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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스님들은 도사이자 이기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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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스님들은 도사이자 이기주의자"

<참여불교 기고 전문> 박노자 교수의 쓴소리

"외국스님들은 한국에서 몇년씩 공부한다 해도 사찰 근처의 결식아동이나 최빈민층, 무의탁 노인등에 대해 말 한마디 들어본 적이 없다."

"스님의 이미지는 신비한 깨달음을 추구하면서 도력을 통해 복을 내려주는 매개자인 일종의 '도사'에 가깝다."

"한국스님들은 화두나 참구 등을 통해 신비한 깨달음이 얻어진다면 사음(邪淫)이나 음주와 같은 '작은 죄악'을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다고 봤다."

"만해이후 80년이 흘렀지만 재력.권력 있는 곳만 찾고 대중에 대해선 극히 냉소적인 불교 '특권층'의 추태도 달라지지 않았다."

한국불교의 맹성을 촉구하는 한 귀화외국인이 쓴 글이 불교계 안팎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귀화 러시아인이자 독실한 불교도인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교수는 21일 발간된 격월간 '참여불교'(5~6월호)에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기고한 '하화중생 (下化衆生)이 없는 한국 선(禪)'이라는 글에서 한국불교의 이기주의와 속물적 기복주의(祈福主義)를 신랄히 비판했다. 한국불교, 더 나아가 한국종교가 지금 어떤 낯부끄러운 처지에 있으며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케 하는 글이다.

박노자 교수는 모스크바국립대에서 한국고대사로 박사학위를 받고 경희대 러시아어과 전임강사 역임했다. 95년 한국 여성과 결혼했으며,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학 한국학 교수로 있으며 한국불교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깊다. 박교수는 현재 일간지와 시사주간지에도 많은 글을 쓰고 있기도 하다.

참여불교의 양해를 얻어 박교수가 쓴 글의 전문을 게재한다. 편집자

***'하화중생 (下化衆生)이 없는 한국 선(禪)'**

수행(修行)... 불교에 입교한 이래, 이 단어는 필자에게 주된 화두였다. 어떻게, 어떤 과정을 통해야 마음의 안정을 얻어 우리를 불난 집과 같은 상태에서 머무르게 하는 탐진치(貪瞋癡) 삼독을 퇴치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은, 늘 정답이 없는 질문이었다.

입교 초기, 학생 시절에 늘 즐겨 다녔던 것은 각종의 참선 수련회이었다. 애써 잡념을 제거해 무념(無念) 상태에 들어가기를 도모했지만, 참선 시간이 끝난 즉시 어렵게 몰아낸 잡념의 마군(魔軍)이 '제자리'에 돌아오곤 했다. 참선 그 자체에 대한 보람을 느꼈지만, 그것 -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소련 불자들이 그 때 주로 했던 '가벼운' 단기간 참선 - 만으로는 불리(佛理)에 도달하기가 힘들 것이라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입교 초기에 다른 사람을 자기처럼 느껴 무엇인가를 나누는 것도 수행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이상하게도 별로 해보지 못했다. 본인의 업장(業障)이 두터워서 그런 것인지 불교와 요가를 거의 동일시해 '자기의 영적인 발전'과 '건강'의 도구쯤으로 생각했던 그 당시(1980년대 후반)의 소련 불교의 전체적인 경향에 문제가 있었는지 지금으로서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사실, 불교의 실천에서 '남에 대한 보살핌'을 상대적으로 덜 중요시하는 것이, 안타깝게도 많은 서구.미국 불자들의 경향이기도 한다.

1997년에 한국에 와서 생활하게 됐을 때는, 한국 불자와 한국에서 공부.정진 중이었던 외국 스님들과 많은 수행담(修行談)을 나누게 됐다. 제가 알았던 대다수의 한국인 속인 불자들은,'수행'을 불공 (佛供) 드리는 것과 참선, 성지 순례 등으로 생각했다.

예컨대, 지금도 생생한 기억이 남는 것은, 비교적으로 가깝게 지냈던 한 대학 강사이었다. 필자를 만났을 때 이미 거의 8년 가까이 힘든 '강단 노동'으로 가정의 생계를 꾸려 나가왔던 그는, 사찰에 가서 며칠을 참선과 침묵으로 보내는 것을 최고의 낙(樂)으로 삼았다. 그 낙이 없었다면 대학의 '파리목숨'인 자신을 '막 부리는' 전임 교수들의 횡포나 돈이 많은 후배들이 별다른 업적도 없이 전격적으로 교수가 되는 현실, 대학이 이윤 지향적 족벌 집단으로 운영되는 실태를 참아 감당해내지 못했으리라고 본인이 자주 이야기해주곤 했다. 이 '진흙탕'속에서 화병이 나서 죽지 않고 그나마 몸과 정신이 비교적으로 멀쩡한 것을, 그 강사가 '불은'(佛恩)과 '수행 덕분'으로 생각했다. 매우 열악한 조건 속에서 그가 마음을 씻어주는 고찰 (古刹) 덕으로 그 남아 살아 갈 수 있었던 것을, 필자도 다행으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참선이라는 '마음의 청소'가 가능하게 만드는 '역경에 대한 인내'를 '불교' 내지 '수행'으로 생각했던 그 분의 불교관(佛敎觀)에 선뜻 찬성하기가 힘들었다.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생각할 때, 마치 현실 도피를 방불케 하는 신앙 행위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은, 필자의 질문이었다.

예컨대, 그 강사와 달리 고찰에서 평상심(平常心)을 회복할 줄 모르는 그 강사의 후배들이 늘 양서 (洋書)의 번역 등 많은 '개인적 서비스'를 요구하는 교수들의 등쌀에 못 이겨 마음이 상처투성이 되어 정신 건강을 잃을 경우를 생각해서라도, 썩을 대로 썩어버린 이 구조에 어떻게든 맞서는 일이 조금 더 불교적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그 때 필자의 머리 속에서 머물게 됐다.

물론, 이 사회의 부패한 '보스'들에게 맞서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위험한가를, 필자가 그 때 이미 충분히 감지했다. 아부나 상납을 할 줄을 몰라 교수의 반열에 올라갈 희망이 없어도, 자신의 '작은 안정'을 늘 걱정해야 하는 그가 왜 현실적으로 그러한 일에 나설 용기를 찾지 못하는지를 물론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투쟁'이라는 남을 위한 대(對)사회적인 행동을 불교와 전혀 무관한 것으로 인식했던 - 즉, 불교를 '사회적 부정을 망각.도피하는 방법'으로 생각했던 - 그 분의 불교관에 대한 의문이 늘 사라지지 않았다.

한국에 오기 전에 그 강사와 비슷한 방식으로 불교를 '개인적 정화 (淨化)의 기술'로 인식했던 필자가 '남을 위한 투쟁이 과연 불교적 행위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차츰 갖게 되는 배경에, 한국 대학 사회에서 목격한 착취와 부조리의 구조에 대한 너무나 심한 경악이 있었던 것 같다. 이 지옥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것이야말로 바로 보살행 (菩薩行)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본인도 모르게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와 가까이 지냈던 재한 (在韓)외국인 스님들의 수행담은, '중생을 위해준다'는 정신이 한국 불교 속에서 과연 남아 있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두 번 다시 고심해보게 만들었다. 그들 중의 일부는, 한국의 저명한 한 선승의 지도하에서 '오로지 참선'에 몰두해, '중생 교화'는커녕 기본적인 불경(<금강경>, <법화경> 등) 읽기조차 할 여유를 별로 가지지 못했다. 그 일군의 외국 스님들은 한국에서 몇 년씩 공부한다 해도, 사찰 근처의 결식 아동이나 최빈층 주민, 무의탁 노인에 대해서 말 한 마디 들어볼 일이 없었다. 참선하다 시간이 나면 인근 산 속으로 만행 (萬行)을 떠나는 그들의 생활이 일면 부럽기도 했지만, 외롭고 배고픈 사람들과 가까이 살면서도 그들의 고통을 전혀 모른다는 것이 과연 불교인가 라는 생각이 필자를 매우 괴롭혔다.

러시아에 있었을 때의 필자와 마찬가지로 불교를 '개인의 영적 발전' 정도만으로 생각하고 아 (我)와 만물 (萬物)의 연관성이라는 불교의 근본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외국인 승려들의 문제도 없지 않았겠지만, '오로지 참선'으로 지도한 한국 스승들의 책임도 생각해볼 때가 있었다.

또한 일군의 외국 승려들은 다른 사찰에서 울력과 예불, 그리고 독경과 참선을 주종으로 하는 정진 수행을 하고 있었다. 가끔씩 하루에 몇 천 배씩 해야 하는 그들의 인내력에 놀라기도 했지만, 이와 같은 '체육적인 수행'이 꼭 그렇게까지 긴요한가, 몇 천 배에 들어가는 에너지를 차라리 이웃을 위해서 쓰는 것이 더 불교적이지 않을까 라는 의문을 갖기도 했다.

전자의 '오로지 참선' 식의 수행자와 달리, 후자 일군의 외국인 스님들이 독경을 하기 위해서 한문과 한글을 훨씬 더 잘 배웠다는 것은 하나의 장점으로 느껴졌지만, 이웃의 한국인들의 문제와 고통들에 대해서 모르고 산다는 점에서는 별 차이 없었다. 말하자면, 철저한 '종교와 생활, 수행자와 대중의 분리'가 이루어진 셈이었다. 처음에는 이를 수요자인 외국인의 불교관과 연결시켜 문제삼기도 했지만, 한국 사찰의 생활을 많이 볼수록 외국인 승려의 교육에 한국 선(禪)의 일부 특징들이 크게 작용됐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외국 스님과 인연을 맺은 뒤에, 차차 한국 사찰을 훨씬 더 자주 찾아가게 됐다. 거기에서 많은 한국 스님으로부터 받은 느낌은, 역시 이속(離俗)의 의지가 매우 강하다는 것이었다. 세속을 떠나서 화두 참구.집중적인 참선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으려는 그들의 의지는 소중하고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무엇인가가 꼭 모자라는 듯한 감(感)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첫째는, 참선 실천만큼 계율에 대한 의지가 철저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정상적인 불교의 계율관(戒律觀)으로 분명한 파계로밖에 안 보이는 음주.축처 (畜妻)에 대한 태도는, 중세적 가톨릭 교회의 죄악관(罪惡觀)을 방불케 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중세의 가톨릭 교회는 원죄의 짐을 지고 있는 일체 인간이 불가피하게 죄악을 저지른다고 보고, 죄악을 저지른다 해도 교회에 대한 헌금과 충성, 그리고 각종의 신앙적 행위 (성지 순례 등)로 그 죄악을 충분히 속죄할 수 있다고 봤다. 도덕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청교도는, 바로 이러한 죄악관 대한 불만을 갖고 카톨릭과의 분리를 이루지 않았는가?

마찬가지로, 필자가 만난 많은 스님들은, 화두 참구 등을 통해서 얻은 신비한 '깨달음'이 얻어진다면 사음(邪淫)이나 음주와 같은 '작은 죄악'을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다고 봤다. 공개적으로 이와 같은 계율관을 잘 피력하지 않지만, 구족계를 받은 수도자들의 사회가 기본 오계도 잘 지키지 않은 구성원들을 쉽게 용서해준다는 분위기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한 분위기에서야 전두환과 같은 대량 살인자가 불교 사회 일각의 '존경받는 속인 어르신'으로 될 수 있지 않았는가? 계율을 신성하게 여기지 않는 상좌들이, 대중들에게 지계(持戒)을 엄중히 요구할 리는 만무하다.

둘째, 불경(佛經) 강좌를 설치하는 등 대중 교화에 노력하는 일부의 도심 사찰에서 예외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에는 스님과 속인들 사이의 유일한 연결고리는 기복적인 의례와 이에 따르는 불전(佛錢)의 헌납이었던 것 같았다. 노골적인 이기심에 가득 찬 '내 자식을 꼭 합격하게 해달라'는 식의 '입시 기도회'의 추태가 조선시대에 없었겠지만, 기복 의례 위주의 승.속 관계의 유형 자체가 그때에 비해서 별로 바뀌지 않는 듯한 느낌이 강했다.

물론, 처음에 몇 안 되는 수도자들의 가르침이었던 불교가 대중적인 종교가 된 이래로 언제나 어디에서나 기복적인 요소가 불교의 일부분이었다. 문제는, 보다 고차원적이며 깊은 종교적 관심의 발단이 돼야 하는 기복이, 기복 그 자체로만 끝까지 남아 있다는 것이 다반사라는 사실이다. 즉, 예컨대 친지의 질환으로 사찰을 찾아가 기도를 시작한 사람이, 사찰과 인연을 맺은 이후에 늘 가족, 친지를 위한 기도만 '사찰에서 해야 할 일'로 삼는다는 것이다.

물론, 남한이라는 '위험 사회'에서 온갖 고초에 시간과 마음이 빼앗겨 불교 공부를 할 여유를 찾지 못하는 많은 일반 불자들의 '불가피한 상황'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수도자들이 대중의 불교관 심화, 고차원화를 위해서 과연 충분한 노력을 하는가? 필자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는 경우가 꽤 많다.

불교 공부나 참선을 마치 '무발 (無髮:출가인)만의 고유 영역'으로 생각하고 '유발(有髮:세속인)'들을 '단월(檀越)' 정도로만 보는 중세적인 태도는, 아직까지 상당히 강한 것 같다. 결과적으로는, 조선시대와 별다른 차이 없이 일반인의 눈에 비추어지는 스님의 이미지는 신비한 '깨달음'을 추구하면서 신비한 도력(道力)을 통해서 복을 내려주는 데에 매개자가 될 수 있는 일종의 '도사'에 가깝다.

물론, 대중들도 현대의 거물 '도사'들이 얼마나 상업주의에 빠졌는지, 얼마나 자본주의의 논리를 잘 추구하는지 전혀 모르는 바가 아니다. 모르고 싶어도, 이권 나누어먹기 문제로 불거져 나오는 폭력적인 종권 다툼의 장면을 텔레비전에서 보게 되면 곧 알게 된다. 그러나 '불력(佛力)', '도력 (道力)', '기적'에 대한 '원시 종교적' 기대 심리가 아직은 강한 만큼, '산간의 성 (聖).속 (俗)의 신비적 매개자'들에게 그들의 자본주의적 변신이 용서된다. '용한 스님'의 대중적인 이미지에서는, 일반인과 같이 하는 교의 공부나 일체 불자가 지켜야 하는 기본 계율과 같은 요소가 상대적으로 부차적인 위치를 점한다.

필자 개인에게는, 결국에 가서 기도회가 잦은 인근 사찰보다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한국 역사를 가르치는 일요일마다의 사회 봉사가 훨씬 더 즐거운 수행의 장이 됐다. 외국인 노동자와 아는 것과 시간을 나누면서, 자아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었던 듯한 느낌이었다. 필자가 아는 적지 않은 수의 한국인 젊은 도심 불자에게도, 사찰 밖의 대중적 활동은 사찰의 '별천지'보다 더 나은 수행의 장이 됐다.

한국 불교가 '세속을 떠나 참선으로 깨달음을 구하는 것이 본업'이라는 중세적인 의식을 극복해야 한다는 지적은, 어제오늘 나온 것은 아니다. 한용운의 유명한 <불교 유신론>의 골자는, 바로 대중적.도심적 포교, 중생 교화 중심의 불교의 필요성의 갈파(喝破)다. 만해의 유명한 표현으로는, 조선시대 식의 '산간 불교'는 석가모니나 예수의 본마음이었던 '구세주의(중생 구제에의 의지)'보다 오히려 '염세주의'에 더 가까웠다. '민중 불교'를 꿈꾸었던 만해는, 의식 (儀式)의 간소화, 잡신 (雜神) 숭배의 철폐, 포교와 교육의 대대적 강화 등의 위주로 하는 구체적인 불교 개혁안을 내놓았지만, 그가 '근대 불교의 대표적 인물'이자 '민족 영웅'의 대접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개혁안 중에서 실천에 옮긴 것이 극히 적다.

만해의 동시대 인물 중에서도, 대중과 담을 쌓고 사는 중세적인 '도사적' 불교가 막을 내려야 한다고 보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한 예로, 나중에 친일 승려로서의 오명을 씌었지만, 1910년대의 전도가 가장 양양한 젊은 학승 중의 한 명이었던 권상로(퇴경당)의 <조선불교개혁론>이었다. 으레 단월들의 '외호'에만 의존하면서 산간에서 '잠만 자는', 교리 공부가 뒤떨어져서 참선도 '맹봉치갈(盲棒痴喝: 눈먼 막대기와 미친 고함소리)' 식으로 하는 한국 불교가 교육.포교를 매개로 대중과 일치가 돼야 한다는 것은, 권상로 개혁안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1910년대 초기의 괄목할 만한 개혁안들이 나왔음에도, 불교계의 상황이 크게 개선되지 못했다. 1920년대의 불교에 각성을 촉구하는 '재동경 쇼호생'이라는 필명의 조선 유학생의 글 (<조선일보>, 1921년01월27일)을 보면, 그 때의 진보적 성향의 젊은 불자들이 느꼈던 절망감을 새삼 느껴볼 수 있다.

"그러나 남하는 일을 보지도 못하고 남하고 살았다는 역사도 못 보았는지 조선인도 그랬지만은 그 중에 승려는 더욱 철저한 각오(覺悟)가 없었다. 오백년간 사회에 대하여 무슨 공헌 하나 없이 세간과 아무 무관계 몰교류(無關係沒交涉)하게 소극적 염세주의로 심산유곡에서 무의식적 혼몽(昏夢) 생활을 장구히 계속하다가, 근자에 이르러서는 세계사조를 배워야 하고 세계풍조를 쫓아야 하며 아울러 세계문운(世界文運)이 위대한 공헌이 있는 자로 同駕幷進하여야만 되겠다고 부르짖는 승려들을 보아 철저한 자각과 절실한 자오(自悟)가 없는 듯하다. 그 중에 혹 있기는 있지만은 보통으로 말해보면 없다하는말도 그리 과언(過言)은 아니다. 무식한 수구장로(守舊老長)님네는 화두에 올릴 필요도 없으니까 그만두고라도 현대에 소위 신교육을 받고 좀 깨였다하는 청년들을 보와도 참으로 한심한 일이 많다. 인천(人天)을 교화하고 조선 아니 세계문예를 부흥할 위대한 책임을 한 짐씩 부담한 청년들이 걸핏하면 반수구 노인(半守舊 老人)이 되고 말며, 그렇지 않으면 정신없는 자 즉 정신병자가 되고 만다." (맞춤법을 현대식으로 바꾸었음. - 필자).

여기에서 눈여겨볼 만한 대목은, '수구 장로(守舊老長)', 즉 수구적인 성향의 불교계 유력자에 대한 일종의 단념, 포기의 심정이다. 저자가 가장 한심하게 여기는 일은, 수구주의자들 밑에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관계로 그들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젊은이들의 '수구화(守舊化)'이었다. 현재 불교계의 진보적인 젊은 일꾼들이 종단 원로에 대해서 느끼는 심정은, 과연 많이 다르겠는가?

1910년대의 개혁안들이 왜 실천에 잘 옮겨지지 않는가, 불교계가 왜 중세적인 모습을 전혀 바꾸지 못했는가에 대해서, 1920년대의 조선 불교의 젊은 지성을 대표했던 이영재(李英宰)가 정답을 내린 것 같다. 삼보의 정재 (淨財)를 음주와 축처에 쓰면서 당국에 빌붙어 아부하는 불교의 기득권 세력, 즉 주지층과 그 측근들이 본인들의 현상 우지나 세 (勢)의 확장에 당장 도움이 되지 않는 교육이나 포교에 대개 무관심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이영재의 대답이었다.

이미 거의 80년이 지났지만, 재력.권력 있는 곳만 찾고 대중에 대해서 극히 냉소적인 불교 '권력층'의 추태도, 이를 어찌 할 수 없는 기존 현실로 받아들여 '참선만이 보리(菩提)로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대다수의 수도자의 마음 자세도, 포교․교육의 약세도 크게 봐서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유발'과 '무발'의 '본격적인 차이'에 대한 중세적인 의식이 사라져 구시대적 우월심을 버린 수도자들이 대중과 함께 불리(佛理)를 공부하고 사회적 부조리에 함께 맞서는 모습을 보일 것인가? 기복적인 의례가 아닌, 불경 공부와 수행자와 같이 하는 수행이 대중이 사찰을 찾아가는 주된 이유가 될 것인가? 불교적인 기본 윤리인 오계가, 승.속의 절대적인 행동 강령으로서의 정당한 자리를 잡을 것인가? 나아가서, 양심적 병역 거부와 대체 복무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오계 중의 첫째인 불살생계의 위반을 강요하는 국가가, 승.속의 공동된 항의의 대상이 될 건인가?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불교가 사회의 진보를 이끌어나가는 종교로서의 탈바꿈을 이룰 수 있겠는가?

필자의 생각으로는, 대답을 사찰의 권위 관계에 얽매여 있지 않은 재가 불자들이 내려야 할 것이다. 진보적인 보살.거사들은, 불교를 사회의 불의 (不義)와 부정을 극복할 수 있는 대의로 재인식하여 승가의 구습을 탈피하는 데에 선구적인 역할을 해야 할 셈이다. 대학 내의 권위주의적인 횡포든, 군대의 폭력 문화 강요든, 신자유주의의 비정규직 양산이든 착취와 억압이 있는 곳이면 이에 불교적인 입장에서 맞서는 '색다른 불자'의 모습이 보이면 만해 등이 꿈꾸었던 '구세주의적' 불교의 윤곽이 잡히지 않을까 싶다.

요즘 재가 불자들의 단체의 괄목할 만한 활동을 지켜보면서, 진보적인 사회적 가르침으로서의 불교의 미래를 결코 비관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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