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인 87년 6월10일, 광화문과 시청 일대는 매캐한 최루탄 연기속에서도 '넥타이 부대'들로 가득찼었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호헌조치'를 무너뜨리기 위한 민의의 폭발이었다.
정확히 15년 후인 2002년 6월10일 오늘, 광화문과 시청 일대에는 아침 일찍부터 붉은 T셔츠 차림의 젊은이들이 몰려들고 있다. 오후 3시부터 달구벌에서 열리는 한국-미국전을 응원하기 위한 자생적 붉은 악마들의 집결이자, 또다른 국민적 에너지의 폭발이다.
***광화문 일대에는 붉은색의 물결**
광화문, 시청 일대는 아침 일찍부터 붉은색의 물결로 넘실대고 있다.
한국팀의 선전을 응원하는 붉은 악마들과 광고 스폰서들이 내건 붉은 색 플래카드가 길거리를 도배하고 있다. 아침 일찌감치 좋은 터를 잡고 삼삼오오 모여있는 열성 붉은 악마들도 목격된다. 출근을 하는 직장인들 가운데에도 아예 붉은색 셔츠로 중무장(?)한 열성팬들이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다. 서소문에 직장이 있는 한 여성 직장인은 "윗옷이든 바지든 간에 빨간 색으로 입고 오기로 동료들과 약속했다"고 말했다.
또한 지난 4일 폴란드전 길거리응원 때에는 주력부대가 직장인들이었다는 점과 달리 이번에는 학생들이 대거 몰려들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한 고등학생은 "오전 수업이 끝나자마자 친구들과 함께 광화문으로 몰려가 응원을 하기로 했다"며 "우리 반 친구 모두가 붉은 악마 T셔츠를 입고 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 학생은 "길거리 응원을 하는 곳이 여러 곳 있긴 하나, 가능하면 '길거리 응원의 성지'가 된 광화문에 가서 응원을 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축제의 시작'이다.
15년전의 오늘 넥타이를 맨 시민들이 자칫하면 닭장차에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비장함 속에서 길거리로 나섰다면, 15년후의 오늘은 모두가 축제를 즐기는 가벼운 마음으로 길거리로 나서고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15년전 오늘이 비장한 '민주축제'였다면, 15년후 오늘은 상쾌한 '국민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긴장한 치안당국**
축제열기가 뜨거워질수록 긴장도가 높아지는 한 집단이 있다. 치안당국이 바로 그곳이다.
경찰은 이날 전국 70여곳에서 73만2천여명이 '길거리 응원'에 나설 것으로 전망했다. 특히 서울 광화문 일대 20여만명, 서울시청앞 광장 10만여명 등 도심에만 최소한 30여만명의 인파가 모일 것으로 내다봤다. 지난번 4일 폴란드전때에 모인 10만명보다 최소한 3배이상 모여들 것이라는 전망이다.
경찰은 그러나 한-미전에서 우리나라 팀이 승리할 경우 이 일대 직장의 퇴근시간과 맞물리면서 인파가 예상치보다 몇배나 늘어나 1백만명을 넘어서면서 사상 초유의 거대한 거리축제가 벌어질 것으로 전망, 아예 이 일대의 교통통제 시간을 시합이 끝난 4시간 뒤인 밤 9시까지로 늦춰잡았다.
치안당국의 최우선 방어 목표는 광화문의 미 대사관이다.
이날 경찰은 광화문 네거리의 교보문고 정문 앞에서부터 시작해 미 대사관이 위치한 광화문 동쪽 블럭을 아예 '응원단 집결 불가' 지역으로 선포했다. 건너편 세종문화회관 쪽은 응원단 집결을 허용하되, 반대편 미 대사관 쪽은 원천봉쇄한 것이다. 미 대사관이 이날 오전근무만 하기로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긴장의 도를 더하고 있는 것이다.
경찰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미 대사관 주위에만 1천6백여명의 경찰병력을 몇 겹으로 집중배치해 '인의 철벽'을 구축하는 등 광화문과 시청 일대에 모두 7천여명의 경찰 병력을 배치키로 했다. 15년전 6.10 민주화항쟁때 버금가는 경찰력의 총동원이다.
***열린 마음으로 '축제' 즐기자**
이날 동원되는 경찰 모두도 내심으론 길거리나 직장에서 편안하게 우리팀의 선전을 지켜보길 갈망할 게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이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15년 전 오늘이나 15년이 지난 지금이나 유독 경찰만은 자의와 다르게 '국민의 건너편'에 서있는 것이다. 15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우리 사회가 같은 국민인 경찰들까지 축제에 동참할 수 있도록 모순구조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쓸쓸한 풍경이다.
혹자는 반문한다. 어제(9일) 러-일전 결과를 보지 못했느냐고. 러시아가 일본에 지자 모스크바에서는 술취한 러시아 젊은이들이 차를 방화하고 지나가던 동양인들에게 집단린치를 가하는 인종주의적 폭력사태가 발발하지 않았느냐고. 린치를 당한 동양인들 가운데에는 일본인외에 애꿎은 우리나라 사람도 있었다고. 따라서 경찰의 미 대사관 보호는 과잉보호가 아니라, 당연한 사고예방조치라고. 사람이 모이면 누구도 예기치 못한 '군중심리형 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 법이라고.
그러나 15년전에도 그러했듯 15년후인 지금도 우리 국민은 혹자들의 우려를 낳을만큼 비이성적이지 않다.
15년전 오늘, 시민들은 최루탄 발사기를 든 전경들에게 꽃을 꽂아주었고 전경들은 진지한 '젊은 마음'으로 이 꽃을 받아들였다. 15년후 오늘, 우리 젊은이와 국민들은 그때보다도 더욱 '열린 마음'으로 거리로 나서고 있다. 미국이 하는 행위에 대한 분노가 역대 어느 때보다 확산돼 있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나, 스포츠와 정치의 경계선조차 구분 못할 정도로 낙후한 국민이 아니다.
6.10 축제가 이제 시작됐다.
축제는 축제다. 15년만에 터져나오는 국민의 대 에너지를 반기며 즐기자. 15년전 오늘 온 국민이 '이제는 뭔가 될 것 같다'는 뿌듯한 자부심을 느꼈듯, 이제 오늘도 국민 모두가 '이제는 뭔가 될 것 같다'는 신명을 느끼게 하자.
15년만에 터져나온 국민의 에너지를 상승곡선으로 끌어올리느냐, 못하느냐는 이제 우리 사회 리더들의 몫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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