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은 거센 열망과 저항의 도시로 1919년 3~4월 2개월에 걸쳐 13번의 만세운동과 4.3삼진의거가 대표적으로 손꼽힌다.
올해는 기미년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 되는 해이다.
일제에 맞서 싸웠던 민족의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이 재조명되며 창원지역에서 일어났던 3.1운동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까워 일찍이 침략의 거점이 된 창원시. 일제는 마산에 동양척식주식회사 마산출장소를 설치하고 마산항을 대일 수출입항으로 삼아 경제적 침탈을 본격화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항일독립운동은 4월 3일 진동‧진전‧진북면 3개 지역 주민들이 연합해 대규모로 일어난 ‘4.3삼진연합대의거’다.
조선국권회복단, 대동청년단 단원으로 활동했던 변상태의 계획에 따라 4월 3일 진전면 양촌리 냇가 둑에 세워진 대형 태극기 아래로 인근 주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변상섭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변상태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만세 함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군중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며 진동 쪽으로 나아갔다. 도중에 합류한 사람들로 인해 시위대의 규모는 무려 5000~8000명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사동교에 이르러 시위 소식을 접한 일제 헌병과 마주쳤고, 격분한 군중은 대항했으나 결국 김수동과 변갑섭을 비롯, 변상복, 김영환, 고양주, 이기봉, 김호현, 홍두익 등 8명이 현장에서 순국했다.
수도권과 거리가 멀고 인구가 많지 않은 농촌지역이었음을 감안했을 때 그 규모가 매우 컸고, 주동자들이 ‘십인장’, ‘이십인장’이라고 쓴 수건을 머리에 둘렀던 것으로 보아 매우 조직적이었다.
창원시는 한국홍보전문가 서경덕 교수와 함께 ‘4.3삼진연합대의거’의 정신과 석당 변상태 선생의 이야기를 담아 영상물을 제작했다. 배우 안성기가 내레이터로 참여했다.
창원지역의 만세운동은 그 과정에서 100명이 넘는 애국지사와 시민‧학생들이 목숨을 잃거나 체포‧구금됐지만,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일제에 대한 저항은 사라지지 않았다.
민족의식과 정치의식이 높아진 민중들은 이후 다양한 사회운동과 조직을 성장시켰는데, 특히 1960년 3월 15일 자유‧민주‧정의를 외쳤던 3.15 의거의 정신적 토대가 되기도 했다.
시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100년간 이어져온 불굴의 독립정신을 이어받고, 자랑스러운 민주성지의 자긍심을 알리기 위해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오는 3월 1일 애국지사 추모제와 추념식을 비롯해 관내 곳곳에서 범시민 동시 만세운동 및 거리행진을 펼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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