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5년만에 적자예산을 편성했다.
조지 W.부시 대통령은 지난 1일 연두연설에서 "올해 경기부양을 위해 약간의 예산적자 편성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테러와의 전쟁을 계속하고 에너지 개발을 하기 위해선 걷는 세금보다 많은 지출을 해야겠다는 것이다.
부시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인 군수산업체와 에너지업체의 이해관계를 위해 '재정적자'를 선택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문제는 그 이유가 어떠했듯, 미국이 또다시 '재정적자국'이 된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그동안 신경제에 힘입어 지난 98년 30년만에 처음으로 재정흑자를 달성했다. 그후 지난해의 2천1백71억달러를 포함해 4년 연속 흑자를 기록, '쌍둥이 적자(무역과 재정적자)국'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부시 정부는 2002 회계연도(2001년 10월-2002년 9월)에 1천60억달러의 적자예산을 편성했다. 2003 회계연도에도 8백억달러의 적자예산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미국 재정적자, 세계경제 회복의 최대 불안요인**
미국의 재정이 적자가 된다는 것은 '세계적 문제'다. 예산조달을 위해 국채(재무부 채권) 물량이 증가하게 되면 미국의 장기금리는 물론 국제 장기금리가 상승, 세계경제 회복에 치명적 역작용을 하게 된다.
10년물 미국채 금리는 적자예산편성 사실이 알려지면서 연 4.92%에서 5.04%로 올라갈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했다.
미국채금리가 올라가면 회사채금리와 주택담보 대출금리도 상승, 기업과 가계의 금융부담이 늘어난다. 이와 함께 국제 장기금리도 높아져 세계 각국 정부와 기업들의 자본조달비용도 불어난다. 국제 장기금리의 기준이 미국채금리인 까닭이다.
세계경제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장기금리가 급등하면 경기회복세가 주춤해질 수 있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도 최신호에서 미국 경제의 회복세를 낙관하는 일부 전망에 찬물을 끼얹는 분석기사를 내놓았다. 미국의 재정적자가 세계경제 회복에 암적 존재로 작용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앞으로 미국 경제의 회복속도가 그다지 빠르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미국의 기업과 가계가 빚더미에 올라 앉아 있다는 것이 가장 주요한 근거다.
1990년대 중반까지 지난 40년간 미국의 민간부문 순저축 규모는 평균 국내총생산(GDP)의 2.5%였다. 이것이 2000년에는 GDP의 마이너스 6%로 떨어졌다. 2001년 3분기에는 기업들이 경비절감에 나서 마이너스 폭이 2.5%로 줄었지만 4분기에는 소비자 대출이 급증하면서 다시 증가하고 있다.
반면 미국 가계의 부채는 지난 91년 가처분소득의 90%선에서 지난해 1백5%로 높아졌다.
***미국 불경기 근원은 역사상 유례없는 '금융거품'**
이코노미스트지는 “미국 불경기의 근본 원인은 이처럼 역사상 유례없는 금융거품"이라고 진단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도 미국의 잠재적인 경제위기가 금융거품 붕괴에서 초래될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흥청망청 살다가 불경기가 찾아온만큼 불경기가 곧 끝나고 다시 빠른 성장을 하길 기대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희망사항이라는 것.
그동안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늘어나는 빚과 그 수준이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라고 주장하는 낙관론자들은 그 근거로 두가지를 내세우고 있다.
첫 번째, 미국 정부가 흑자를 유지하고 있으며 공공부채를 갚아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정이 다시 적자로 돌아선 지금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다.
두 번째, 1990년대 주식시장과 부동산 경기가 좋았던 덕분에 가계 빚이 상쇄되고도 남는다는 것이다.
지난 2년간 주가가 떨어졌지만 아직도 미국 가계 빚은 자산대비 비중이 1990년대보다도 작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산 소유주와 채무자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 부채는 정해진 액수이지만 주식과 부동산의 가격은 변동적이라는 점에서 이또한 위험한 발상이다.
오히려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빚을 갚기 위해 주식과 부동산을 처분한다면 가격이 폭락할 것이다.
***원리금 상환부담, 소득의 14%**
이코노미스트지는 위험한 수준의 부채를 가늠하는 잣대로 원리금 상환비율을 거론한다.
저금리에도 불구하고 미국 가계의 원리금 상환부담은 소득의 14%에 이른다. 이는 1990~91년 불경기 때보다 높다.
미국 기업들의 재무구조도 상당히 위태롭다. 유동성 자산 대비 단기채무 비율과 수익대비 부채비율이 1990년대보다 높다. 기업들은 이자를 갚느라 수익을 다 까먹고 있으면서도 더 많은 자금을 끌어쓰고 있다.
지난해는 1930년대 이후 기업의 수익률이 사상 최저였다. 경기가 회복된다고 하더라도 수익률이 두자리 숫자가 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장기적으로 볼 때 수익은 연 5~6%로 예상되는 명목 GDP 증가율을 넘어설 수 없다.
가계소득도 실업률이 증가하고 임금이 동결되면서 예상보다 상승폭이 작을 것으로 전망된다. 골드먼 삭스는 지난 4분기에 노동자의 근로소득이 줄어들었으며 올 1분기에는 더 적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90%가 넘는 미국 기업들이 수익분배, 보너스, 스톡옵션 등 다양한 보상책을 제공하고 있지만 올해는 수익감소로 급격히 축소될 것으로 보인다.
경기가 좋을 때의 빚은 불경기 때 크게 클로즈업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용매출은 엄청난 거품을 유지하고 있다. 할인공세와 자동차 무이자 대출에 힘입어 2001년 4분기 소비자 지출은 연4% 이상 늘었다.
1990년대 미국의 가계와 기업들은 수입에 비해 유례없이 많은 빚을 졌다. 1990년대말 미국 기업들의 자금사용은 주로 자사주 매입이나 과잉투자로 소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빚은 늘어가고 있다.
***지금 미국의 경기회복은 '반짝 경기'**
왜 이렇게 미국사람들은 빚을 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일까.
이코노미스트지는 “돈값이 싸다는 착각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미국과 영국의 금리는 40년래 최저 수준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실질금리다. 과거 불경기때보다 현재 미국의 금리는 더 높은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율이 낮고 부채비용이 낮으며 금리가 낮다는 이유로 과거의 불경기 때와는 달리 미국의 가계부채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과소비가 단기적으로는 불경기의 골을 완화시켜줄 지 모르지만 나중에 문제는 더욱 크게 된다.
선진국 경제에서 부채가 많다고 아르헨티나처럼 전면적인 금융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 대신 성장을 저해하고 불경기의 골을 깊게 할 수 있다.
영국, 캐나다, 스웨덴 등 1980년대말 민간부채가 사상 최대로 늘어난 나라들이 1990년대초 극심한 불경기 또는 장기간의 경기침체를 겪은 것이 좋은 예다.
가계와 기업의 재무상태가 정상화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시간이 지나면서 투자와 소비지출이 크게 줄어들 것이다. 빚을 줄이려는 압박감에서 저축을 늘리기 때문이다.
신용매출과 부동산가격이 동시에 급격히 오른다는 것은 '반짝 경기'의 명백한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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