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허성곤 김해시장을 비롯해 김형수 김해시의회 의장, 신영욱 도의원, 김명희·김종근·박은희·송유인·이광희·조팔도·주정영·최동석 시의원들이 대거 참석했다.
3.1독립운동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여 全 민족이 일어난 항일독립운동으로 일제 강점기에 나타난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다.
또한 3·1운동은 수개월 동안 지속되었으며 도시 등 교통이 발달한 곳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농촌 등지로 전파되며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김해는 1919년 3월 13일 최초의 김해 읍내 만세시위 시도가 있었고, 김해군내서는 3월 30일 읍내에서 처음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앞서 3월 9일 함안군 칠북면 이령리 시위는 일제 경찰서가 있는 칠원면과 약 8km 떨어져 있어 충돌없이 조용히 끝났으나 이후 12일과 17일 함안군 대산면 평림장터 시위, 18일 함안군 칠서면 이룡리 시위 등 함안 군내 각지에서 연쇄적으로 시위운동이 발발했다.
특히 3월 20일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낳은 함안군 군북면 시위가 있었고 19일 함안읍내 시위가 불이 붙었다.
그러면서 그는 "배동석 지사는 단순히 학생의 일원으로서 만세시위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민족대표들의 3.1운동 기획과 추진과정에 비밀 사자가 되어 경남 마산지방 지도층 인사를 만나 참여를 설득하는 사명을 수행했다"고 평가했다.
이 회장은 "이날의 시위는 정신여학교 학생 구명순이 최초의 발의자요 주도자였다"면서 "구명순은 배동석과 같은 김해군 김해면 동상리 출신으로 서울의 정신여학교 다니다 3월 10일 서울의 각급학교가 만세시위가 휴교하자 22일 김해로 귀향했다"고 예단했다.
즉 고향 김해에서는 3월 말이 다 되도록 어떠한 시위운동이 일어나지 않자 스스로 나선 것이다.
권도균 광주시 동부교육청 기록연구사는 "김해 출신 배치문은 1919년 만세시위부터 1940년대까지 독립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했다"며 "보천교의 자금을 상해임시 정부와 의열단에 전달하고 국민대표회의에 참여 했던 인물이다"고 소개했다.
권 연구사는 "배치문 지사는 노동조합 설립을 비롯한 노동운동으로 식민지 조선인의 불평등과 억압을 해결하려 노력했다"면서 "신간회 임원으로 언론활동을 통해 국가의 독립과 지역민의 각성을 위해 애를 썼던 인물이다"고 강조했다.
이른바 배치문 지사는 경상도 김해출신으로 30여년을 전남 목포를 주무대로 활동하면서 분열된 사회운동을 통합하려 무척 노력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다 이 교수는 "1차시위 때 주도적 역할을 한 김우현은 진영 하계면사무소 서기였다"고 하면서 "2차시위는 지역 유생들의 참여가 두드려졌으며 이는 향촌 내 지역 유지들이 만세시위에 직간접으로 참여했다"고 했다.
이홍숙 창원대 외래교수는 "김해군 장유면에서는 4월 12일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며 "유하리의 김종훤과 외덕의 김승태가 주축이 되었으며 김종훤은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장유면 유하리에서 '신문의숙'이라는 교육기관을 설립아혀 민족교육과 애국계몽과 운동애동에 주력했다"고 진단했다.
이 교수는 또 "김승태는 정통적인 유학자로서 전통학문에 정진하는 인물이었다"면서 "4월 2일에는 김해면에서, 3일과 5일에는 진영리에서 10일과 11일에는 명지면 중리와 진목리에서 연달아 일어났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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