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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처조카의 '權不五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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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대통령 처조카의 '權不五年'

이형택 주위에 몰려든 각계 권력층들

그렇게 말이 많던 김대중대통령의 처조카 이형택 전 예금보험공사 전무(60)가 마침내 법망에 걸려들었다.
이씨의 등장은 김대통령의 친인척까지도 게이트에 연루됐다는 점에서 가뜩이나 심한 김대통령의 레임덕(권력누수)에 치명타를 가하는 결정적 악재로 작용할 전망이다.

그러나 이씨의 몰락은 이미 오래전 예견된 것이었다.
김대중 정부 출범이후 그의 주변에는 권력 고위층과 연을 맺으려는 인사들이 불나방처럼 모여들었고, 이씨는 이 과정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권력화'했기 때문이다.

이씨의 허망한 '권불오년(權不五年)'을 추적한다.

***DJ 야당시절에는 DJ의 처조카라는 사실때문에 불이익을 보기도**

이용호 게이트를 조사중인 차정일 특검팀은 21일 이씨가 삼애인더스트리 주가조작에 이용된 전남 진도 앞바다 보물 발굴사업을 이용호 G&G그룹 회장에게 소개해주고, 보물 발굴사업 이득의 15%를 받기로 한 협정서를 공개했다. 이형택씨는 그 대가로 국정원 등에 보물 발굴사업 지원을 요청한 혐의도 받고 있다.

이씨는 이번 협정서 발견으로 구속이 확실시되고 있다.
그는 지난해 9월27일 국정감사에 나와 "전주(錢主)를 찾는 보물발굴업자들에게 이용호를 소개해준 일은 있지만 보물 인양 사업과 관련해 이득을 취한 일은 없다"고 위증을 했기 때문이다. 이씨의 위증은 국회증언감정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명백한 구속사항이다.
특검팀에서는 이씨의 구속을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이씨 구속은 그가 김대통령 부인인 이희호여사의 오라버니 아들, 즉 김대통령의 처조카라는 점에서 정치적 파장이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김대통령이 주변 친인척 관리에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김대통령의 친인척 문제는 지난 99년 옷로비 사건을 시작으로 그동안 각종 게이트가 터질 때마다 단골메뉴처럼 거론됐다. 그러나 실체가 드러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앞으로 김대통령이 안게될 정치적 부담은 대단히 심각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그러나 이씨의 몰락은 불행하게도 이미 97년말 김대통령이 대통령 당선자가 되는 순간부터 내재된 것이었다.

97년까지만 해도 이씨는 일개 평범한 은행원에 불과했다.
한국외국어대학을 졸업한 뒤 군대를 다녀와 그가 은행에 몸을 담은 것은 지난 69년의 일로, 상업은행에 입행했다. 그후 74년에 서울신탁은행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89년 동화은행이 만들어지면서 창립멤버로 합류했다.

동화은행 시절, 그는 'DJ의 처조카'라는 사실때문에 적잖은 불이익을 본 것으로 알려진다.
두 곳의 지점장 생활을 하기는 했으나 모두가 '변두리 지점'이었다. 96년 본점으로 들어와 총무팀장을 거쳐 영업부장을 맡기는 했으나, 동료들보다 뒤처진 인사여서 "임원은 못되고 금명간 퇴진할 것이라는 게 중론이었다"고 당시 그와 함께 근무했던 동화은행 관계자는 전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그는 겸손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주위에서 기억되고 있다.

동화은행 관계자는 "당시 은행에서는 이씨가 능력에 비해 김대중씨 처조카라는 사실때문에 불이익을 보고 있다는 평가가 많았다"고 전한다.

***이씨 혼자서 반년사이에 1조원 수신고 올려**

그러던 중 그의 운명에 일대 전환점이 왔다.
김대중 대통령후보가 97년말 대선에서 당선된 것이다.

DJ정권의 출현은 하루아침에 이씨를 '미운오리새끼'에서 '백조'로 변화시켰다.

우선 은행내 위상이 크게 달라졌다.
이씨는 김대중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순간 영업1본부장으로 급작스레 승진됐고, 다음해에는 이사대우로 올라섰다. 그가 대통령 처조카라는 사실을 의식한 이재진 동화은행장등의 배려에 따른 것이었다. 화려한 변신이었다.

은행밖에서 그를 대하는 태도도 급변했다.
금융계를 비롯한 국영기업체 등의 기관장들이 그의 주변에 쇄도했다. 당시는 구조조정의 칼날이 시퍼렇던 시절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선 권력의 줄을 잡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던 시절이다.
당연히 이형택씨는 집중적인 로비대상이 됐다.

다음은 98년 6월29일 동화은행이 강제퇴출된 뒤 인수업무를 위해 그의 방을 정리했던 신한은행 H씨의 증언이다.

"동화은행은 퇴출되는 날까지 자신들이 퇴출될 줄 몰라 임직원들이 전혀 방 정리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형택씨 방을 들어가 자료를 정리하던 중 우연히 이씨 책상위에 놓여있는 메모 다이어리를 보게 됐다. 만약 은행 퇴출을 미리 알았다면 당연히 치웠을 물건이었으나, 퇴출 사실을 몰랐기에 그대로 있었다.

호기심에 98년 1월치부터 한장씩 넘겨보다가 깜짝 놀랐다.
우리나라 금융권은 말할 것도 없고 각종 국영기업체 등 내로라하는 실력자들과의 점심, 저녁 약속 사실이 빼곡이 기록돼 있었기 때문이다.
DJ정부 출범후 이씨 주변에 얼마나 많은 권력층들이 모여들었는가를 보여주는 자료였다."

이씨 주위에 몰려든 이들이 어떤 로비를 펼쳤는지는 알 수 없다.
단하나 분명한 사실은 이때부터 이씨의 영업실적이 급신장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동화은행은 퇴출이 유력시되던 대표적 부실은행이었다. 돈을 맡기기를 서로 피했다. 은행의 수신실적이 급속히 악화됐다.
그러나 단한명 이형택씨만은 달랐다. 그는 98년 6월29일 동화은행이 퇴출될 때까지 혼자 힘으로 1조원이상의 수신 실적을 기록, 동화은행 랭킹 1위를 차지했다. 동화은행에 돈을 맡긴 이들은 대부분 공기업이었다.

***이희호 여사 만나 퇴출방어 로비를 벌이기도**

이씨는 동화은행 임원이었던 만큼 동화은행 퇴출을 막기 위해 적극 나서기도 했다.

다음은 동화은행 고위관계자의 증언이다.

"98년 6월말 동화은행이 퇴출은행 명단에 들어갔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재진 행장을 비롯한 직원들의 불안감이 극에 달했다. 당연히 이형택 이사에게 '힘을 써달라'는 애원이 쇄도했다.

날자도 정확히 기억한다. 동화은행이 퇴출되기 전날인 6월26일 이형택 이사가 청와대에 들어갔다.
그리고 나와서 이재진 행장을 비롯한 임원들에게 '안심하십시오. 우리는 이번에 퇴출 명단에서 확실히 빠집니다'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이희호 여사를 만나 확실한 언질을 받고 왔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환호성을 올렸다. 이형택 이사에게 모두가 고맙다고 했다.

다음날인 6월27일은 토요일이었다. 이날 퇴출은행 명단이 발표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다른 퇴출은행들은 직원들이 은행문을 봉쇄하는 등 비상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은행만은 이형택 이사의 말이 있었기에, 모두가 즐거운 마음으로 오후에 퇴근을 했다.
그런데 오후에 신한은행이 밀고 들어와 은행을 인수했다.
모두가 멍해졌다. 이형택 이사를 비난하는 소리가 높았다.
나중에 알아보니 김대중대통령이 이헌재 금감위원장의 보고를 받고 최종결단을 내렸다 했다. 이형택 이사의 로비는 실패한 셈이다."

이씨는 그후 몇달간 조용히 지내다가 99년 예금보험공사 전무로 자리를 옮겨갔다.
이 또한 권력층의 배려에 따른 것이었다. 이씨는 그후 예보 사장 후보로 여러 차례 거명되기도 했다.
이씨의 예보 취업 소식을 들은 동화은행 퇴출 직원들은 속된 말로 이를 갈았다. 혼자만 그럴 수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사고가 날 것이라는 악담도 덧붙였다. 그런 식으로 대통령 처조카라는 사실을 앞세워 승승장구하다가는 언젠가는 사고를 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사고를 냈다.

이씨의 몰락은 이미 오래전 예견된 것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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