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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딩크도 선수시절엔 '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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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딩크도 선수시절엔 '무명'이었다

한국팀 설움 공감하며 함께 기적 일궈

요즘 거스 히딩크 감독의 열렬한 팬이 된 한 주부는 히딩크가 싱긋 웃는 모습을 "심술궂은 어린애의 미소 같다"고 표현했다. 악동같은 미소가 친근하게 느껴진다는 의미다.

히딩크는 이처럼 우리 국민에게 더없이 친근한 존재가 됐다. 그러나 대표팀 선수들 전언에 따르면, 선수들은 오래 전부터 히딩크로부터 '친구의 정'을 느껴왔다 한다.

외국인을 감독이나 기업 CEO로 영입했을 때 종종 발생하는 일이 '문화충돌'이고 '열등 컴플렉스'이다. 히딩크를 처음에 영입하려 할 때에도 이런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잖았다. 히딩크는 그러나 별 잡음없이 이 문제를 극복했다. 도리어 선수들 사이에서는 "비록 의사소통이 잘 안되는 외국인이기는 하나 역대감독들 가운데 가장 우리 마음을 잘 알고 있는 감독"이라는 평가까지 나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무명선수 시절의 설움 경험한 세계명장**

히딩크 감독은 평소 선수들에게 "경기를 지배해서(dominate) 끝장내는(kill) 플레이"를 주문해왔다. 그러기 위해선 선수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세계 강팀들'과 실전경험이라고 판단했다. 실력이 엇비슷한 외국팀들과 경기를 벌여 연습경기 실적을 높여봤자 말짱 도루묵이라는 판단에서다. 때문에 그는 지난해 프랑스 등 축구강국등에게 5대0의 참패를 당해 국내여론이 들끓었을 때에도 요지부동이었다.

히딩크 감독은 폴란드전 직전에 행한 영국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선수들은 강팀을 만나면 패배의식에 사로잡히는 경향이 있다. 내가 깨지더라고 강팀과 맞붙어보는 어려운 길을 택한 것이 바로 이때문"이라고 말했다. '약자의 패배의식'. 이것이야말로 히딩크가 한국선수들에게서 제거해야 할 최우선 과제로 여긴 것이다.

이같은 판단은 히딩크 자신의 인생역정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1946년생인 히딩크 감독은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에게 5대0의 뼈아픈 패배를 안긴 "명장"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도 선수시절에는 별 볼 일 없던 '무명선수'에 불과했다.

히딩크는 지난 1967년 네덜란드의 1부 리그 그라프샤프에서 프로선수 생활을 시작, PSV에인트호벤을 거쳐 2년(1976~1977년)간 미국 워싱턴 디플로메츠, 새너제이 어스퀘이크등에서 뛰었지만 스포트라이트를 받진 못했다. 1977년 네덜란드로 돌아온 그는 NEC니메가를 거쳐 82년 그라프샤프에서의 활동을 끝으로 15년간의 무명 선수생활을 접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라프샤프에서 4년간 코치생활을 하면서 명감독의 자질을 보였다. 에인트호벤의 감독(1986~1990)을 맡아 1986년 네덜란드 1부 리그 우승컵을 안으며 전성기를 누렸다.

감독 시절에도 시련은 있었다. 1990년 터키 페네르바제를 거쳐 1991년 스페인 발렌시아 감독에 취임했지만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하면서 슬럼프에 빠졌다. 그러나 1995년 네덜란드 대표팀 사령탑을 맡게 되면서 그는 부활했다. 1996년 유럽선수권에서 네덜란드를 8강으로 이끈 히딩크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팀을 4강에 진출시키며 세계 명감독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 스페인 레알 마드리드(1998~2000)감독으로 도요타컵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으나 레알 베티스에서는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던 중 한국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기에 이르렀다.

히딩크는 지난해 1월 한국대표팀 감독으로 전격 취임했다. 그가 취임에 앞서 반드시 지켜줄 것을 요구한 것은 2002년 6월까지의 임기보장이었다.

2000년 12월 당시 히딩크 영입을 추진했던 이는 대한축구협회의 가삼현 국제부장(현재 월드컵경기운영본부장)이었다. 그는 5일 본지와의 전화통화에서 영입 과정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히딩크를 영입하기 위해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선수 선발과 훈련 등에 관해 일체의 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골드컵에서 성적이 좋지 않다는 비난이 나오자 그는 '한국팀의 목표가 골드컵이면 골드컵에 맞춰주고 월드컵이면 월드컵에 맞춰주겠다'며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만일 국내 감독이었다면 여론의 등쌀에 못이겨 자기 소신을 바꾸거나 중도 하차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축구협회관계자 등 히딩크 감독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은 그가 확실히 뭔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해 5월 컨페더레이션스컵 당시 프랑스전과 8월 체코전에서 잇따라 0-5로 참패를 당하자 언론들은 "5대0 감독"이라는 오명을 붙이며 히딩크를 맹성토,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다. 가 본부장은 "히딩크 감독을 주변에서 흔들 때 '그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떠나도 어차피 계약된 연봉은 다 주어야 한다'면서 그의 소신을 지켜주려고 애썼다"고 회고했다.

***"나는 영웅에는 관심없다. 영원히 한국감독으로 기억되길 원할뿐이다"**

체계적인 체력 훈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본 그는 유명세와 관계없이 자신이 정한 체력 테스트에 떨어진 선수들은 대표팀에서 제외했다. 홍명보도 그중 하나였다. 이 때문에 히딩크 감독은 전횡을 휘두른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했다.

히딩크는 포메이션에 얽매이기보다 선수 개개인의 능력과 장점을 살릴 수 있는 멀티포지션 시스템으로 탄력적인 축구를 만들었다. 또한 몇몇 스타플레이어에게 의존하기보다 탄탄한 팀워크를 통해 효율적으로 상대를 공략하는 전술을 개발했다.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스피드와 공격-미들필드-수비의 간격을 최대한 줄인 "오밀조밀한 축구(컴팩트 사커)"도 강조했다.

히딩크는 폴란드전을 앞두고 "폴란드를 이기면 당신은 한국의 영웅이 될 것"이라는 말에도 "나는 영웅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내 일을 할 뿐이고 내 일을 좋아할 뿐이다"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결과에만 의미를 둔 '킬러 본능'의 소유자다운 대답이었다.

폴란드전 승리후 팬들은 이제 히딩크 감독이 하는 모든 말을 신뢰하게 되었다. 히딩크는 그러나 자신이 영웅처럼 받들여지기를 원치 않는다. 그는 네덜란드 신문 텔레그라프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한국감독으로 영원히 기억되기를 원하며, 설령 내가 그만두더라도 나는 한국감독"이라고 말했다. 히딩크의 한국사랑이야말로 그가 오늘의 기적을 일궈낸 원동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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