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현대자동차, SK텔레콤 등 내로라 하는 국내 50대 대기업이 감시받고 있다. 특히 그들의 기업지배구조가 집중 감시대상이다.
이같은 감시 정보는 수시로 국내외 기관투자가들에게 유료로 제공되고 있다. 이들은 이런 정보에 기초해 조단위의 천문학적 거액을 투자하거나 회수한다.
감시대상이 된 대다수 기업들의 입장에서 보면 여간 신경 곤두서는 일이 아닐 것이다. 기업지배구조가 투명한 기업에게야 도리어 득이 되겠지만 말이다.
***외국계 투자가들이 가장 신뢰하는 연구소**
지난해 11월21일 조용히 문을 연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cgcg.or.kr)'라는 연구집단이 있다. 이 연구소는 일반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생소한 단체다. 그러나 외국 기관투자가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지명도가 높다. 신뢰할 수 있는 기업지배구조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 연구소의 남다른 특징은 철저한 '유료'라는 사실이다. 연간 5백만원의 적잖은 회비를 내야만 이 연구소가 생산해내는 각종 자료를 볼 수 있다. 이 연구소가 일년에 네번 발행하는 잡지도 3만원을 내야만 볼 수 있다. 이 정도 적잖은 돈을 회비로 낼 수 있는 이가 개인일 리 없다. 대부분의 회원이 기관투자가들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외국계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연구소 관계자는 "회원숫자는 공개할 수 없으나 외국계 투자가들이 전체 회원의 70% 가까이 된다"고 말했다. 외국계 비중이 높은 것은 투명한 기업지배구조가 이들의 주요 투자기준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외국계 투자가가 한국 증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다. 2001년말 현재 시가총액에서 외국계 보유주식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무려 36.6%나 된다. 특히 이들은 국내의 대표주를 중심으로 투자를 하고 있어 웬만한 대기업 주식의 절반 이상은 외국계 소유다. 한마디로 말해 이들 외국계야말로 대기업의 기업가치, 즉 주가를 쥐락펴락하는 존재들이라 할 수 있다.
현재 국내주식에 투자하고 있는 외국계 숫자는 일반의 생각보다 많다.
2001년 3월말 집계에 따르면, 국내 주식시장에 참여하고 있는 외국인 투자가는 개인 4천6백10명, 기관 7천4백28개사 등 도합 1만2천38명이나 된다. 여기에다가 뉴욕증시(NYSE)에 상장된 기업들에 투자하고 있는 외국인 투자가들 숫자까지 합하면, 직간접적으로 국내 대기업들에 관심을 갖고 있는 외국계 숫자는 수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외국계의 주된 관심사중 하나가 기업지배구조의 '경영 투명성'이다. 국내투자가들이 수억이나 수십억원을 투자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들 외국계는 수조원을 투자한다. 이렇게 큰 돈을 투자하다 보니, 이들은 CEO(최고경영자)가 주주가치를 최우선시하는 경영을 하는지, 이들 CEO의 주주가치 경영에 오너들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를 예의주시한다.
요컨대 기업지배구조의 경영 투명성을 가장 중시하고 있는 것이다.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가 겨냥하고 있는 대목도 바로 이같은 외국계의 '기업지배구조 수요'인 셈이다.
***감시대상에 오른 50개 기업의 면면**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 연구소의 활동에 국내 대기업들은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다. 현재 이 연구소가 기업지배구조를 감시중인 대기업들은 모두 50개사이다. 특히 외국계 주식보유 비율이 높은 기업들이 우선 감시대상으로 올라 있다.
가나다순으로 살펴보면 국민카드, 국민은행, 굿모닝증권, 금강고려화학, 기아자동차, 농심, 다음, 대우증권, 대한항공, 두산, 미래산업, 삼보컴퓨터, 삼성물산, 삼성전기, 삼성전자, 삼성중공업, 삼성화재해상, 삼성SDI, 신세계, 신한금융지주회사, 아남반도체, 에스원, 제일기획, 제일제당, 태평양, 포항종합제철, 하나은행, 하이닉스, 하이트맥주, 한국가스공사, 한국담배인삼공사, 한국전기초자, 한국전기통신공사, 한국전력공사, 한국타이어, 현대모비스, 현대산업개발,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현대증권, 휴맥스, KTF, LG생활건강, LG홈쇼핑, LG전자, LG화학, LGCI, SK텔레콤, SK글로벌 등이다.
연구소측은 금명간 감시대상을 1백개사로 늘릴 예정이라고 밝히고 있다.
감시대상에 올라 있는 한 대기업 관계자는 "이 연구소의 존재가 상당히 부담스럽다"고 토로했다. 그는 "오너 시스템이 지배하는 우리 사회에서 기업지배구조가 하루아침에 개선되기란 힘든 게 현실 아니냐"며 "이 연구소의 감시활동은 곧바로 주가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의 감시보다 이 연구소의 감시활동이 한층 부담이 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참여연대 출신 전문가들이 주축**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는 시민운동에서 태동한 단체라 할 수 있다. 이 단체는 참여연대를 통해 소액주주 운동을 함께 벌여온 법조계, 학계, 회계업계 등의 전문가들이 주축이 돼 세워졌다.
소장은 한누리법무법인이라는 투자자 소송 전문로펌의 선임 파트너로 활동중인 김주영 변호사가 맡고 있다. 김 소장은 92년 김 & 장 법률사무소에서 기업변호사로 변호사 업무를 시작한 이래 10년 가까이 기업관련 사건을 처리해온 베테랑이다. 그는 지난 97년 참여연대에서 주로 SK 텔레콤을 대상으로 한 소액주주운동을 주도한 것을 계기로 기업감시운동에 관여하기 시작하다가 이 연구소의 소장까지 맡게 됐다.
부소장은 현재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의 경영학과 교수로 재직중인 김우찬 교수가 맡고 있다. 김 부소장은 기업지배구조, 연기금 투자, 외국인 증권투자 행태 등을 주로 연구해온 전문가이다.
이 연구소의 태동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이는 다름아닌 장하성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다. 장 교수는 최근까지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아 박원순 변호사와 함께 오늘날의 참여연대를 만든 양대 견인차중 한명으로 유명하다. 장교수는 99년 비즈니스위크가 선정한 '아시아 스타 50인'중 한명으로, 지난해에는 아시아위크지가 선정한 '아시아의 영향력 있는 인물 50인'중 한명으로 꼽힐 정도로 국제적 지명도가 높은 인물이기도 하다.
장 교수는 이 연구소의 수석연구위원을 맡고 있다. 그는 최근 자신이 재직중인 고대에 기업지배구조연구소를 설립, 소장직을 맡고 있기도 하다. 이 연구소 설립에는 국민은행의 김정태행장이 물질적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밖에 운영위원회 위원장은 연대 국제학과 대학원의 김준기 교수, 법제도연구실장은 서울지방변호사회의 김선웅 변호사, 기업정보실장은 이은정 공인회계사 등이 맡고 있다.이와 함께 김상조 교수, 김현수 교수, 김진욱 변호사, 김석연 변호사, 고태관 변호사, 박응조 공인회계사 등이 운영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각계 맹장들이 다 모인 셈이다.
***"3조원을 맡아달라"**
이 연구소가 설립되기까지에는 한가지 비화가 숨겨져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몇해전 일이다. 장하성 교수가 유럽에 갔다. 이때 북유럽 한 국가의 연기금관계자와 만났다. 그런데 이 관계자가 "한국에 투자할 수 있는 연기금이 3조원 가량 있는데 이 운용을 참여연대가 맡아줄 수 없겠냐"는 예기치 못한 제안을 했다. "다른 한국계 펀드매니저는 믿을 수 없으나 장 교수와 참여연대는 믿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장교수는 그러나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같은 거액을 운용할 수 있는 전문능력도 없었고, 이 기금의 운용을 맡을 경우 야기될 논란도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 장교수는 외국계 투자가들이 얼마나 '믿을 만한 정보'에 굶주려 있는가를 절감할 수 있었다. 아울러 이같이 믿을 만한 정보를 생산해야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에 실천적으로 기여할 수 있음도 절감했다.
이때부터 장 교수 등은 기업지배구조를 연구할 전문집단 출범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몇년간의 논의와 준비 끝에 마침내 지난해 11월 연구소가 설립되기에 이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처럼 이 연구소의 뿌리는 시민운동이다. 그러나 이 연구소는 시민운동단체가 아니다. 유료로 정보를 제공하고, 받은 돈으로 연구소를 꾸려나가는 비즈니스 기업의 성격도 띠고 있다. 그러나 이 연구소가 한국 경제계에 던지는 압력은 시민단체 이상이다. 앞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이 연구소가 던지는 압력은 한층 커질 것이다.
새로운 차원의 시민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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