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28일,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이 빈 손으로 끝나고 말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비핵화와 제재 완화 등의 내용이 담길 것으로 예상됐던 '하노이 합의서'에 끝내 서명을 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초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믹 멀베이니 백악관 비서실장 대행과 '대북 대화파'인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부 장관이 배석한 27일 정상 만찬과 28일 오전 북미 정상 단독 회담까지만 해도 낙관적 전망이 우세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미국이 비핵화 관련 요구를 너무 세게 한 것 같다"며 "북한 입장에서는 배보다 배꼽이 더 커져 버린 것"이라고 말했다.
정 전 장관은 특히 북미 정상회담 둘째 날인 28일 확대 회담에서 '대북 강경파'인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배석하면서 분위기가 반전됐으리라고 분석했다. 정 전 장관은 "볼턴이 대량살상무기(WMD), 핵 리스트,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을 얘기하면서 '영변 플러스 알파'의 문턱을 높였을 것이고 이는 그동안 비건-폼페이오 라인에서 논의했던 것과 전혀 다른 내용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하노이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협상이 결렬된 이유에 대해 "북한은 영변 핵시설을 해체할 준비가 됐었지만, 전면적인 제재 완화를 원했다"고 북한에 책임을 돌렸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은 영변 핵시설보다 더 많은 것을 원했다. 고농축 우라늄 시설, 기타 시설 해체도 필요했다"고 말했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이 제3차 북미 정상회담의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북미 대화의 불씨를 남겨놨다는 점은 여전히 긍정적이다.
대화의 불씨를 살리려면 이제부터는 문재인 대통령의 중재자로서의 역할이 요구된다. 정세현 전 장관은 "문 대통령이 비공개라도 북한에 특사를 보내야 한다"고 조언했다. 미국보다 북한에 먼저 특사를 보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정 전 장관은 "미국은 협상 결렬의 모든 책임을 북쪽에 넘겼지만, 자기들이 그런 원인을 제공했다는 이야기를 일절 안 하는 것이 북핵 협상 이면의 불편한 진실"이라며 "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 말만 듣지 말고 평양에 특사를 보내, 북한의 입장을 들어야 한다"고 부연했다.
정 전 장관은 "먼저 북한의 속내를 듣고 그 결과를 가지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설명해야 한다"며 "미국은 북에 5개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면서 2~3개랑 바꾸려고 하는데, 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기 전에 북측에 '5개와 3개를 바꾸려 하지 말고, 4개와 3개를 바꿀 준비를 하라'고 말해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다음은 정세현 전 장관과 한 인터뷰 전문이다.
"볼턴이 확대 정상회담 들어온 다음부터 분위기 변했다"
프레시안 : 제2차 북미 정상회담 협상이 결렬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말을 종합하면, 북한은 영변 핵시설 폐기와 제재 완화를 맞바꾸기를 원했지만, 미국은 또 다른 핵 시설 제출 등 '영변 플러스 알파'를 요구한 것 같다.
정세현 : 미국이 비핵화 관련 요구를 너무 세게 한 것 같다. '영변 플러스 알파'라고 했는데,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가지 않았나. 볼턴 보좌관이 늘 하던 말로 미루어 보건대, 볼턴은 대량살상무기(WMD) 폐기까지 얘기했을 것이다. '핵 리스트 내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내라'는 식으로 계속 문턱을 높였을 것이다.
북한으로서는 영변 핵시설을 폐기하면 개성공단이나 금강산 관광을 받아내리라고 생각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신년사에서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을 언급한 것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북한 입장에서는 '영변 플러스 알파라고 해도 배보다 배꼽이 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제2차 북미 정상회담에 응했는데, 볼턴이 갑자기 비핵화의 문턱을 높였다면 '지금까지 비건-폼페이오 라인과 했던 것과는 얘기가 다르지 않느냐'라고 당황했을 것이다.
실제로 처음에 김정은 위원장 표정이 굳어 있었는데, 어제 저녁에 대화하면서 서서히 조금씩 표정이 풀리더니 만찬을 할 때는 웃고 밝아지지 않았나.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가 한 얘기를 문서로 만들 수 있다면 다들 돈 내고 보고 싶어할 것"이라면서 훈훈한 분위기가 이어졌던 것은 볼턴이 없을 때였다. 오늘 확대 정상회담에서 볼턴이 들어오면서 분위기가 반전됐을 것이다. 아마 트럼프 대통령이 볼턴 보좌관에게 발언권을 줬을 것이다. 오늘 마이클 코언 변호사의 청문회 참석으로 북미 정상회담 기사가 미국 내에서는 묻혔는데, 그래서 이번 합의에 정치적 부담을 느낀 트럼프 대통령이 '볼턴 카드'로 짜고 친 것 같기도 하다.
프레시안 : 트럼프 대통령 발언 중에 '고농축 우라늄 시설'에 대한 언급이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영변 핵시설 해체에 동의했지만, 미국은 추가적인 비핵화를 원했다. 당시 언급은 안 했지만 고농축 우라늄 시설, 아니면 기타 시설 해체도 필요했다."고 했다.
정세현 : 그렇다. 플루토늄은 원자로와 재처리 시설을 필요로 하기에 영변 핵시설에만 있다. 반면에 우라늄은 고강도 알루미늄 튜브를 전기로 돌릴 공간만 있으면 다른 데서도 만들 수 있다. 그러니 미국이 북측에 영변 외의 신고하지 않은 핵 리스트를 내놓으라고 한 것이다. 볼턴이 그동안 비건-폼페이오 협상 라인에서 소외됐던 데 분풀이하는 것 같다.
프레시안 : 이번 회담 결렬로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답방에도 차질이 빚어졌다고 볼 수 있을까.
정세현 : 서울 답방은 늦어진다고 봐야 한다. 북미 간 제재 완화 문제가 결론 나야만, 금강산 관광 재개, 개성공단 재가동, 철도도로 현대화 사업, 대기업 대북 투자와 같은 것들이 결정된다. 그런데 제재 완화가 하노이에서 가닥을 못 잡았기 때문에,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답방과 4차 남북 정상회담의 필요성이 북한으로서는 없어진 것이다.
"문 대통령, 미국보다 평양에 특사 보내야"
프레시안 :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협상 결렬을 선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제3차 북미 정상회담을 열 여지를 남겼다. 앞으로 문재인 대통령에게는 중재 외교를 통해 북미 대화의 불씨를 다시 지펴야 한다는 숙제가 남는다.
정세현 : 전망이 그렇게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백악관에서 그동안 협상이 건설적이고,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한다고 하지 않았나. 이번에는 비핵화와 상응조치에 대한 아귀가 서로 안 맞았지만, 앞으로 조정해서 다시 모멘텀을 살려낼 것 같다.
여기서 한국 정부의 역할이 절실히 필요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보다는 평양에 먼저 특사를 보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문재인 대통령과 전화통화에서 모든 책임을 북쪽에 넘기는 얘기를 할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자기가 북한에 그런 짓을 하도록 원인을 제공했다는 얘기를 일절 안 하는 것이 북핵 협상 이면의 불편한 진실이다. 따라서 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의 이야기만 듣고 잘 되기를 기다리지 말고, 특사를 비공개라도 보내 북한의 입장을 들어야 한다.
프레시안 : 한미 정상회담의 필요성은 없을까?
정세현 : 문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한테 설명하려면 먼저 북한의 속내를 확인하고 중재해야 한다. 핵심은 미국이다. 미국은 북한에 5개 내놓으라고 하고 자기는 두세 개와 바꾸려고 하니까 안 되는 것이다. 문 대통령이 "두세 개 가지고 바꾸려고 하지 말라"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얘기하기 전에, 먼저 북한한테 "대승적으로 5개하고 3개는 못 바꾸지만 4개와 3개를 바꿀 준비를 하라"고 말해야 한다. 그렇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문 대통령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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