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대하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모습이 문득문득 상기된다. 가끔 웃음을 보이고 활기찬 모습을 보기기도 했지만, 초조하고 긴장된 표정이 가득했다.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고, 손을 비비고 깍지를 끼기도 했다.
확대회담 자리에서 김 위원장은 "우린 1분이라도 귀중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서두르지 않겠다. 속도는 중요하지 않다"는 트럼프 대통령과는 너무 분명하게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무엇이 이렇게 김정은 위원장을 초조하게 했을까? 절실하게 얻고자 하는 게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얻고자 하는 건 있는데 어려워 보이고 시간은 부족할 때 초조감과 긴장은 높아지게 마련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얻고자 하는 것은 제재 완화다.
북한은 지난해 4월 '핵·경제병진 전략'을 '경제건설총력 전략'으로 전환했다. 인민생활의 향상을 위해서다. 이를 위해서 비핵화 회담에 나온 것이다. 안보전략의 중추였던 핵을 내주고 그만큼의 경제제재 완화를 얻으려는 것이니 긴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긴장된 모습으로 표현된 진정성
역설적이게도 초조한 김정은의 모습은 비핵화의 진정성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핵을 보유하고 있겠다는 마음이라면 뻣뻣하게 버티면 된다. '나는 그냥 가지고 있을 테니 알아서 하시오'하는 마인드라면 '1분이 귀중하다'는 얘기는 나올 수 없다. 가보를 내놓기로 마음먹고 그 값으로 논을 사기로 했다면, 실제 흥정은 떨리고 마음 졸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이니 안 내놓겠다는 생각이라면, 속 태울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김정은을 더욱 애태우는 것은 미국 쪽 사정이다. 올해가 지나면 미국은 대선 정국으로 넘어간다. 조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협상에 임하고 있는 트럼프가 협상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트럼프와 협상을 이뤄내야 한다'는 불퇴전의 태도로 하노이에 갔을 것이다. 그러니 그런 표정, 그런 몸짓을 감출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미국 쪽 사정은 트럼프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달 한국의 국회의장을 만난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은 "북한의 의도는 비핵화가 아니라 남한의 무장해제"라고 말하면서 북한에 대한 불신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북한이 겉으로는 비핵화할 것처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한미 군사 훈련 중단과 주한미군 철수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니 북한과의 협상에 큰 의미를 두지 말고 제제·압박에 더 관심을 집중하라는 의미도 된다.
펠로시가 민주당 소속임을 감안하면 공화당과 보수언론의 대북 불신은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도 없을 정도라 하겠다. 심지어 진보적이라고 알려진 언론들도 북한에 관해서는 회의와 의구심을 앞세운다.
미국에 팽배한 '북한위협 상수론'
이러한 미국 조야의 인식은 '북한위협 상수론'에 기초한다. 북한은 늘 위협이고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그런가? 북한은 여전히 남한을 공산화하려 하고 기회만 있으면 무력으로 공격하려 하는가?
전국적 범위에서의 민족해방 민주주의혁명 추구를 명시한 조선노동당 규약을 들먹일 수 있다. 하지만 1990년대 국가·정권의 존망 위기를 겪고 여전히 세계 최빈국 수준인 북한이 생존보다 더 긴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을까?
북한은 이미 생존 올인 전략으로 변화한지 오랜데, 미국은 과거의 틀로 북한을 보고 있다.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인지부조화의 전형이라 하겠다.
좀 더 들어가 보자. 이런 인지부조화는 왜 생겼을까? 미국의 안보정책의 전통과 연결되어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지속적으로 적을 상정해왔다. 소련, 쿠바, 북베트남, 이라크, 이란, 시리아, 북한 등등. 그 바탕 위에서 국내를 결속시키고, 군산복합체를 살찌우고, 동맹을 강화하고, 시장을 확대하고, 세계적인 리더십도 확보해왔다. 그런 맥락 속에 '북한위협 상수론'은 자리 잡고 있고, 국익에 적극 공헌하고 있기 때문에 공화당, 민주당 불문하고 이를 버리려 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흐름과 아울러 미국의 북한 불신에 기여하는 것이 '북한은 약속을 안 지킨다,' '북한은 늘 거짓말을 한다'는 인식이다. 비핵화 합의를 해도 안 지킬텐데 애써 노력할 필요 없으며, 더욱이 미국이 뭘 주면서 하는 협상은 절대 안 된다는 생각이다. 미국의 정계, 학계, 언론은 물론 일반인 사이에서도 널리 퍼져있는 편견이다.
그 바탕에는 1994년 북미 제네바합의를 북한이 일방적으로 깨고 다시 핵개발을 시작했다는 판단이 있다. 주요 언론과 학자들이 북한의 약속위반을 반복적으로 전하면서 그런 판단은 미국의 보편인식이 되다시피 했다.
그래서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합의 직후인 11월 중간선거에서 승리한 공화당이 약속한 중유를 제공하기 위한 예산 승인을 미뤄 불신이 형성되기 시작했음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찾기 어렵다.
그런 미국 조야의 대북 불신 분위기 속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협상의 국면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어찌 보면 신기할 정도이다. 그렇지만 트럼프의 '원맨쇼'는 워싱턴의 기득권 세력과 다른 정치를 해보겠다는 무게 없는 동기에 기인하는 것이어서 조마조마할 따름이다.
그래서 트럼프의 협상 노력을 계속 추동하는 우리 정부의 노력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동시에 미국 조야의 대북인식 업데이트 작업도 게을리 하면 안 되는 일이다. 오히려 그게 더 시급한 과제일지도 모른다. 그게 바탕이 되었을 때 트럼프의 협상은 지속될 수 있다. 불신 속의 대화인 만큼 비핵화 협상은 긴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
진정성 관리 필요
다시 김정은의 비핵화 진정성 문제로 돌아가 보자. 길어지는 협상의 과정에서 김정은의 비핵화 진성성이 계속 유지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는 북핵문제 해결의 전제와도 같은 것이어서 중요한 문제이다. 과연 그의 진정성은 계속 갈 수 있을까?
하노이 정상회담 과정에서 북한은 영변 핵 시설 폐기에 대한 대가로 2016~2017년 채택된 유엔결의 5건의 내용 중 민수경제와 인민생활에 지장을 주는 항목들만 먼저 해제하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그런데 미국은 그 외 한 가지를 더 해야 한다고 요구해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한다. 북한의 제재해제 요구를 미국은 사실상 전면적 해제로 인식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김정은의 비핵화 진정성이 약화되지 않을까 우려스럽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은 김정은 위원장이 북미 거래에 대해 "의욕을 좀 잃었을 것"이라고 전하기도 했다.
북핵문제를 이야기하면 김정은의 진정성부터 끄집어내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그도 모를 것이다. 북미회담을 시작할 때는 분명히 진정성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회담을 시작했을 것이다. 하노이 정상회담 시작 당시 그의 표정도 진정성을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행과정은 그 진정성을 희석시키는 과정이었다. 비핵화 진정성의 유지는 많은 부분 미국에 달려 있다. 북한 핵의 일부를 폐기하고 제제의 일부를 완화하는 안은 상식적으로도, 북미 불신의 환경을 고려해서도 합리적인 방식이다. 서로 원하는 바도 분명히 밝혔으니 속도감 있게 진행될 수도 있다.
진정성은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생길 수 있는 것이다. 그보다는 우리정부의 보다 적극적인 협상촉진자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 심열성복(心悅誠服), 즐거운 마음으로 민족문제 해결에 정성을 다해 순종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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