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세종충청취재본부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독립운동가의 발자취와 당시 온 국민이 나섰던 만세운동의 함성을 재조명하는 특집을 마련했다. 이번 특집기사를 통해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선열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되새기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편집자
1925년 12월22일 충남 천안시 출신의 세 남자가 서울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던 중 일제경찰에게 체포됐다.
체포 된 사람은 유봉로 등 세 사람으로 1921년 서울에서 혁신단을 발기해 통의부원 상무위원 등을 역임했던 김상철이 1924년 중국에서 군자금 조달의 사명을 띠고 입국해 천안서 서울로 상경한 유봉로 등과 함께 군자금 조달에 나선 것이다.
당시 법원은 이들이 일제에 부역해 많은 재산을 일군 사람에게 군자금 요청 서신을 보냈다는 이유로 '군자금청구협박사건'이라 판단해 징역 1년 형을 선고한다.
1925년 12월24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종로서에서 검거되어 취조를 받은 군자금협박사건의 유봉로 등 세사람은 취조를 마치고 23일 오전에 경성지방법원검사국으로 압송된다.
경찰 조사에서 이들은 이웃의 부자에게 삼만원의 제공하라고 요구하고 이를 가지고 상해 임시정부로 갈 것을 계획, 임시정부군영내지파견원이라는 이름으로 돈을 요구하다 경찰에 체포된 것으로 기록된다.
또 이 자금으로 폭탄과 무기까지 사들이기로 하는 큰 계획을 세웠다는 내용도 남아있다.
옥고를 치른 후 세 사람은 뿔뿔히 흩어져 활동하게 된다. 감옥생활 이후 천안 고향으로 내려온 유봉로는 일제경찰의 눈을 피해 가산을 처분, 1928년 강원도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천안 유선생' 이라 불리우며 계몽운동을 위한 아동학교를 설립한다. 이곳에서 만주와 함경북도 회령 등에 머무는 독립운동가들을 도우며 남북의 독립운동 교두보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봉로 후손들의 증언에 따르면 "밤마다 여러명의 사람이 찾아와 집에서 밥을 먹고 가기도 하고 싸가기도 하는 날이 많아 큰 할머니(유봉로의 아내)가 매일밤 솥단지 가득 밥을 하셨는데 형편이 넉넉치 못해 가족들은 굶어도 그 사람들의 끼니는 꼭 챙겼다고 한다. '곳간에 쌀은 우리 먹을 것이 아니라 그들(독립운동가) 몫이니 건들이지 말라'고 하셨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후 유봉로의 정체를 알게 된 일제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유봉로는 '안일준'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종적을 감췄다.
1945년 해방이후 시대적 상황으로 유봉로는 바로 고향을 찾지 못했다. 1947년이 되서야 고향을 찾은 유봉로는 '큰 일을 해야한다'는 말을 남기고 소유한 토지 등을 판 돈 이천원을 가지고 또 다시 사라졌다. 그의 이후의 행보는 1949년 신문에서 다시 찾을 수 있다. 1949년 12월 28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국방 강화를 위한 항공기헌납모금 운동이 벌어졌을 당시 '유봉로씨도 일금 이천원을 추가하여 헌금하였는데 수백만 수천만대의 유산계급에서는 꿈도 꾸지 않는 당시 실정에 비추어 이같이 강냉이밥 수수죽으로 끼니를 때우는 심산곡의 제탄부들이 모범적인 애국열은 전등포의 표본이 될 것이라고 면민의 칭찬이 자자하다' 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군자금 모집으로 투옥됐던 김상철은 1968년 대통령표창에 추서됐다. 하지만 함께 군자금모집으로 옥고를 치른 유봉로는 서훈을 받지 못했다.
유봉로의 후손인 유재준씨는 유봉로가 '안일준'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면서 호적이 두개로 나뉘어 안일준이라는 사람으로 사망신고가 된 상황이라 두 사람이 동일인물이라는 사실 확인이 필요하다는 것이 보훈처의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유봉로 라는 이름의 원래 호적에는 사망신고가 돼 있지 않다.
하지만 김상철과 함께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 옥고를 치른 증거가 남아있고, 또 독립운동을 위한 학교설립을 한 기록 등이 확인된다면 독립유공자로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임명순 천안향토사학자는 "그가 군자금을 모으는 과정에서 체포 돼 투옥한 증거와 이후 학교를 설립해 독립운동을 도운 기록들로 다시 한번 평가 해 독립유공자로 재조명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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