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경제대통령'이라 불리는 앨런 그린스펀 미 연준(Fed)의장(87)은 금리를 결정하는 연방공개시장조작위원회(FOMC) 회의 때마다 '독재'를 하기로 유명하다.
그린스펀 의장은 회의에 참석하는 자신외 11명의 위원들에게 돌아가면서 자유롭게 발언하도록 한다. 하지만 결론은 언제나 그린스펀 몫이다. "여러분 얘기 잘 들었으니, 이번에는 금리를 이렇게 정하도록 한다." 이것으로 회의는 끝이다. 누구든 더이상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경영은 독재다"**
박태준씨도 포항제철 회장 재직시 '독재경영'으로 유명했다.
박 회장은 회의때 임원들외에 일선 현장에서 일하는 과장 등 실무자들을 배석시키기를 즐겼다. 이때 실무자들은 비록 자신의 상사인 임원과 의견이 다르더라도 소신껏 자신의 견해를 밝혀야 한다. 그렇지 않다가는 박 회장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기 일쑤다. "젊은 놈이 그런 패기도 없느냐"는 식의 질책이다.
이런 식으로 난상토론을 유도한 뒤 최종결론은 CEO인 박 회장 몫이다. 박 회장은 이처럼 "토론은 상하구분없이 자유롭게 하되 한번 내려진 결정에 대해선 뒷전에서 쑥덕공론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단호한 스타일이다. 그는 아울러 포철회장 재직시 외부권력의 '낙하산 인사'를 철저히 막아냄으로써 조직의 '영(令)'을 세웠다.
CEO의 대명사격인 김정태 국민은행장 또한 "경영은 독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가 98년말 주택은행장이 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동안 이사회에서 '거수기' 역할을 해주고 대출 등을 쉽게 받아간 건설회사 출신 이사들을 몰아내는 일이었다. 그는 그 대신 외부인사들 가운데 주택은행과 거래가 없는 주택전문가, 학자, 벤처업자, 회계전문가 등 전문가들을 대거 사외이사로 영입해 이들을 주축으로 이사회를 꾸렸다. 또한 종전에 이사회에 참여하던 임원들은 전부 이사회에서 제외시킨 뒤 자신이 직접 임면권을 행사했다. 김행장은 이처럼 독재자적 인사권을 행사하면서도 '측근'이라는 단어에 생리적으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스타일이다. "치열한 시장의 경쟁에서 살아남는 놈이 필요하지, 내 주변에서 얼씬거리는 놈은 필요없다"는 게 그의 인재관이다.
이처럼 국내외의 내로라하는 지도자들은 '독재자'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결정의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으니 믿고 따르라"는 식의 독재다. 권한만 갖고 책임은 지지 않으려는 속류 CEO들과 명확히 구분되는 대목이다.
***한은 금통위, 계속되는 파행 낙하산 인사**
'생산적 독재'가 가능하기 위해선 경영자에게 전적으로 인사권이 주어져야 한다. 지난달 중국에서 중국 정부고위층 및 금융계 인사들을 만나고 온 한 시중은행장은 "중국금융은 아직 멀었다"고 단언했다. "은행 임원 인사권을 행장이 아닌 공산당 간부들이 쥐고 있더라"는 이유에서였다. "인사권을 당에서 쥐고 있으니 조직내에서 행장의 영(令)이 안 서고, 그러다보니 관치금융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게 이 행장의 탄식어린 진단이었다.
과연 이같은 모습은 중국만의 일일까.
지금 한국은행이 또다시 시끄럽다. '3홍 비리'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보니, 주목하는 이들이 거의 없는 소란이다. 그러나 주목해야 한다.
지난주 강영주 금융통화위원이 증권거래소 이사장으로 임명됐다. 기관의 최고책임자로 옮겨가게 됐으니, 강 위원 개인으로 보면 축하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한은 노조가 펄쩍 뛰고 나섰다.
한은 노조는 22일 조합원 총회를 갖고 강 위원의 교체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에서 노조는 "금통위원의 신분이 보장돼야 소신있고 일관성있는 통화정책을 펼 수 있는 만큼 이와 관련된 금통위원 추천제도와 한국은행법상 독소조항을 개정할 것"을 요구했다. 노조는 이같은 요구를 담은 서한을 김대중 대통령과 전윤철 경제부총리에게 발송하며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이같은 노조 요구는 어찌 보면 트집잡기로 읽힐 소지도 없지 않다. 금통위원 한 명이 자리를 옮겨가는 것을 놓고 지나친 과잉반응을 보이는 게 아니냐는 식의 힐난이다. 그러나 전후의 사정을 보면 그렇지 않다.
강영주 위원은 4년 임기중 2년을 남겨놓은 상태다. 강 위원이 증권거래소 이사장으로 옮겨가게 된 데에는 그의 능력도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실제로 강 위원은 빼어난 능력 및 인화력의 소유자다. 문제는 그러나 임기가 절반이나 남은 강 위원의 이직 이면에 다른 논리가 숨어있다는 데 있다. 재경부가 강 위원 자리에 자기 조직 출신의 다른 인사를 앉히기 위해 재경부 선배인 강 위원을 증권거래소로 이직시킨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노조가 문제삼고 나선 대목은 바로 이같은 '관치 낙하산 인사' 관행인 것이다.
***일본조차 대장성은 중앙은행 인사에 안 끼어들어**
금리 등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금융통화위원회는 현재 박승 총재를 비롯해 7명의 금통위원으로 구성돼 있다. 문제는 이같은 금통위원 구성과정에 한은 출신은 박 총재 외에 김원태 위원 한명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나머지는 재경부를 비롯한 금감위원회, 대한상의, 은행연합회, 증권협회 등 비(非)한은 조직의 추천 케이스이다.
더 큰 문제는 이같은 비(非)한은 추천권이 사실상 재경부 주도하에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달초 3명의 금통위원이 임기 만료 및 영전(장승우 위원의 기획예산처장관 임명)으로 교체됐다. 이들 3명의 추천권은 대한상의 등의 몫이었다. 그러나 정작 추천권을 쥔 이들 기관은 추천 하루이틀전 재경부로부터 누구를 추천할 것인지를 통지받았다.
재경부가 이처럼 사실상 금통위원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는 여파는 크다. 금통위의 '독자적 금리결정'에 보이지 않은 압력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행 한은법에 "금리 결정권은 한은에게 있다"고 규정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대 재경부장관은 노골적으로 금리정책을 언급해왔다. 전윤철 신임 경제부총리 겸 재경부장관도 22일 "금리는 다음달 경제지표가 나온 뒤 방향을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정도이다.
재경부는 이 정도 언급에 만족하지 않고, 아예 금리결정기구인 금통위원에 자신의 영향권 아래 있는 인사들을 대거포진시켜 금리 결정권을 장악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보다 앞선 금융선진국인 미국이나 영국 등은 금리결정기구에 재무관료 출신들을 철저히 배제하고 있다. 그린스펀 의장을 포함해 13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미국 연방공개시장조작위원회의 경우나, 조지 총재를 포함한 9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영란은행 통화정책위원회의 경우가 그러한 대표적 예이다. 하야미 총재를 비롯한 9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일본은행 정책이사회에서조차 대장성 출신은 찾아볼 수 없다.
서두에서 말했듯 '경영은 독재'다. 이같은 생산적 독재가 가능하기 위해선 한은 총재가 금통위원 인사권을 가져야 한다. 재경부가 금통위원 추천권을 독식하고 있는 한, 소신있는 독자적 통화정책은 기대하기 힘들다.
말로만 시장경제 운운할 게 아니라 재경부도 이제 관치의 틀을 스스로 깨는 실천을 보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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