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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령 옛길로! 정조의 원행 따라 걷는 삼남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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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남태령 옛길로! 정조의 원행 따라 걷는 삼남길

2019년 3월 서울학교

봄이 오는 3월,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역사지리전문가) 제74강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묘인 현륭원을 참배하러 간 능행길을 따라 걸으며 정조와 얽힌 사연들을 살펴보고 관악산의 동쪽 산록의 계곡인 자하동천에 새겨져 있는 암각문을 감상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이번 답사는 관악산 산행은 하지 않고 새로 개척한 남태령 옛길과 인덕원까지의 삼남길을 걷겠습니다).

▲연주대. 원래는 의상대였으며 벼랑 위에 나한을 모신 응진전을 세웠다.Ⓒ서울학교

서울학교 제74강은 2019년 3월 10일(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 서울지하철 4호선 남태령역(서울 서초구 과천대로 816. 전화 02-6110-4341) 2번출구 지하에서 모여주세요. 서울 외곽인 만큼 여유있게 출발하여 모이는 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걷는 코스는 남태령역(지하철 4호선)-남태령 옛길-관아 터(과천초등학교)-온온사-과천향교-자하동천(암각문)-강득룡묘-신천강씨 시조단-보광사(목조여래좌상/삼층석탑/석조보살입상)-찬우물(가자당상우물/줄타기 터)-김약로 묘터-인덕원 터의 순입니다.
*현지 사정에 따라 코스가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서울학교 제74강 답사지도Ⓒ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2019년 3월 <남태령 옛길로! 정조의 원행길 따라 걷는 삼남길>에 대해 들어봅니다.

빼어난 명산, 관악산에 얽힌 이야기
한강의 남쪽을 지나는 산줄기란 뜻의 한남정맥이 수원 광교산에서 서해로 향하는 본줄기로부터 갈라져 나와 북서쪽으로 한강 남쪽에 이르는 지맥의 마지막에 우뚝 솟아오른 봉우리가 관악산입니다. 관악산은 예로부터 개성의 송악산, 가평의 화악산, 파주의 감악산, 포천의 운악산과 함께 경기오악(京畿五岳)의 하나로 수려한 봉우리와 빼어난 바위를 자랑하는 명산으로 꼽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에는 남경 천도의 적당한 천도지로 삼각산 남쪽의 오덕구(五德丘)가 거론되었는데, 오덕구란 중앙에 토덕의 백악, 서쪽으로 금덕의 계양산, 동쪽으로 목덕의 아차산, 북쪽으로 수덕의 감악산 그리고 남쪽으로 화덕의 관악산이 둘러친 명당으로 한강을 중심으로 한 지금의 서울 일대를 말합니다.

관악산은 일찍이 역사무대에 등장하여 많은 옛 기록에 그 이름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강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삼국이 쟁탈전을 펼칠 때나, 한강을 차지한 신라가 당나라를 내몰 때에도 관악산은 지형적 특성으로 군사적 요충지의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사실은 관악산에 잇대어 서쪽에 솟아 있는 호암산에 삼국시대에 쌓은 석축산성이 남아 있어 이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관악산 정상에 잇대어 죽순처럼 하늘을 향해 치솟은 절경 속 바위가 연주대(戀主臺)로서 이곳 바위틈에 30m의 축대를 쌓고 나한을 모신 응진전을 지었습니다. 응진전 입구에는 우진각지붕 형식의 마애감실에 중생의 질병을 구제하고 법약을 준다는 약사여래가 입상으로 봉안되어 있습니다. 왼손에 약병을 들고 오른손에 시무외(施無畏)의 인(印)을 하고 있으며 <응진전법당 중수기>에 의하면 효령대군이 조성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건립연대가 고려시대인 것으로 추정되며 감실의 조각수법 등 가치가 높은 문화재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연주대는 원래 의상대(義湘臺)라 불렸는데 <연주암지>에 의하면 677년(문무왕 17) 의상조사가 한강 남쪽에 유화(遊化)하다가 관악산의 수려함에 끌려 산정에 의상대를 창건하는 동시에 관악사를 개산했다고 합니다. 의상대가 연주대로 달리 부르게 된 연유는 고려가 멸망하자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오빠 강득용이 서견, 남을진, 조견 등과 같이 두문동 72인의 행적을 본따 불사이조(不思二朝)의 뜻을 품고 관악산 의상대에 올라 개성을 향해 통곡하며 고려를 연모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세종의 둘째형인 효령대군은 연주대에 올라 시를 짓고 궁궐에 있을 세종을 그리워하며 제일 높은 바위에 연주대라는 글씨를 친히 새겼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관악사가 연주암으로 달리 부르게 된 연유는 동생인 충령대군이 왕위를 물려받자 평소 불교에 심취하여 많은 불사와 역경사업을 한 효령대군이 유랑길에 나섰다가 관악사를 찾아와 수행하면서 궁궐이 잘 보이는 현재의 위치에 40칸 규모의 건물을 새로 지었는데 이때부터 관악사를 연주암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연 때문인지 연주암 바로 곁에는 효령대군의 영정을 모신 효령각이 세워져 있으며 원래는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었던 것을 1994년 효령각을 짓고 옮겨 봉안하고 있습니다.

▲연주암 야경 ⓒ과천시

관악산은 화기의 산
연주대 바로 밑에 위치한 관악사지(冠岳寺址)는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연구소의 발굴 조사로 15세기부터 18세기의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습니다. 관악사는 적어도 6개 이상의 건물이 있었고 이는 일시에 건립된 것이 아니고 시기에 따라 일정한 가람을 건립하고 이것이 수해에 의해 폐사되며 인근으로 옮기거나 혹은 그 자리에 대지를 조성하여 새로운 가람을 건립하여 명맥을 유지하다 18세기에 완전히 폐사된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사찰 건물은 급경사 지역에 석축을 쌓아 평탄하게 만든 후 평탄대지를 따라 계단식으로 축조하였는데 이는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인공적인 건물과 자연지형과 조화를 꾀하려는 전통적인 산지가람 배치방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관악사지는 최근 2015년 5월 14일에서 9월 25일까지 대한불교조계종 불교문화재연구소가 제2차 유적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청동숟가락과 철제 방탄모 등 금속 81건을 포함, 모두 1446건을 출토하였고 이후 경기도 문화재심의위원회 승인을 획득하였습니다.

결국 관악사지는 신라 의상이 창건한 사찰을 1411년(태종 11) 양령대군과 효령대군이 충령대군에게 세자 위를 전위한 후 관악산에 올라 전위에 따른 심정을 달랬다는 것이고 효령대군은 이곳에서 2년간 수양하며 관악사를 옛 터로부터 현 위치로 이축하면서 40칸의 가람을 건설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이것이 현재의 연주암이 되었습니다.

관악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여덟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팔봉능선을 따라 잇대어 솟아있는 삼성산은 신라의 고승 원효, 의상, 윤필 세 스님이 이곳에서 세 개의 초막을 짓고 수행하였다고 붙여진 이름입니다. 고려 말에는 스승과 제자 사이로 양주 회암사에 주석하였던 지공, 나옹, 무학 대사가 이곳에서 수행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서산, 사명도 이곳에서 수행하였습니다.

산 중턱에 세 개의 초막 중 하나인 삼막만이 삼막사(三幕寺)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고 일막과 이막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습니다. 삼막사에는 몽골이 고려를 침범했을 때 삼막사 스님인 김윤후가 승병이 되어 용인 처인성 전투에서 화살로 몽고군 원수 살리타이를 사살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조성된 삼층석탑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달리 살례탑(撒禮塔)이라고도 부르며 김윤후는 전쟁이 끝난 후 나라에서 상장군의 지위를 내렸으나 끝내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관악산은 한양도성의 외사산의 하나로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의 조산 또는 외안산에 해당합니다. 산의 형세가 불의 모양을 하고 있어 풍수상으로 관악산은 화성으로 예로부터 ‘왕도남방지화산(王都南方之火山)’이라 하여 화기의 산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한양도성의 외안산인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한 압승책으로 숭례문 밖에 인공 연못인 남지를 조성하였고 관악산 옆에 있는 삼성산에도 한우물이라는 연못을 설치하였으며 관악산 주봉인 연주대에는 아홉 개의 방화부(防火符)를 넣은 물단지를 놓아두었습니다.

그리고 도성의 사대문의 글씨를 모두 가로로 썼지만 남대문만 ‘숭례문’이라 세로로 썼는데 이것은 숭례문의 예(禮)는 5행의 화(火)에 해당되고 숭(崇)은 불꽃이 타오르는 상형문자이므로 숭례라는 이름은 세로로 써야 불이 잘 타오를 수 있고 이렇게 타오르는 불로 맞불을 놓음으로써 관악의 화기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야말로 불로써 불을 제압하고[以火除火] 불로써 불을 다스리는[以火治火] 격입니다.

남태령, 한양과 삼남 잇는 유일한 도보길
남태령(南泰嶺)은 관악산에서 우면산과 이어진 산줄기 안부를 일컫는데 옛날부터 한양과 삼남을 잇던 유일한 도보 길입니다. 물산의 이동이 많은 길이자,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던 관문이며 한때는 정조가 지극한 효성으로 아버지를 그리워하여 묘소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관악산은 예부터 산이 험준해서 도적이나 범죄자가 숨어 살며 행인들의 물건을 뺏는 산적질이 횡행하여 이들의 행위가 여우짓 같다고 해서 이 고개를 ‘여우고개’라 불렀습니다. 또한 산적의 약탈을 예방하기 위해 과천 쪽 유인막에 행인 50인이 모이면 관군이 호송하여 고개를 넘었다고 해서 ‘쉬네미고개’라고도 불렀습니다.

남태령이라 불리게 된 연유는 정조가 수원 현륭원에 행차하다 이 고개에서 잠시 쉴 때 “이 고개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옆에 있던 과천현의 이방 변씨가 “남태령입니다”라고 아뢰었습니다. 이때 옆에 있던 신하가 ‘여우고개‘라 예로부터 전해오는 이름이 있는데 어찌 거짓 이름을 아뢰느냐고 질책하니 “임금님께 ‘여우고개’라는 속된 이름을 아뢰기가 민망해서 그랬습니다” 하므로 임금님께서는 변이방의 깊은 뜻과 즉흥적인 작문 실력을 높이 칭찬하였고 그 후부터 남태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위의 암각글씨 '자하동천 백운산인' Ⓒ서울학교

관악산이 품은 계곡 자하동천의 암각글씨들
관악산이 품은 계곡을 자하동천(紫霞洞天)이라 하는데 그 흘러내리는 물줄기의 방향에 따라서 삼성산 아래 안양 쪽 계곡을 남자하동, 연주대에서 과천 쪽 계곡을 동자하동, 서울대학교에서 신림동으로 이어지는 계곡을 북자하동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남자하동은 안양천으로, 북자하동은 신림천으로 이름이 바뀌어 복개되어 옛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고 동자하동만이 자하동천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20여 리에 이르는 골짜기 입구에 깎아지른 듯한 바위와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수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어 특히 이 일대를 자하시경(紫霞詩境)이라고 부릅니다.

이곳은 조선시대 정조, 순조, 헌종에 이르는 3대에 걸쳐 시, 서예, 그림의 3절로 유명한 신위(申緯)가 살던 마을 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자하는 신위의 호입니다. 신위는 관직을 버리고 자하동천에 내려와 시, 글씨, 그림으로 낙을 삼고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자하동천의 바위에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 4종의 암각글씨가 새겨져 전해지는데, 자하동 입구라는 뜻의 ‘자하동문(紫霞洞門)’, 흰 구름처럼 마음대로 오간다는 뜻과 시를 쓰는 경지가 하늘에 닿는다는 의미의 ‘백운산인 자하동천(白雲山人 紫霞洞天)’은 신위가 쓴 것이고, 관악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며 시를 짓는 것을 기념한 ‘단하시경(丹霞詩境)’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와 유사한 필체로 추정되며, 최치원의 시인 ‘광분첩석(狂奔疊石)’과 ‘우암서(尤庵書)’는 우암 송시열이 쓴 것으로 추정됩니다.

▲과천객사인 온온사Ⓒ서울학교

수령 중의 수령은 과천현감
관악산이 부려놓은 고을은 안양, 시흥, 과천 그리고 서울의 관악구인데, 특히 과천은 관악산과 청계산 사이에 형성된 고을로서 한양에서 삼남지방으로 나가는 길목에 위치하면서 도성 안의 정보를 가까이 접할 수 있는 고을이라 일찍부터 수령 중에 과천현감을 제일로 꼽았습니다. 과천의 관아는 대부분 폐허가 되었고 객사와 향교만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온온사(穩穩舍)는 과천현 객사의 정당 건물입니다. 객사는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관사로 지방을 여행하는 관리의 숙소 역할과 함께 궐패와 전패를 모셔 놓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향궐망배(向闕望拜)를 행하는 곳이었습니다. 과천객사는 1649년(인조 27) 현감 여이홍이 객사 동헌을 건립하였고 1666년(현종 7) 남창조가 객사 서헌을 건립하여 다른 지역의 객사보다 규모가 컸는데 그 이유는 조선시대 왕이 남행할 때에는 과천을 경유해야 했고, 경우에 따라 왕이 묵어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온온사란 명칭을 갖게 된 연유는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원묘인 현륭원으로 참배하기 위해 능행할 때 과천의 객사에 머물며 주위경관이 좋고 쉬어가기 편하다 하여 온온사란 현판을 내림으로써 이름을 갖게 되었고 이때 관아동헌에는 옛 별호인 부림을 따서 부림헌(富林軒)이란 현판도 하사하였다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과천면의 청사로 사용하다가 1932년 기존 건물을 헐어 원형을 변형하여 새로 지은 것을 1986년 전남 승주군 낙안 객사의 형태를 참고로 하여 완전 해체 복원하였기 때문에 원형을 찾는 데는 새로운 연구조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온온사 입구에는 병자호란 때 관악산 바위굴에 은거하면서 청군과 싸운 현감 김렴조, 명성황후의 친정아버지 민치록 등 과천현감 15명의 선정비가 남아 있습니다.

과천현의 관아는 지금의 과천초등학교에 있었는데 지금도 운동장과 등나무 그늘 등 교정 곳곳에 석주, 장대석, 초석 등이 남아 있습니다. 석주는 누각의 초석으로 쓰였던 것인데 자연석을 다듬어 사용한 것과 그대로 사용한 것 등 두 종류가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현재 이승복 동상이 있는 곳부터 놀이터에 이르는 지역에 정면 10칸, 측면 2칸 규모의 관아가 있었으며 이 관아는 교사로 사용되다가 이후에는 교무실과 창고로 활용되었다고 합니다.

과천향교는 1398년(태조 7)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데 1400년(정종 2)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407년에 재건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된 것을 1601년(선조 34)에 중건하였습니다. 본래의 위치는 과천관아 동북2리에 있었으나 1690년(숙종 16) 과천현감 황이명이 관아 서쪽 지금의 위치로 옮겼으며, 1944년에 시흥향교, 안산향교가 폐지되고 과천향교로 통합되었다가 1959년에 시흥향교로 개창되었으며 1996년에 과천향교로 명칭이 복원되었습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을 비롯하여 명륜당, 내삼문, 외삼문 등으로 되어 있으며, 대성전에는 5성, 송조2현,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강득룡 묘는 부인 이씨와의 쌍분묘로 과천시청 뒤편 보건소 뒷문 밖에 있습니다. 묘역 입구에는 홍살문과 신천강씨의 시조 신성부원군의 신단이 있습니다. 이곳은 원래 안정공의 위토로 1978년에 정부과천청사 부지로 편입되었습니다. 묘표는 비문이 마모되어 글자가 확인되지 않고, 1959년에 세운 묘비는 전 성균관부제학 안인식이 비문을 짓고 11대손 강천식이 글씨를 썼습니다. 석물은 15세기 전반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문인석 2쌍만이 원래의 것이고 장명등, 석양 등은 근래에 제작된 것입니다. 강득룡은 본관이 신천, 시호가 안정이며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오빠입니다. 문과에 급제하여 공민왕 때 삼사우사를 지냈으나 조선이 건국되자 관직을 버리고 관악산 연주암에 은거하여 고려의 멸망을 애도하였다 합니다. 좌리공신 첨의정승을 지냈으며 안릉부원군에 봉해졌습니다.

▲보광사에서 바라본 관악산Ⓒ서울학교

보광사의 귀중 문화재들
보광사는 도심 속에 세워진 사찰로 목조여래좌상, 문원리 삼층석탑, 문원리사지 석조보살입상 등 귀중한 문화재가 산재해 있습니다. 보광사 목조여래좌상은 극락보전의 주불로 원래 양평 용문사에 봉안되었던 것인데 한국전쟁 때 어떤 보살이 여주로 옮겨 모시고 있다가 1991년경 이곳에 옮겨왔다고 합니다. 환미감이 남아있는 상호, 움츠리지 않고 서있는 목, 오른쪽 어깨에 자연스레 물결치듯 접히면서 가장자리가 살짝 반전되어 불규칙한 곡선을 이루는 점, 가슴 부분에 묶여진 군의의 끝부분을 앙연형태로 표현한 점, 그리고 무릎 사이에 입체적으로 형성된 여러 개의 주름 등에서 비교적 덜 도식화된 느낌을 줍니다. 따라서 보광사 목조여래좌상은 늦어도 17세기 중엽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문원리 삼층석탑은 문원리에 인접한 관문리의 일명사지에서 옮겨 왔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단측 기단과 3층 탑신을 구비한 석탑으로 지대석에는 각 면 2구씩 장방형액을 형성한 후 내부에 8괄호형의 안상(특수한 장식)을 1구씩 놓았으며 중대석은 1석으로 조성하였는데 4우(귀퉁이)에 우주를 모각하였고, 1석으로 조성된 갑석을 올려놓아 초층을 받치고 있습니다. 탑신과 옥개석은 각 1석으로 조성하였는데 3층 탑신은 결실되었고, 2·3층 옥개석 역시 파손되어 시멘트로 보강하였습니다. 기단부에 보이는 섬세한 안상형 장식과 초층 탑신면, 옥개석의 알렵한 반전에서 통일신라시대 후기 석탑 양식을 충실히 계승한 고려시대의 작품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문원리사지 석조보살입상은 관문리사지에서 보광사 창건시에 삼층석탑과 함께 옮겨 왔다고 합니다. 둔중해 보이는 이 보살상은 납작한 얼굴, 좁은 어깨, 빈약한 체구, 서툰 옷 주름선 등 지극히 도식화된 불상양식으로, 머리에 모자를 쓴 보살상은 대체로 고려 초에 나타난 미륵불로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지방화된 독특한 양식입니다. 머리에 씌워진 보개는 고려 초기 4각에서 점차 8각으로 바뀌고 조선 초기에는 원형의 모자형태로 바뀌는데 제작당시에 얹은 것도 있고 후대에 얹은 경우도 있어, 이 석조보살입상은 고려 초기에 민간에 의해 제작되고 조선 초기에 보개를 얹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정조 임금으로부터 가자당상 벼슬을 제수 받은 찬우물Ⓒ서울학교

찬우물에 얽힌 사연
과천을 지나서 남쪽으로 조금 더 가면 물맛이 좋아 정조가 가자(加資)로 당상벼슬을 제수했다는 찬우물이 있고, 그 위쪽 산에 김약로의 묘가 있었습니다.

찬우물[冷井里]은 정조 임금이 수원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러 과천을 지날 때, 갈증이 심하게 났는데 신하가 떠온 우물물을 마시고 난 후 물이 참으로 차고 맛이 좋다 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정조는 이 우물에 가자당상(加資堂上, 정3품 이상 품계)을 제수하였으며, 그 후로 이 우물은 가자우물로 불리어졌고, 물맛이 좋고 차다 하여 찬우물이라고도 불렀다고 합니다.

김약로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깊이 관여했던 김상로의 형으로,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그의 관작을 추탈했습니다, 일찍이 영조는 세손 시절의 정조에게 “김상로는 너의 원수이다”라고까지 하였는데 사도세자의 비극이 있었던 임오년(1762년) 당시 김상로는 노론의 영수로서 영조의 후궁 숙의문씨와 그 오라비 문성국 등과 함께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이런 김상로의 친형인 김약로의 묘가 부친의 묘를 참배하러 가는 길 인근에 있으니 정조가 이곳을 지날 때마다 지난날의 아버님의 애절함을 생각하여 그 묘소조차 보기 싫어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지나갔다고 하며 이마저도 싫어 안양천을 건너는 만안교를 새로 놓고, 시흥 방향의 새 길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원래 찬우물 우측 산 능선 200m에 묘역이 있었으나 이러한 유래에 대해서 부담이 되었는지 지금은 묘는 이장하고 묘역에는 관목과 큰 소나무를 심어 놓고 쇠 철망을 두르고 있어 일반인의 접근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김약로(金若魯)는 본관 청풍, 호는 만휴당, 시호는 충정으로, 지금의 의왕시 왕곡동에서 태어났습니다. 1726년(영조 2) 사마시를 거쳐 증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가 되었고, 그 뒤 실록청 낭관이 되어 <숙종실록> 보완의 잘못을 논하다가 유배당했으나 이듬해 방면되었습니다. 1729년(영조 5) 세자시강원 설서에 임명되고 홍문관 교리, 헌납, 수찬을 두루 역임하고, 1742년(영조 18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며 1744년(영조 20) 내직으로 들어와 대사헌, 호조판서, 좌참찬, 우참찬, 판의금부사, 이조판서에 이어 여주목사로 부임하였습니다. 1749년(영조 25)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습니다.

또한 찬우물 터는 당대의 줄타기 명인 김관보가 김영철을 비롯한 그의 제자들에게 줄타기 학습을 시켰던 곳으로 그것에 대한 안내석과 김영철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줄타기는 1300여 년 전 신라시대부터 연희되었다고 하는데 고려시대에는 팔관회(八關會)라는 국가행사에 참여했으며, 조선시대에 와서는 나례(儺禮)에 줄타기가 있었습니다. 특히 조선 성종 때의 학자 성현은 줄타기의 아름다움을 “날아가는 제비와 같이 가볍게 줄 위에서 돌아간다(走索還同飛燕輕)”라고 감탄하였습니다.

김영철은 1920년 경기도 과천면 갈현리 3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김한근은 여러 지방의 큰 장터로 다니는 상인이었습니다. 3형제 중 장남인 김영철은 글을 배우기 위해 서당을 다니면서 이웃집에 사는 줄타기의 명인 김관보의 줄에 홀리어 줄과의 인연이 시작되어 1929년에 스승 김관보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줄타기를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1937년 17세에 줄타기의 학습을 마친 후 큰 명절과 행사에는 김영철의 줄타기가 꼭 연희되었습니다. 또한 김영철은 악기에도 능하여 직접 철연금이라는 악기를 제작하여 연주를 하고 보급도 하였습니다. 1980년 무리한 일정과 과로로 몸을 상하게 되어 더 이상 줄을 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말년에는 넓은 대지에서조차 거동을 못할 정도로 중풍이 심했으며 그래도 그의 문하생인 김대균을 가르쳐 줄타기의 맥을 이어갔습니다.

사통팔달의 교통 요충지 인덕원
인덕원(仁德院)은 조선시대 전국 6대로의 하나로 삼남지방을 오가는 길목이었으며 지금도 과천, 의왕, 수원, 성남 등으로 연결되는 사통팔달의 교통의 요충지입니다. 인덕원이란 마을 지명은 조선시대 때 내시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생겨났다고 합니다. 내시는 비록 거세된 몸이지만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높은 관직의 신분으로, 왕실에서 내린 봉록(俸祿)과 기타 수입들로 많은 재물을 모을 수 있었고 이 재물을 이웃 주민과 살고 있는 고장에 많이 베풀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화를 베푸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란 의미로 인덕(仁德)이란 명칭이 생겼고 이후 나라에서 공무나 여행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원(院)을 설치하면서 인덕원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광주에서 서쪽 45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과천현에서는 현의 서쪽 15리 지점에 인덕원이 소재하고 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후 편찬된 <여지도서>에 게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인덕원은 조선 전기에 주로 활용된 뒤 임진왜란을 즈음해 없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인덕원 옛길은 노비신분에서 상인, 선비, 왕에 이르기까지 만민이 이용해야 했던 중요한 교통로였고 특히 왕의 어가행렬이 지나갈 정도로 당시에는 매우 넓은 길이었습니다.
 
인덕원 옛길은 정조와 인연이 깊습니다. 1789년(정조 13) 10월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 화산으로 옮기기 위해 인덕원을 지나간 이후 다음해 1790년부터 1799년까지 11차례에 걸쳐 능 행차를 하였는데 이중 6차례를 인덕원 옛길을 이용했습니다. 5차 능 행차인 1793년 1월에는 인덕원 들녘을 지나며 친히 어가에서 내려 인근에 있던 마을노인들을 접견하고 위로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795년(정조 19) 안양천에 만안교를 가설하고 인덕원길로 행차하지 않고 서울-시흥-안양-수원 노선으로 바꾸게 됩니다.
 
인덕원은 교통 요충지였던 만큼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난중일기>에는 “남쪽으로 내려갈 때 인덕원을 거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1596년 이순신 장군이 수원으로 행차하던 중 말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 인덕원에서 한참을 쉬어갔다고 합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걷기 편한 보온차림, 모자, 선글라스, 장갑,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참가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랍니다. 꼭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참가비, 웹주소,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서울학교'를 찾으시면 3월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서울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은 재미있고 깊이 있는 <서울 해설가>로 장안에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는 서울의 인문지리기행전문가이며, 불교사회연구원 원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서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공동체로서의 '마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 보니 서울이 공동체로서 '가장 넓고 깊은 마을' 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적인 요소가 발현되지 않는 '마을'이어서입니다.

남한의 인구 반쯤이 모여 살고 있는 서울(엄밀히 말하면 수도권)이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호남향우회, 영남향우회, 충청향우회 등 '지역공동체 출신으로 서울에 사는 사람'만 있지 '진정한 서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엄연한 현실이 서울의 현주소입니다.

이러한 문제인식에서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적 접근을 통해 그곳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마을 공동체로서 서울에 대한 향토사가 새롭게 씌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역사, 풍수, 신화, 전설, 지리, 세시 풍속, 유람기 등 가능한 모든 자료를 참고하여 이야기가 있는 향토사, 즉 <서울학>을 집대성하였습니다.

물론 서울에 대한 통사라기보다는 우리가 걷고자 하는 코스에 스며들어 있는 많은 사연들을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그 내용은 정사도 있겠지만 야사, 더 나아가서 전설과 풍수 도참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서로는 <최연의 산 이야기> <이야기가 있는 서울길>이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서울학교>를 여는 취지는 이렇습니다.

서울은 무척 넓고 깊습니다.
서울이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려고 끼리끼리 합종연횡 치열한 싸움을 벌였을 때입니다. 한반도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서울은 꼭 차지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서울은 고려시대에는 남쪽의 수도라는 뜻의 남경(南京)이 있었던 곳이며, 조선 개국 후에는 개성에서 천도, 새로운 수도 한양(漢陽)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망국(亡國)의 한을 고스란히 감당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에 합병되는 그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곳도 서울입니다.

이렇듯 서울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서 역사 유적의 보고입니다. 또한 개항 이후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펼쳐 놓은 근대문화유산 또한 곳곳에 산재해 있어 서울이 이룩해 놓은 역사 문화유산은 그 넓이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깊이와 넓이만큼 온전하게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곳도 서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소실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의도적으로 우리 문화를 파괴, 왜곡시켰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도 동족상잔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박정희 이후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개발독재세력은 산업화와 개발의 논리로 귀중한 문화유산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피맛골 등 종로 일대의 '무분별한 개발'이 그 비참한 예입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 접하고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은 점(點)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러한 점들을 하나하나 모아 선(線)으로 연결하고, 그 선들을 쌓아서 면(面)을 만들고, 그 면들을 세워 입체의 온전한 서울의 문화유산을 재구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서, 지리지, 세시풍속기 등 많은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합니다만, 그 기록들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은 '역사적 상상력'으로 보완해야 합니다.

최근의 관심 콘텐츠는 <걷기>와 <스토리텔링>입니다. 이 두 콘텐츠를 결합하여 '이야기가 있는 걷기'로서 서울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서울학교>를 개교하고자 합니다.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기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울학교는 매달 한 번씩, 둘째 주 일요일 기행하려 합니다. 각각의 코스는 각 점들의 '특별한 서울 이야기'를 이어주는 선입니다. 선들을 둘러보는 기행이 모두 진행되면 '대강의 서울의 밑그림'인 면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기행을 통해 터득한 여러분들의 상상력이 더해질 때 입체적인 '서울 이야기'는 완성되고 비로소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기행의 원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대략 오전 9시에 모여 3시간 정도 걷기 답사를 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맛집에서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한 후에 1시간 30분 가량 가까이에 있는 골목길과 재래시장을 둘러본 후 오후 3∼4시쯤 마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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