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등 아시아의 자본주의 경제를 ‘정실 자본주의’(crony capitalism)이라고 비웃었던 ‘자본주의 모델국가’ 미국 내부에서 엔론 사태를 계기로 미국의 자본주의도 ‘정실 자본주의’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폴 크루그먼 교수는 뉴욕 타임스 15일자에 실린 칼럼을 통해 “부시 행정부가 엔론 사태를 일개 회사의 문제로 몰아가고 있지만 이는 미국 정치경제체제의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미국에서도 돈이 정치를 오염시키는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다는 견해를 보였다. 그는 또 최근 몇 달 동안 미국의 정경유착이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를 파헤친 보도는 정치기자들이 아니라 경제분야 기자들이라고 지적했다.
최근 칼라일 그룹이 파산에 직면한 방위업체들을 헐값에 인수한 뒤 정부의 신규사업을 따내 주가가 오르면 이를 되파는 수법으로 돈을 벌고 있으며, 이 그룹을 위해 조지 부시 전대통령이 일하고 있다고 폭로한 것은 미국의 경제잡지 레드 허링이었으며, “몇몇 사업가들이 부시와 행정부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해 그들의 입맛에 맞도록 정책을 좌지우지하고 있다”고 경고한 것도 CBS마켓워치의 주필이라는 것.
크루그먼 교수는 부시 행정부가 엔론이 파산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지만 엔론과 접촉했다는 사실에 대해 왜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진 뒤 이는 부시 행정부가 엔론 사태로 인해 정실 자본주의 추악한 실체가 드러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미국 자본주의의 실패**
비즈니스 위크도 최근 “엔론의 파산이 신속하게 이뤄진 것이 결코 미국 자본주의의 건전성을 뜻하는 게 아니라”는 요지로 하워드 글레크먼의 칼럼을 게재했다.
글레크먼은 “지난 1월 6일 백악관 경제보좌관 로렌스 린지가 엔론의 파산은 미국 자본주의의 참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는 소식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엔론의 막강한 정치 커넥션에도 불구하고 파산한 것은 부시 행정부가 손을 쓰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빨리 무너져 미쳐 손을 쓸 틈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글레크먼은 “자본주의는 공정한 룰이 지배할 때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투명성이다. 모든 주주가 다른 주주가 알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한다”면서 “엔론과 회계감사를 맡은 앤더슨은 무려 4년간이나 시장 경제의 기본 규칙을 무시했다는 점에서 이는 미국 자본주의의 실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자본주의 체제가 제대로 작동했다면 엔론은 아직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비극적”이라는 글레크먼은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
"앤더슨이 회계감사를 충실히 하고 금융거래에서 발견된 문제점에 대해 조치를 취했다면 엔론이 빚더미에 올라앉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외이사, 특히 감사 위원회에 속한 사외이사들이 주주를 대표해 엔론의 경영진에게 적절한 경고를 했다면 엔론이 파산할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행정부가 엔론에게도 다른 상품 거래에 마찬가지의 규칙을 지키도록 했다면 엔론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부시 행정부의 정경유착 의혹을 뒷받침하는 자료도 최근 공개되었다. 공직자들의 성실성 등을 감시하는 미국의 시민단체 공직청렴센터(CPI)는 지난 15일 부시행정부의 고위 공직자 1백명의 개인 재산자료를 6개월동안 분석한 결과를 15일 내놓았다.
***부시 행정부 고위공직자 재산, 클린턴 행정부의 10배**
이 자료에 따르면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딕 체니 부통령, 각 부 장관 등 부시행정부내 최고위 관리 15명의 평균 재산액은 9백90만달러(1백28억7천만원)∼2천8백90만달러(3백75억7천만원)으로 나타났다. 미 공직자는 재산을 확정액이 아닌 범위액으로 신고하도록 돼 있다.
이들 15명 재산의 총합은 1억4천8백만달러(1천9백24억원)에서 4억3천4백만달러(5천6백42억원)에 이른다. 이는 빌 클린턴 전 행정부 당시 같은 직책에 있던 15명 재산 합계(1천3백만달러∼4천3백만달러)의 10배 규모다.
CPI는 이들 고위 관료들중 상당수가 재계 및 로비스트 출신이며 이들 대부분이 에너지 업계 및 광산업계 등에 투자하고 있어 공직과 개인적 이해관계가 충돌할 우려가 높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현 행정부의 고위 공직자 1백명중 34명이 기업 출신이며 16명은 로비스트, 또는 변호사 출신이다.
특히 부시 대통령, 체니 부통령, 도널드 에번스 상무부 장관, 캐슬린 쿠퍼 상무부차관 등 고위 관료들 중 상당수가 에너지 업계 출신이다. 또 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투자 대상도 에너지 기업으로 엔론을 포함, 모두 2백21개 에너지 기업에 최대 1억4천4백60만달러를 투자한 것으로 분석됐다. 광산업(32개 기업, 1억2백만달러), 금융업계(3백67개 기업, 8천2백80만달러)도 이들의 주요 투자대상이었다.
고위 공직자 1백명 중 22명은 자신들의 부처를 로비 대상으로 삼는 33개 기업에 상당한 액수의 주식을 갖고 있었으며, 20명은 자신들의 전직 업체와 이해관계가 걸린 부처에서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차관급 이상 15명 엔론 주식 소유**
CPI의 자료에 따르면 부시 행정부의 차관급 이상 고위 관리 가운데 최소한 15명이 지난해 엔론 주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 명단에 따르면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과 칼 로브 백악관 정치특보, 로버트 죌릭 무역대표부 대표 등 장관급 3명과 샬럿 비어스(국무), 피터 피셔(재무), 앨도너스 그랜트(상무), 토머스 도어(농무) 등 차관급 13명이 엔론 주식을 적게는 1만5천달러에서 많게는 25만달러 상당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명단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토머스 화이트 육군장관의 경우 장관 취임 전에 엔론사의 부회장을 지내 최소 5천만달러에서 최대 1억달러 상당의 엔론 주식을 보유했었다.
부시 행정부 관료 중 엔론 주식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 것으로 칼 로브 백악관 정치특보는 10만 주의 인텔 주식을 갖고 있으면서 2001년 3월 인텔 경영진과 로비스트들을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현재 엔론의 부실회계감사건에 대해 앤더슨을 조사하고 있는 미국증권거래위원회 위원장 하비 피트도 위원장으로 인준되기 전에 앤더슨의 고문변호사로 일했다. 피트는 런던의 로이드 보험사를 위해 보험시장 재편을 위해 노력한 적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회계법인을 감독하는 자리에 있는 그가 엔론 사태가 터진 직후 "회계전문가들이 결코 썩지 않았다"고 회계법인을 비호하는 발언을 해 눈총을 사기도 했다.
부시의 장관급 각료 중 유일한 민주당 출신인 노먼 미네타 교통장관은 록히드 마틴사의 부회장으로 일했다.
부시 행정부의 최고 자산가는 새뮤얼 보드먼 상무부 부장관으로 주식 등의 평가액에 따라 4천9백만~1억6천4백만 달러로 알려졌다.
현재 부시 대통령은 자신과 레이의 유착설을 피해가기 위해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이에 대해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15일 “부시가 1994년 텍사스 주지사 선거에 나섰을 때 케네스 레이 엔론 회장이 경쟁상대인 앤 리처즈를 후원했다는 점을 들어 자신과 엔론과 무관함을 강조했지만, 레이는 부시에게 리처즈에게 준 후원금의 3배를 주었다는 점을 교묘하게 감추고 있다”고 폭로했다.
이미 레이는 아버지 부시가 재선에 나선 1992년 휴스턴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의 영접위원회 위원장이었다는 것. 당시 인베스터스 데일리지는 “레이가 엔론을 공화당의 자금줄로 활용하고 있다”고 보도할 지경이었다.
아버지 부시가 재선에 실패한 뒤 부시 일가는 아들 부시를 주지사에 당선하도록 방향을 바꾸고 레이는 이를 후원하는데 앞장섰다.
레이가 부시일가에 충성스러운 후원자 노릇을 하게 된 것은 엔론이 급성장하는데 아버지 부시 행정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인 것으로 LA타임즈는 보도했다.
1980년대 전력산업에 대한 규제완화조치에 힘입어 성장한 엔론은 기간시설들이 엔론으로부터 전력 공급을 받도록 강제한 1992년 에너지 법안이 통과됨에 따라 떼돈을 벌어들인 것이다.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레이는 1992년 대선을 일주일 앞둔 시점에 댈러스 모닝 뉴스에 “부시는 에너지 대통령”이라고 추켜세우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법적인 문제가 드러나지 않더라도 이미 부시 행정부의 정경유착 의혹은 사실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황에서 엔론사태는 ‘주식회사 미국’의 실패라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의식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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