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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특집] 세종 첫 만세운동 ‘전의장터 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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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특집] 세종 첫 만세운동 ‘전의장터 만세운동’

이수욱 등 열사 15명·1천여 시민 참가…일제 탄압 역사적 의의

▲이경순 세종박팽년연구소 소장이 전의면사무소 앞마당에 세워진 전의장터 만세시위운동 기념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프레시안(=김수미 기자)

세종특별자치시 지역은 일제의 탄압을 가장 심하게 받아 역사적으로도 의의를 갖고 있다. 세종에서 처음 독립만세를 외쳤던 ‘전의장터 만세운동’을 재조명한다. / 편집자

유관순 열사가 ‘아우내장터’에서 만세 운동을 펼쳤다면, 세종시(옛 연기군)에는 ‘전의장터’에 모인 시민들이 일제에 항거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1919년 3월1일 서울시 종로구 탑골공원에는 수천 명의 시민들이 모여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로부터 12일 뒤인 3월13일 세종특별자치시(이하 세종시) 전의면 읍내리 전의장터에서 이수욱 애국지사의 주도 하에 세종지역 첫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전의장터 만세운동은 세종지역에서 일제의 탄압을 가장 심하게 받은 독립운동으로 역사적으로도 의의가 있다.

이수욱은 유림의 집안에서 태어나 조부와 백부로부터 유학을 습득하고 서울을 왕래하며 신학문과 접하고 당시 정세를 익히며 성장한 인물로 꼽힌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의 ‘세종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년 기록화사업 보고서’를 보면 당시 이수욱이란 인물과 전의장터 만세운동과 관련한 다양한 증언이 실렸다.
▲세종시 첫 만세운동인 '전의장터 만세운동'이 일어난 전의면 읍내리 일원에 만세길 표지판이 붙어 있다 ⓒ세종박팽년연구소

이수욱 종손자 이규태(69)씨의 증언에 따르면 이수욱은 서울을 자주 왕래했고 3·1운동의 옥고를 치른 직후에도 고향에서 생활하지 않고 상경해 서울 가회동에서 주로 생활했다.

그는 서울로 상경해 1919년 3·1 운동을 직접 목격한 뒤 3월6일 귀향해 전의면 신정리 30대 전후 젊은 청년들을 규합해 만세시위를 결심한다.

귀향 후 바로 추경춘을 만나 독립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뜻을 같이하기로 결행한다. 다음날인 7일 같은 마을 박성교의 집에서 추득천, 윤자벽, 윤자훈, 윤상억, 김재주와 회합해 13일 전의 읍내 장날을 이용해 만세를 부르기로 결정한다.

8일에는 김병옥의 집에서 정원필, 이장희, 이광희와 만나 13일 만세운동을 결의하고, 시장에서 군중들에게 나눠줄 태극기 150본을 자택에서 직접 제작한다.

그는 만세운동 당일인 13일 오전 9시쯤 장고개에서 시장을 보러가는 주민들에게 태극기 150본을 나눠 주고, 낮 12시40분쯤 1000여 명의 군중들에게 연설하며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주창했다.

사전 약속으로 시장에 모인 추경춘, 추득천, 윤자훈, 윤자벽, 윤상원, 윤상원, 윤상억, 김재주, 정원필, 이장희, 이광희와 시장에서 참여한 이수양, 윤상은, 정상복, 이규영, 이상건은 윤자명·윤자벽으로부터 받아 옷 속에 숨겨 두었던 태극기를 꺼내 들고 흔들면서 군중과 함께 만세를 외쳤다.

일제는 조치원에서 헌병과 철도원호대원 20명을 출동시켜 진압하기에 이른다. 이 만세시위로 이수욱 등 15명 이상이 재판에 회부돼 징역 1년6월을 선고 받아 옥고를 겪기도 했다.

전의면의 수형자명부는 공주지방법원에서 7명과 경성복심법원에서 5명 및 고등법원에서 3명이 종결돼 모두 15명의 기록이 현존하고 있다.
▲세종시 전의면 갈정리 고개는 전의장으로 향하는 길목에 해당됐다. 1919년 3월13일 이수욱이 장터에 가는 사람들에게 직접 제작한 태극기를 나눠 주던 장소로 현재는 뒤로 보이는 고속전철과 맞은 편에 조성된 산업단지로 옛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됐다 ⓒ프레시안(=김수미 기자)

현재 전의면사무소 앞마당 우측에 위치한 애국지사추모비에는 이들 15명 이외에 윤상억을 포함해 16인이 3·1운동 애국지사로 기록돼 있다.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냈던 박은식 선생이 집필해 1920년 발간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등 문헌에 따르면 세종시 만세운동은 전의만세운동을 시작으로 조치원과 연기 일대 등 지역 전역으로 번져 나갔다.

횃불시위를 포함해 10여 회가 넘는 격렬한 집회가 이어졌고 수천 명의 지역민이 동참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 전의장터 만세운동 항일투쟁은 역사적으로도 의의가 있지만 이렇다 할 연구나 기념사업이 없어 시민들의 기억에서 잊혀지고 있다.

운동이 펼쳐졌던 전의시장에는 현재 장날에만 상인들이 찾아오는 작은 골목길에 ‘만세길’이라는 도로명 표지판이 걸려있고 전의면사무소 앞마당에는 기념비가 설치돼 있다.

이경순 세종박팽년연구소 소장은 전의시장 만세운동에 대해 “1919년 3월13일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한 군중 수는 태극기를 나눠 준 인원만 150명이고 실제 만세운동에 참여한 인원은 1000여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며 “이 일대 지역에서 가장 큰 장이 전의장터였기 때문에 실제 인원은 그 이상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올해 세종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기록화 사업이 전개되고 있다”며 “당시 독립운동가의 생가를 찾아가 기록이 될 자료들을 수집하고 유적지 현황을 파악하는 등 이제까지 정리되지 못한 역사 자료를 찾아 모으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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