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딜'도 '스몰딜'도 없었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이틀간 진행된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아무도 예상 못한 '합의 결렬'로 마무리됐다. 세계적 관심과 기대가 쏠린 회담이었던 만큼 실망스러운 결과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28일 오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 결렬을 설명하는 기자회견 뒤 곧바로 전용기로 베트남을 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베트남 체류 일정은 2일까지이지만 북미 협상과는 무관한 일정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회담에 임하는 양국 정상의 태도는 신중하고 사려깊었다. 27일 만찬 회동을 시작으로 28일 오전 진행된 단독회담까지, 트럼프 대통령은 농담 한마디 없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감사를 표한다"며 진지하게 예우를 갖췄다.
김 위원장도 트럼프 대통령을 "각하"로 부르며 "통 큰 정치적 결단"을 추켜세웠다. 김 위원장은 "비핵화 하지 않을 거면 여기 왔겠냐"고 적극적 의지도 보였다.
이 같은 분위기는 오후 들어 업무오찬과 합의문 서명식 취소 소식이 전해지면서 반전됐다.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설명한 회담 결렬 사유는 '북한 탓'으로 기운다. 김 위원장이 완전한 비핵화에 앞서 "모든 제재를 해제하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사실이라면, 김 위원장은 2006년 이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으로 채택된 10여개의 대북 제재를 일괄 해제해야 비핵화 조치에 나서겠다는 말을 한 셈이 된다.
김 위원장이 선(先) 비핵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미국에 이 같은 무리한 요구를 실제로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비핵화 조치와 상응조치의 의제를 세분화하고 수위별로 맞교환하는 단계적·동시적 해법을 강조해 온 북한의 일관된 접근법과 괴리가 크기 때문이다.
앞서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도 지난달 스탠퍼드대 강연에서 북한의 단계적·동시적 해법을 수용할 수 있다는 뜻을 밝힌 만큼, 협상 결렬의 가장 큰 이유가 '전면적 제재 완화'를 요구한 북한 쪽에 있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석연치 않다.
오히려 실무회담을 통해 도출한 밑그림을 트럼프 대통령이 수용하지 않았을 것이란 관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와 관련해 트럼프 대통령은 "내가 원했다면 합의문에 서명할 수도 있었지만, 오늘은 그 합의문에 서명하기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고 말해 사전에 '잠정 합의안'이 마련됐음을 시사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이 최대 쟁점인 영변 핵시설 폐기에 "완전히 동의했다"면서 "그러나 영변 핵시설 해체에만 만족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영변 핵시설 폐기까지 수용할 각오로 하노이 담판에 나선 반면, 트럼프 대통령은 영변 외 모든 핵시설과 핵무기에 대한 폐기까지로 수위를 높여 협상을 어렵게 했다는 뜻이 된다.
폼페이오 장관도 "영변 핵시설 외에도 굉장히 규모가 큰 핵시설이 있다"면서 "미사일도 빠져 있고, 핵탄두 무기체계가 빠져 있어서 우리가 합의를 못했다"고 말해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을 뒷받침했다.
미국 내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과 대좌하기 전부터 결렬을 결심한 게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북한의 비핵화 가능성에 회의적인 미국 여론을 고려해 호락호락하지 않은 '승부사' 이미지를 사전에 계획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트럼프 대통령은 발언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속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해 묘한 여운을 남겼다. 당초 이는 협상 전략 차원의 발언으로 해석됐으나, 합의문 서명이 무산된 뒤엔 한껏 높인 비핵화의 문턱을 북한이 수용하지 않으면 협상장을 뜨겠다는 뜻을 담은 결렬의 예고편이 아니었냐는 쪽으로 바뀌었다.
다만 현 시점에서 협상 결렬의 원인과 책임을 명확하게 따질 수 없어 북한 당국이 회담 결렬에 관한 입장을 낼지도 지켜봐야 할 상황이다.
'시계제로' 한반도, 文대통령 역할론 부상
국제적 부담 속에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8개월 만에 재회한 회담이 결렬되면서 향후 한반도 정세는 '시계 제로'의 상황에 빨려들었다.
물론 비핵화 협상이 시작된 2017년 전의 상황으로 북미가 회귀하는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하기는 무리다. 일단 트럼프 대통령이 "갑자기 일어서서 나온 것이 아니라 우호적으로 마무리했다. 악수도 했고 서로 간 따뜻함이 있었다"고 밝혀 대화의 끈이 완전히 끊어졌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추후 정상회담 일정과 관련해선 "지금 말하긴 어렵다. 조만간 열릴 수도 있지만, 올해가 지나야 할 수도 있다"고 밝혀 '톱다운' 방식의 북미 협상이 새로운 동력을 찾을지는 불투명해졌다. 전면적 제재 완화와 영변을 넘어선 일괄 비핵화라는 최대 수위의 합의가 쟁점으로 형성된 이상, 단계적·동시적 해법이 효력을 유지할지도 장담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북미 양측은 물론이고 문재인 대통령도 곤혹스런 처지에 내몰렸다. 2차 북미 정상회담의 성과를 바탕으로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답방과 한미 정상회담을 배치해 한반도 정세 변화에 속도를 높이려던 문 대통령의 구상은 재조정이 불가피해졌다.
무엇보다 최소합의 즉 '스몰딜'마저 불발되면서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등 남북 경협 사업만이라도 숨통이 트이길 바랐던 문 대통령의 처지가 난감해졌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북미 간 제재 완화 문제가 결론 나야만 금강산 관광 재개, 개성공단 재가동, 철도도로 현대화 사업, 대기업 대북 투자와 같은 것들이 결정되는데 제재 완화가 하노이에서 가닥을 못 잡았기 때문에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답방과 4차 남북 정상회담의 필요성이 북한으로서는 없어졌다"고 비관적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의 중재자 역할이 오히려 중요해졌다는 전망도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문 대통령과 가진 전화통화에서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과 대화해서 그 결과를 알려주는 등 적극적인 중재 역할을 해 줄 것을 당부했다"고 밝혔다.
정 전 장관은 "한국 정부의 역할이 절실히 필요하다"면서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보다는 평양에 비공개라도 특사를 보내야 한다"고 북한의 정확한 의중 파악을 강조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