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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정환을 무시하며 강하게 키웠다"

히딩크가 우리에게 선사한 귀한 메시지, '믿음'

거스 히딩크. 이제 그를 더이상 매도하는 언론은 없다.

한때 대표팀 성적이 좋지 않자 일부 언론들은 히딩크 감독의 연인을 지상에 끌어내 그의 '사생활'을 비판하기까지 했다. 당시 히딩크 감독은 전처와 별거후 새 연인과 사귀는 중이었다. 이는 전형적인 황색 저널리즘의 횡포였다.

히딩크 감독은 한국언론이 '오대영(5대0)' 감독이라는 불명예스런 별명을 붙이며 매도할 때도 일언반구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사생활 문제에 대해서만은 처음으로 벌컥 화를 냈다. '한국언론의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되느냐'는 게 그의 분노어린 질책이었다.

불과 몇달전까지만 해도 이런 횡포를 서슴지 않았던 일부 언론들은 19일 아침자 신문에서는 히딩크 감독의 연인을 "히딩크에게는 어머니같이 포근한 존재"라고 묘사하며 그를 추앙하기에 급급하고 있다. 또하나의 부끄러운 한국 언론의 24시이다.

***안정환, 일생일대의 위기**

히딩크 감독은 18일 이탈리아전에서 또하나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당연히 전 언론은 그에 대한 최대한의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말 그대로 '히비어천가'이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의 가정을 해보자. 과연 이탈리아전에서 패했다면 어떠했을까.

물론 예전처럼 히딩크를 무차별 매도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16강 진출만 했어도 히딩크는 우리에게 한 약속을 훌륭히 지킨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틀림없이 18일 경기 내용에 대해 몇 가지 꼬투리는 잡았을 듯싶다. 특히 전반전에 얻은 천금같은 페널티킥을 실축한 안정환 선수를 끝까지 기용한 대목에 대해 문제 삼았을 가능성이 크다.

아마도, 언론들만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18일 경기를 지켜보던 많은 국민들은 안정환의 페널티킥 실축 후의 상황 전개에 우려했다. 쉽게 선취점을 따낼 기회를 잃어버리자 선수들의 몸이 한순간에 무거워진 듯 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안정환 선수의 몸이 무거워 보였다. 남들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자책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후 안정환 선수는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정말 젖 먹던 힘까지 짜내 필사적으로 뛰는 게 역력해 보였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의 플레이는 여기저기서 맥이 끊어지는 듯 보였다. 이를 보고 전국민 모두가 안타까워 했다.

안정환을 욕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한-미전의 '영웅'이다. 그가 한-미전 후반 33분 극적인 동점골을 뽑아내지 못했다면 우리는 심리적으로 초조해져 16강진출이 힘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한 안정환 선수를 비롯한 우리 선수들이 동점골을 빼낸 뒤 한민족의 강한 자존심을 전세계에 드러내 보여준 '역사적인 오노 세리모니'도 못 봤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정환의 너무나도 안쓰러운 모습을 보던 적잖은 국민들은 차라리 안정환 대신 다른 선수를 기용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생각을 했다. 심리적으로 부담을 느끼는 상태에선 제 기량을 십분 발휘하기를 기대하기란 힘든 법이기 때문이었다.

***히딩크는 안정환을 끝까지 믿었다**

모르긴 몰라도, 히딩크 감독 역시 같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히딩크의 '선택'은 달랐다. 그는 안정환을 끝까지 '믿었다'.

그는 미국전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 이을용 선수가 천금같은 페널티킥을 실축했다. 이을용의 고통스러워 하는 표정이 화면에 비쳤다. 그러나 히딩크는 이을용을 믿고 계속 기용했다. 그리고 이을용은 믿음에 보답했다. 이을용은 후반 33분 자로 잰 듯 절묘한 센터링을 안정환에게 올려 극적인 동점골을 뽑아내는 수훈갑이 됐다.

'안정환도 이을용처럼 스스로를 극복해낼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히딩크의 생각은 이런 것이었으리라. 아니, 안정환이 골을 넣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중간에 안정환을 빼면 안정환은 평생을 일종의 죄의식에 사로잡혀 지낼지도 모르는 일이다. 설령 8강 진출에 실패하는 일이 있더라도 한창 크는 선수에게 이런 상처를 줘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히딩크는 했을 듯 싶다.

히딩크의 '믿음'은 결국 일을 해냈다. 경기 종료 2분여를 앞둔 시점에 터진 설기현 선수의 기적같은 동점골에 이어, 연장 후반 11분에는 마침내 안정환이 일을 저질러 8강 신화를 탄생시켰다. 경기내내 그를 옥조였을 게 분명한 '지옥같은 자책감의 벽'을 스스로 부순 것이다. 안정환의 승리였고, 히딩크의 승리였다.

***히딩크, "나는 안정환을 무시하며 강하게 키웠다"**

히딩크는 18일 밤 승리후 기자들과 가진 인터뷰에서 안정환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앞선 포르투갈전에서 이미 사실상 풀타임을 소화했다. 그를 단련시키기 위해 때로 그를 무시해가며 강하게 지도했다. 그는 결국 나의 메시지를 받아들였다."

히딩크의 이 말처럼 그동안 안정환은 히딩크에게서 온갖 '무시'를 당해왔다.
처음에 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해온 히딩크는 안정환에게 최하위의 점수를 주었다. 거친 몸싸움을 좋아하지 않는 데다가 수비 가담능력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한마디로 말해 한국이라는 우물안 개구리, 우물안 '귀공자'에 불과하다는 평가였다.

실제로 그런 면이 없지 않았다. 안정환은 90년대 한국 프로축구계에 최초로 '오빠 부대'를 탄생시킨 스타였다. 당시 그에게는 '테리우스'라는 별명이 따라붙고 있었다. 테리우스란 일본의 소녀만화 '캔디'에 나오는 주인공의 이름이다. 그만큼 그는 '귀족적'이었다.

그러나 히딩크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안정환은 대표팀 주전자리에서 밀려나는듯 보였다. 절대위기였다. 이때부터 안정환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히딩크의 냉담한 시선을 되돌리기 위해선 필사적 변신이 필요했다. 그는 잡초의 끈질긴 생명력을 배워야 했다. 히딩크의 표현대로 그는 '히딩크의 메시지'를 읽고 히딩크의 주문대로 변신해갔다.

***히딩크가 우리에게 선사한 '믿음'의 메시지**

월드컵 개막전까지만 해도 히딩크는 안정환에게 1백점 만점 합격점을 주지 않았다. 스코틀랜드와의 평가전에서 두 골을 넣고서야 간신히 합격선에 들어섰다. 그러나 1백점 만점 합격점은 아니었다. 체력이 약하다는 이유로 그는 후반에만 교체투입되는 선수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던 히딩크가 16강 진출의 최대관건이던 포르투갈전에 그를 선발선수로 기용했다. 히딩크가 그동안 내심으론 그를 전격신뢰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히딩크는 18일 이탈리아전에도 그를 선발로 기용했다. 그리고 전반전 시작 얼마 뒤 얻은 페널티킥도 그에게 차도록 했다. 얼마나 안정환을 신뢰하는가를 보여주는 또다른 증거였다. 그러나 안정환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히딩크는 한번 믿으면 끝까지 믿는 고집스런 스타일이다. 결국 히딩크의 고집스런 믿음이 안정환을 살려냈고, 8강 신화라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믿음에 대해선 모두가 그 중요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믿음이란 위기때에도 흔들림없는 게 진짜 믿음이다. 히딩크는 그동안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선사해왔다. 히딩크는 이번에 우리에게 믿음의 중요성이라는 또하나 값진 선물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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