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들한테는 돈을 잘도 빌려주던데, 기자들에게도 한은 특융 같은 것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최근 정가 및 언론계의 큰 논란이 되고 있는 '언론 논쟁'과 관련, 노무현 민주당 경선후보가 지난해 8월 기자들과 사석에서 자신이 말했다고 인정한 발언 중 일부다.
노후보의 이 발언은 비공식석상에서 술잔이 오고가는 와중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가볍게 나온 말인 것으로 판단된다. 노후보가 동아일보 등 메이저신문사의 오너 지분중 일부를 사원들에게 나눠줘야 한다는 자신의 평소 언론개혁론을 피력하는 과정에 돈없는 직원들이 어떻게 지분을 매입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방법을 생각나는 대로 즉흥적으로 언급한 것이라고 판단되는 까닭이다.
***"한은이 '돈 공장'이냐?"**
이런 이유에서인지 노후보의 언론관을 적대적 감정까지 드러내며 문제삼고 있는 조·중·동까지도 이를 그다지 문제삼지 않는 분위기다. 그러나 단 한곳, 한국은행의 분위기는 그렇지 않다.
한은의 한 고위관계자는 이 발언을 접하고 크게 불쾌해 했다.
"한은이 '돈 공장'이냐? 한은이 뭐 정치권이 시키면 민간기업인 동아일보 직원들이 주식을 사는 데 돈을 찍어 빌려줘야 하는 돈 공장이라도 된다는 건지 뭔지... 술자리에서 한 말을 문제삼기는 뭐하나, 장차 한 나라를 운영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그런 그릇된 인식구조를 갖고 있다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또다른 한은 관계자도 불쾌감을 토로했다.
"이와 비슷한 일이 지금으로부터 10년전인 지난 92년에도 있었다. 당시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던 정주영 국민당후보가 '한은이 3천억원의 신권을 찍어내 정치자금으로 사용했다'는 어이없는 주장을 폈다가 한은이 고소하자 정후보가 싹싹 빌며 발언을 취소한 해프닝이 있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건만 한은을 보는 정치권의 인식은 도통 바뀐 게 없어보인다."
***한은이 '남대문 출장소'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한은은 한때 '재무부의 남대문 출장소'라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재무부 지시에 따라 정책금융을 집행해야 했던 까닭에 붙여진 불명예스런 별명이다. 노후보가 "재벌들한테 돈을 잘도 빌려주던데..."라고 한 대목도 이런 과거를 지칭한 것일 게다.
한은의 정책금융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노후보가 말한 특별융자(특융)이다. 특융이란 한은이 특별한 목적으로 시중은행 등에 지원해주는 낮은 금리의 자금을 일컫는다.
한은은 70년대이래 크게 다섯 차례 특융을 했다. 지난 72년 기업의 사채를 전면 동결한 8.3조치때 맨처음 지원됐고, 85년 집단도산 위기에 빠진 해외 건설 및 해운사를 지원키 위한 산업합리화 조치때 1조7천2백21억원이 지원됐다. 그후 87년에 농·수·축협에 2천5백억원, 92년 한투·대투·국투 등 3개 투자신탁회사에 2조9천억원, 그리고 IMF사태를 전후해 붕괴된 금융시스템 재건을 위해 10조7천6백56억원이 지원됐다.
특융은 보는 시각에 따라선 '특혜'로 비칠 소지가 분명 존재한다. 시장논리에 따라 정리돼야 할 부실 기업이나 금융기관을 존속시키는 '관치적 요소'가 내포된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85년 특융과 92년 특융이 그런 대표적 예에 속한다.
그러나 한은은 그동안 특융의 남용을 막기 위해 정부 경제부처와 치열한 싸움을 벌여왔다. 한은의 이런 노력은 외부에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으나, 요즘 와서는 아무리 재경부라 할지라도 시장논리에 어긋나는 요구를 하지 못할 정도로 한은의 노력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현행 한은법은 특융의 범위를 '통화와 은행업이 직접적으로 위협되는 중대한 긴급시'로 엄격히 규정하고 있다. IMF사태 당시 나간 특융은 금융권 붕괴를 막아야 하는 '최종 대부자'라는 한은의 존립목적에 근거한 특별 비상조치였다. 한은은 또 당시 집행된 10조원대의 특융을 한은법 규정대로 1년이내에 모두 환수했다.
***'정치는 정치, 경제는 경제'**
노후보의 '한은 특융' 발언은 이런 맥락에서 언론개혁 논쟁과는 별개의 논란거리를 내포하고 있다는 게 금융계의 지배적 관측이다.
한은의 한 관계자는 "아마도 노후보는 한은 특융의 메커니즘을 모르고 과거 통념에 따라 한은 특융을 지나가는 말처럼 언급했을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그러나 새 시대를 이끌어갈 지도자가 되겠다고 하면 최소한 중앙은행에 대한 분명한 철학은 가져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그는 "한은이 이처럼 왜곡된 평가를 받는 것은 그동안 분명한 제 자리를 찾지 못했던 한은 자체의 잘못도 있다 하겠다"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은이 일개 신문사 직원들을 위해 특융을 해줘도 되는 기관인 양 인식되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고 유감을 표명했다.
한 시중은행 고위관계자도 "이번 발언은 단지 한은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정치권이 경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극명한 예"라며 "정치의 계절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부터 명쾌히 인식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요즘 기업인들을 만나보면 과거처럼 정치권과 줄을 대려는 사람들을 찾기 힘들다"며 "이제는 정치인들도 '정치는 정치, 경제는 경제'라는 분명한 정경분리 인식아래 국정에 임해야 할 것"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한은 노조는 8일 새로 부임하는 3명의 금통위원중 2명이 '친(親) 재경부 인사'라는 이유로 출근저지 투쟁을 벌였다. 한은 사람들이 명실상부한 중앙은행으로 태어나기 위해 내부적으로 얼마나 치열한 자기발전 과정을 거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한 예다.
한은 노조의 한 관계자는 "노후보 발언을 접하고 노조원들 대다수가 크게 분노했으나 이를 공개적으로 문제삼을 경우 정치적으로 이용될 것을 우려해 이를 공론화하지는 않는 분위기"라며 "그러나 발언 당사자는 어떤 형태로든 이 문제에 대해 한은측에 사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초 미국 대선때 민주당의 고어나 공화당의 부시 후보 모두가 앨런 그린스펀 연준의장을 방문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라 했던 모습을 우리나라에서도 목격할 수 있어야 비로소 한국사회도 한 단계 발전했다는 평가를 받지 않을까"라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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