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건으로 기소된 양승태(71) 전 대법원장이 청구한 보석을 법원이 받아들이지 않은 배경에는, 재판 과정에서 증거를 인멸할 우려가 여전히 있다는 판단이 깔린 것으로 분석된다.
5일 법원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5부(박남천 부장판사)는 양 전 대법원장이 청구한 보석을 기각했다.
재판부의 구체적인 기각 사유가 공개되지 않았지만, 양 전 대법원장이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을 경우 증거를 인멸하거나 공범들과 말을 맞출 우려가 있다는 검찰 주장을 받아들인 것으로 법조계에서는 해석한다.
그간 법조계에서는 양 전 대법원장이 기소된 직후 보석을 청구한 것을 두고 '사정 변경'을 기대한 승부수 아니겠냐는 해석이 많았다.
구속영장이 발부된 시점에서는 수사를 받는 피의자 신분이었지만, 검찰이 기소해 피고인 신분으로 전환된 만큼 수사보다는 재판 과정에서의 '방어권 보장'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게 됐으리라는 것이다.
실제로 양 전 대법원장 측은 지난달 26일 열린 보석 심문에서 "사안을 가장 잘 아는 양 전 대법원장이 구치소 안에서 방대한 기록을 충실히 검토하기 어렵다"고 토로하며 불구속 재판을 주장했다.
양 전 대법원장도 "검사들이 법원을 샅샅이 뒤져 찾아낸 20여만 쪽의 증거 서류가 장벽처럼 가로막고 있다"며 "무소불위의 검찰과 마주 서야 하는데, 내가 가진 무기는 호미 자루 하나도 없다"고 토로했다.
그는 "공평이 없는 재판에서는 정의가 실현될 수 없다"며 검찰과 대등한 위치에서 방어권을 행사하게 해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런 양 전 대법원장의 주장보다는 "공범이나 수사 중인 전·현직 법관에 부당한 영향을 줘 진술을 조작하거나 왜곡할 우려가 충분하다"는 검찰의 주장에 무게를 실은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보석 심문에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윗분들이 말씀을 안 하는데 내가 어떻게 먼저 말하겠느냐"라고 진술한 사실도 공개하며 진술이 조작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맞섰다.
아울러 양 전 대법원장의 지시에 따라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에 가담한 혐의를 받는 전·현직 법관 10명이 이날 무더기로 기소된 데다, 검찰이 추가 기소를 할 가능까지 열어 둔 점에서도 증거인멸 가능성을 무겁게 판단한 것으로 관측된다.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등도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형평성' 차원에서도 양 전 대법원장을 풀어 주기에는 부담이 컸으리라는 분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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