 5월경 김활란은 유각경, 김필례와 함께 YWCA를 창립하고, 7월말 미국 유학의 길에 올랐다. 유학 중에는 YWCA 관련 국제회의에 몇 번 참석한 것 외에는 조국독립을 위해 일하자는 현지 독립운동단체들의 요청을 모두 거절했다.
1926년 말부터 민족, 사회 양 여성운동 진영간 통일전선 결성 움직임이 활발했다. 미국에서 귀국한 뒤, 기독교계 핵심인물로 떠오른 김활란도 이러한 움직임을 멀리 할 수 없었다.
1927년 5월 27일 마침내 민족, 사회 양진영이 손잡은 근우회(勤友會)가 탄생했다. 근우회 창립 초, 김활란은 기독교계 대표로서 발기총회 준비위원, 창립총회 임시의장, 초대 중앙집행위원을 맡으며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이후 근우회는 1928년 7월의 제2차 중앙집행위원회는 사회주의 세력이 대거 진출했다.
김활란은 2차 중앙집행위원회 검사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그 직후 임의로 활동을 중단해버렸다. 그는 자신이 주력할 곳은 근우회가 아니라 학교, 교회, YWCA 등 기독교계라고 생각한 것 같다.
<반민족행위의 시점>
김활란의 친일행위는 1937년 이화여전 부교장 시절부터 시작된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식민지 조선을 전쟁기지로 만드는 시점이다. 김활란은 애국금채회(愛國金釵會)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일제의 침략전쟁에 금비녀를 뽑아 바치는 이 단체에 가담한 것은 명백한 반민족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이후 그의 이름은 조선부인연구회,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조선교화단체연합회,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조선언론보국회 등 일제가 만든 온갖 단체의 간부직에 가장 자주 오르내렸다.
그런 가운데 1938년 6월 20일 이화여전과 이화보육의 4백명 처녀들로 '총후보국을 내조'한다는 애국자녀단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부인총궐기촉구강연회, 시국부인강연회, 학병권유계몽독려반 강연 등 전국을 돌며 일본의 침략전쟁에 협조하는 연설을 하고 다녔다. 야마기 카쓰란(人城活蘭)이라고 창씨개명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1938년 6월 8일 조선 YWCA를 일본 YWCA에 통합시키는데 앞장섰다. 이 때 회장이 김활란이었다.
<학병, 징병을 권유>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이후 일제는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지원병제에서 나아가 징용, 징병, 정신대 등의 강제 연행을 시작하였다. 동시에 식민정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고 선전하기 위해 각종 친일단체를 결성하여 우리 민족의 정신까지 앗아가려는 온갖 책동을 다하였다.
그는 각종 친일단체의 간부로서 부인궐기촉구강연, 결전부인대강연, 방송 등을 통해 일제의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내선일체, 황민화 시책을 선전하며 일반 여성이나 여학생들에게 '어머니나 딸, 동생으로서' 징병, 징용, 학병 동원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였다.
확장되는 전선을 일본인 군인으로만 막을 길이 없자 전면적인 징병제를 실시하여 조선의 남아들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삼고자 한 결정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감격하였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지금까지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 귀한 아들을 즐겁게 전장으로 내보내는 내지의 어머니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반도여심 자신들이 그 어머니, 그 아내가 된 것이다……. 이제 우리도 국민으로서의 최대 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얼마나 황송한 일인지 알 수 없다.'('징병제와 반도 여성의 각오', 신세대 1942. 12)
'학도병 출진의 북은 울렸다. 그대들은 여기에 발맞추어 용약(勇躍) 떠나련다! 가라, 마음놓고! 뒷일의 총후(銃後)는 우리 부녀가 질 것이다. 남아로 태어나서 오늘같이 생의 참뜻을 느꼈음도 없었으리라. 학병제군 앞에는 양양한 전도가 열리었다. 몸으로 국가에 순(殉)하는 거룩한 사명이 부여되었다.'('뒷일은 우리가', 조광 1943.12)
이밖에도 그는 신문, 방송, 강연을 통해 일제의 앞잡이로서 내선일체, 황국신민화 정책을 선전하며 우리의 젊은이들을 징병, 징용 학병으로 내보내는데 앞장을 섰다.
1944년 악성 안질에 걸려 실명할 우려가 있다는 의사의 말에 "남의 귀한 아들들을 사지(死地)로 나가라고 했으니, 장님이 되어도 억울할 것 없지… 당연한 형벌"이라고 말하였다 한다.(김옥길의 '김활란 박사 소묘')
해방후 김활란은 대부분의 친일경력을 가진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그가 택한 정치세력은 '친미반공'을 내세운 정치권력과의 밀착이다. 그는 단 한번도 독재권력과 맞서 싸운 적이 없다. 오히려 정권과 '밀월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들의 수족으로 활동하였다.
김활란은 분명 탁월한 역량을 지닌 여성 지도자다. 그러나 그 탁월한 역량은 한국근대사가 굴절을 겪는 주요 고비마다 다수의 한국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소수의 지배권력을 위해 발휘되었다.
경찰이나 군대, 행정기관에 소속되어 항일운동가와 민족성원을 탄압한 사람들과는 다르지만, 문화, 교육가로서 일제에 협력한 그의 역할은 결코 가벼울 수 없는 만큼 그가 민족사에 남긴 오점은 분명히 해야 한다.
<종별 건명 또는 연재>
- 1941년 7월 5일 '애국정신에 빛나는 총후의 각오'
- 1941년 9월 19일 '부인 생활정의 강연' : '전조선 6반을 파견'
- 1941년 11월 26일 '국민총력중앙이사회석 담' : 담화
- 1943년 5월 5일 '가정도 전장이다' : 방송
- 1943년 6월 27일 '남자에게지지 않게 큰 결의를 갖고 있다'
- 1943년 8월 7일 '적 격멸에 일로 매진' : 매일신보 논문
- 1944년 6월 27일 '감격과 중한 책임'
<인용저서>
-친일파 99인, ②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275~283p), 저술자 : 강정숙(영남대 강사, 여성학,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친일파 99인, ③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부록2 일제하 친일단체 및 기관 소속 주요인명록, 268, 269, 279p)
-친일파 죄상기, 김학민 정운현 엮음, (민족정기의 심판 : 47, 48p, 친일파 군상 : 354, 386, 387, 431, 442, 443, 447, 448, 452p)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찬(108~10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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