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총재 주변에는 사람의 벽이 너무 두텁다.
이회창 대세론이 대선 때까지 그대로 가 이총재가 집권하게 된다면 TK(대구.경북)가 또다시 권력의 중심에서 배제될 가능성이 높다. 김영삼, 김대중 정부이래 벌써 세 번째다. 15년동안 권력의 중심부에서 밀려나는 것이다.
반면에 이인제 주변은 아직 사람의 벽이 두텁지 않고 포용력이 읽힌다.
한 예를 들어보자. 이회창 총재는 3김시대를 심판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인제는 3김시대를 ‘역사’라고 했다. 이총재가 평가를 유보하고 있는 박정희 시대에 대해서도 같은 접근을 하고 있다. 좋고 싫든 받아들여야 하는, 인정해야 하는 대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요즘 자연스레 이인제 측과 연락이 잦은 편이다.”
얼마 전 만난 모 재벌그룹 고위임원의 말이다.
그는 정보수집.분석 업무를 책임맡고 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정치권과의 접촉이 많고, 자신도 현실정치와의 연계를 깊숙이 고민하는 편이다.
그의 이같은 발언은 일상의 통념을 깨는 상당히 의외적인 발언이었다. 그는 합리적이긴 하나 보수성향이 뚜렷한 인사로, 일반적 정치분류 기준으로 보면 이회창 지지그룹에 속해야 마땅한 인사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나라 주류그룹의 정치성향을 좌우하는 데 결정적인 출신지역별로 보면 그는 정통 TK 출신으로, ‘TK=이회창 지지’라는 공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보인다.
그동안 TK에게 이인제라는 정치인은 지난 97년 대통령선거 당시 끝까지 출마를 강행, 영남표를 분산시킴으로써 DJ(김대중)세력이라는 호남권의 집권을 가능케 했던 ‘배신자’로 낙인찍혀 왔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TK=이회창 지지' 공식의 동요**
하지만 그의 말에서도 읽을 수 있듯, ‘TK=이회창 지지’라는 공식이 최근 여기저기서 균열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대표적 예가 한나라당의 박근혜 부총재 주변에 모여드는 TK인사들의 행진이다. 박부총재는 지난 4일 남덕우 전 국무총리를 후원회장으로 영입했다. 당내 대선후보 경선을 앞두고 본격적인 준비 작업에 착수한 것이다.
남덕우 전총리는 70년대 청와대 경제특보와 경제부총리를 지낸 골수 ‘박정희 맨’이다. 때문에 그가 박정희 전대통령의 딸인 박부총재의 대권 도전을 돕기로 한 것은 인정상 자연스런 일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정가는 남 전총리의 행보를 그렇게 간단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아니다. 남 전총리가 비록 과거보다는 못하다고는 하나, 아직까지도 TK지역과 재계에서는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물인 탓이다.
정가에서는 남 전총리 행보의 뿌리를 ‘TK의 소외감’에서 찾는 시각이 많다. 따라서 그의 박부총재 지지는 ‘TK의 지분찾기’ 노력의 일환으로, 앞으로 한나라당내 대선후보 경선과정을 통해 TK의 지분과 영향력을 최대한 확보하려 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대체적 관측이다.
남 전총리에 이어 한나라당의 김만제 전 정책위의장도 박부총재 지지대열에 합류할 것으로 알려져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김만제 전의장은 지난달 22일 급작스레 정책위의장 직을 사퇴, 한나라당 지도부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인물이다. 그는 정책위의장 재직시 전교조를 ‘사회주의집단’이라 말해 구설수에 오르는 등 극보수적 행동으로, 이회창 총재 등으로부터 적잖은 견제도 받았으며 그의 사퇴도 이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영남과 보수를 홀대말라"**
김 전의장은 사퇴시 기자회견을 통해 한나라당의 ‘색깔’을 문제 삼았다.
“당내에 포퓰리스트(인기영합주의자)가 상당히 있다. 겉으로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한나라당의 보수정책보다는 현정권의 진보정책에 심정적으로 찬동하는 인사도 적지 않다. 이들이 여러 가지 명분을 대며 공격한다. 이총재 옆에도 있다.”
“영남과 보수는 다 우리 편이니, 이제 중부권과 20대 젊은 표까지 잡자며 너무 이를 의식하는 경향이 있다. 일단 방향이 정해지면 관철시켜야 한다. 중간에 인기를 좇아 좌고우면하면 안된다.”
요컨대 ‘영남과 보수’의 중요성을 간과한 채 중부권과 20대 젊은 표를 잡자고 왔다갔다 하는 당지도부와 더 이상 함께 일을 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이런 극보수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그가 박정희 시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박근혜 부총재 캠프에 합류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의 불만은 ‘TK 극보수’ 진영의 공통된 불만이기도 한 때문이다.
이밖에 오는 6월 지방선거를 앞둔 TK지역 지방자치단체장들의 불만과 불안감도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귀추가 주목된다.
현재 문희갑 대구시장과 이의근 경북도지사는 6월 선거 출마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다. 문제는 한나라당의 공천여부. 그러나 문시장과 이지사 모두 한나라당 현역의원들의 강한 도전에 직면해 있고, 이들 두사람에 대한 이회창 총재측의 신망 또한 그다지 두텁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공천과정이 상당히 시끄러울 것으로 전망된다.
문시장과 이지사는 자신들의 지역내 평판이 양호함에도 불구하고 공천 여부가 불투명한 대목에 강한 불만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들은 그 원인을 이회창 총재의 ‘측근정치’에서 찾고 있으며, 따라서 공천을 못받게 되면 무소속 출마를 단행해서라도 자신의 지분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TK지역의 균열은 아직 소수세력, 그러나?**
그러나 TK지역의 균열 조짐은 아직 ‘대세’를 이루지는 못하고 있다는 게 TK측 전언이다.
TK의 한 관계자는 “TK의 소외감이 상당히 뿌리 깊은 것은 사실이다”면서도 “그렇다고 해서 박근혜나 이인제에게서 대안을 찾고자 하는 움직임은 아직 소수”라고 전했다. 그는 “이회창 총재가 최선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나 그렇다고 해서 민주당이라는 호남정권의 후보가 정권을 재창출하도록 돕는 최악의 선택은 하지 않을 것”이라며 “TK지역은 최악의 선택 대신 차선의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민주당의 이인제 고문이나 한나라당의 박근혜 부총재 측은 TK지역 공략에 적잖은 기대를 걸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TK지역의 민심 향방이 차기대선의 최대변수가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특히 이인제 고문의 경우 4월 경선에서 민주당의 대통령후보가 되는 데 성공하면, 곧바로 TK공략에 나설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평소 ‘리틀 박정희’라고 불릴 정도로 여러 모로 고 박정희대통령과 비슷한 이미지와 카리스마를 창출하려 애써왔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3김의 지지를 얻는 데 이어, 자신의 ‘리틀 박정희’ 이미지를 앞세워 TK지역의 일부세력까지 흡입하는 데 성공한다면 대선에서 충분히 승리할 수 있을 것으로 자신하는 눈치다.
과연 TK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미지수다. 변수가 적지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러나 작금의 진행중인 상황이 여전히 ‘지역정치’라는 틀 안에서 작동하고 있으며, 그 중심축을 일반 유권자가 아닌 지역 주류세력들이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작금의 TK소외감은 본질적으로 기득권층의 소외감인 것이다.
이같은 전시대적 ‘지역정치 놀음’을 타파할 수 있을 것인지 여부는 어디까지나 TK유권자들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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