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전 후반 33분.
4천7백만 국민이 '타는 목마름'으로 극심한 갈증과 불안감을 느끼던 시점이었다. 이을용 선수가 프리킥을 하자 후반 교체투입된 안정환 선수가 공중으로 몸을 띄웠다. 그리고 순식간에 공 네트가 출렁였다. 마침내 동점골이 터진 것이었다. 한반도 전역이 들썩였다.
***안정환의 백만불짜리 '김동성 세리모니'**
더 멋진 것은 그후 안 선수가 보여준 골 세리모니였다. 앞서 스코틀랜드와의 평가전에서 후반 두 골을 넣은 뒤 '반지 세리모니'로 뭇여성들을 사로잡았던 안 선수가 이날 선보인 세리모니는 누구도 생각치 못한 '쇼트 트랙 세리모니'였다.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에서 미국 오노 선수의 헐리우드 액션으로 억울하게 금메달을 빼앗긴 김동성 선수와 우리 국민의 '한'을 대신 표현한, 쇼트 트랙을 타는 듯한 동작의 세리모니.
타는 목마름에 시원한 우물물을 들이킨 듯한 국민들은 예기치 못한 안정환 선수의 '김동성 세리모니'까지 선물 받자 '유쾌, 상쾌, 통쾌' 3쾌를 만끽하며 박장대소했다. 다른 선수들도 안정환 선수의 뒤에서 같은 동작을 취하며 김동성 세리모니를 함께 했다.
이번 한-미전에 '스포츠 이상의 함의'가 내포돼 있음을 드러낸 기념비적 세리모니였다.
우리 젊은 선수들이 얼마나 똑똑하며 시대정신을 정확히 읽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흐뭇한 증거였다.
***네티즌들이 제안하고, 선수단이 받아들인 세리모니**
안정환 선수가 이날 선보인 세리모니는 엄격하게 말하면 '선수들과 네티즌들의 합작품'이었다.
이메일 카드업체인 '레떼'는 한-미전에 앞서 하나의 '제안'을 했다.
"미국전 세리모니는 모든 선수들이 일렬로 서서 두 팔을 흔드는 쇼트트랙 자세로 하자!"
동영상까지 곁들인 이 제안은 순식간에 퍼져나가면서 네티즌들 사이에 폭넓은 지지를 얻었고, 마침내 안정환 등 젊은 대표선수들까지 이를 읽고 이에 따라 전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명 세리모니'를 펼친 것이다.
실제로 한-미전을 영국 전역에 실황중계한 영국 유일의 민영 ITV캐스터와 해설자들은 안정환 등 대표선수들이 골 세리머니에서 쇼트트랙스케이팅 장면을 연출한 데 주목했다.
ITV는 후반 1-1 동점골이 터진 뒤 안정환 등이 코너플랙쪽으로 달려가 아이스링크를 지치는 듯한 제스처를 선보이자 한국 선수들이 지난 2월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당시 부당판정에 대한 항의시위를 하고 있다고 정확히 분석했다.
이번 세리모니로 인해 국민들은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이후 가슴 깊숙이 응어리졌던 '한'의 상당부분을 풀 수 있었다. 역시 젊은 신세대 네티즌과 선수들은 믿음직스러웠다.
***치안당국의 우려를 불식시킨 '높은 시민의식'**
이날 전국은 정말 오래간만에 일심동체가 됐다. 서울 시청을 비롯한 전국 방방곡곡에서 4천7백만이 `코리아' 를 외치며 하나가 됐다.
이날 전국의 길거리는 인산인해였다.
경찰은 이날 경기가 시작되기 30분전인 오후 3시 광화문빌딩앞 12만명, 시청앞 광장 13만명, 영등포 LG무대 4만5천여명, 마포 평화의 공원 3만5천여명 등 서울 10곳에서 38만6천여명을 포함해 전국 70여곳에서 80만여명의 인파가 운집했다고 추산했다.
그러나 실제 신고되지 않은 대학가와 동네 어귀 등을 감안할 경우 `길거리 응원'에 나선 인파는 전국적으로 1백만명이 넘을 것으로 보이며, 서울의 경우에도 50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지난 87년 `6.10 민주항쟁'이후 최대의 인파 운집이었다. '제2의 6.10 에너지' 폭발이었다.
이날 전국 곳곳에서 열광적인 응원전이 전개됐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치안당국이 우려했던 `반미사태'는 없었다. 경찰은 광화문과 시청 앞 등 전국의 `응원의 거리' 70여곳에 84개 중대 1만여명의 경찰력을 배치했으며 세종로 미 대사관과 정동 미 대사관저 인근에 `폴리스 라인'과 블록을 지정해 삼엄한 경비를 펼쳤다.
우리 국민의 수준이 치안당국의 우려보다 높은 수준에 있음을 보여주는 또하나의 승리였다.
비록 미국전을 승리로 이끌지 못해 아쉬움은 남으나, 여러가지 의미에서 국민을 실망시키지 않은 멋진 승부였고 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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