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낙엽이 질 때 겨울이 오는 줄 알고, 눈 속에서 움트는 싹 하나를 발견하고도 봄이 오는 줄 알아야 펀드매니저를 할 수 있다.
낙엽이 다 떨어진 다음에 ‘아 겨울이 왔구나’ 하거나, 푸른 초원이 형성된 다음에 ‘봄이구나’하고 둔하게 움직이다간 상투 잡고 장사 망치기 일쑤다.
때로는 숫자는 나쁘게 나오더라도 동물적 후각으로 흐름을 읽을 줄 알아야 하는데, 아직 국내 투자가들은 그런 훈련이 크게 부족해 보인다.”
한 외국계 펀드매니저의 말이다.
***외국인 따라 뒷북치기 여전**
요즘 금융시장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큰 장’이 서는가 싶기도 하고, ‘아직 때가 먼 것’ 같기도 하고 도통 종잡기가 힘들다. 하루에도 주가가 20~30포인트씩 널을 뛰니 더욱 그러하다. 개미들만 그런 게 아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크게 엇갈린다.
한 예로 미래에셋증권은 “아직 때가 아니다”는 입장이다. “각종 지수를 분석해본 결과 내년 상반기까지는 주가가 6백초반을 중심축으로 왔다갔다할 것이니 흥분 말라”는 게 이 증권사의 전망이다.
그러나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다. 연내에 8백선, 심지어는 내년중에 주가 1천선까지 내다보는 전문가들까지 있을 정도다.
국내 개인투자가 및 기관투자가들이 이렇게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외국인투자가들은 지난 두달 사이에만 30조원의 평가익을 볼 정도로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다.
펀드매니저는 실적으로 말하는 법이다. 결과가 이렇다 보니 모두가 외국인투자가 뒤통수만 멍하니 쳐다보거나, 헉헉대며 뒤따라가기 급급할 뿐이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니 한국개발연구원(KDI)이 7일 내년도 경제성장률을 한달전 예측치인 3.3%에서 3.6%로 높여잡는가 하면 LG연구소도 2.9%에서 3.5%로 상향조정하는 등 국내경제기관들이 앞다퉈 내년도 경제성장 전망을 높여잡고 있다. 신중하기로 소문난 전철환 한국은행총재도 내년도 성장률을 민간경제연구소들보다 높은 3.9%로 잡으며, 이례적으로 “더 이상 나빠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을 내놓기까지 했다.
지난달 13일 미국의 신용평가기관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가 느닷없이 우리나라 신용등급을 상향조정, 외국인투자가들이 본격적으로 매수물량을 늘이기 시작할 때만 해도 방향을 못잡고 헤매던 국내기관들이 뒤늦게나마 방향수정에 나선 느낌이다.
***외국인의 투자 바로미터는 미국경제의 부활 움직임**
외국인투자가들은 과연 어떤 바로미터를 보고 투자하는가.
국내 투자기관이 모르는 ‘그들만의 정보 네트워크’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들 눈에는 보이는 것을 국내 투자기관들만 못 보는 것인가.
아마도 원인은 복합적일 것이다. 그러나 단하나 분명한 것은 그들은 트랜드(추세)를 정확히 읽을 줄 안다는 사실이다.
외국계들이 지금 예의주시하고 있는 투자포인트, 즉 트랜드는 무엇인가. 한국경제의 향방? 천만의 말씀이다. 그들이 비록 한국경제가 아시아 다른나라 경제에 비해 견조하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한국물에 투자하고 있다 하나, 그들이 가장 관심 갖고 보는 트랜드는 단연 미국경제의 향방이다.
미국경제는 그동안 ‘잿빛’ 일색이었다.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올 들어서만 10차례나 금리를 연속인하했으나, 예기치 못한 9.11테러 발발과 아프간 전쟁 시작으로 안개는 한층 짙어져 도통 앞을 내다보기 힘들었다. 월가의 내로라하는 애널리스트들조차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다며 ‘비관론’에 젖어 들어갔다. 기업들의 영업실적과 투자전망 등 ‘생산 부문’도 나날이 악화돼 갔다.
그러나 FRB가 열 차례나 내리 찍어내린 초저금리의 약발이 마침내 지난 10월부터 ‘소비 부문’에서 작동하기 시작했다.
우선 자동차가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한국,일본 등 아시아자동차 메이커들에게 내수시장의 30%를 내주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자, 제너럴 모터스(GM)를 비롯한 미국의 자동차 빅3가 12개월 무이자 할부판매를 개시해 자동차소비를 폭발적으로 끌어올렸다. FRB가 기준금리를 2%라는 지난 40년간 최저수준으로 끌어내렸기에 가능한 판매전술이었다. 그 결과 9월에 8.1% 감소를 기록했던 승용차 판매가 10월에는 4.6% 증가로 반전됐다. 상용차 판매는 더욱 늘어 9월의 16.3% 감소에서 10월에는 38.9% 증가로 급증했다.
주택 구입 붐도 일어났다. 미국은 월급생활자가 매달 자신의 월급중 15%만 내면 우선적으로 집을 구입할 수 있는 모기지론이 발달한 사회이다. 금리가 바닥까지 내리니 월급생활자들이 앞다퉈 집을 사기 시작했다.
***전쟁경제도 일정부문 미경제 회복에 기여**
비내구성 소비재도 팔리기 시작했다. 한 예로 컴퓨터 소비가 올 들어 최초로 31.5%의 증가세로 반전됐다. 소비자들은 이들 제품을 구입하며 신용카드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신용카드는 일종의 외상구매다. 장래가 불확실하다면 감히 할 수 없는 소비행위다. 9월까지만 해도 격감하던 신용카드 사용액이 10월 들어 급증세로 반전돼, 10월 한달동안에만 소비자 신용대출이 70억달러에 달했다. 이런 소비 증가는 그후에도 계속돼, 12월 소비자신뢰도도 85.8로 크게 높아졌다.
그 결과 군수부문을 제외한 민수부문은 9월의 마이너스 9.9% 성장에서 10월에 6.1% 플러스 성장으로 반전됐다. 이는 지난 1월이래 최초의 플러스 성장이자, 지난해 6월이래 가장 높은 성장률이었다.
아프간 전쟁 발발에 따른 군수부문의 매출증가도 경기회복에 큰 도움이 됐다. 9.11테러가 발발했던 9월에 전월대비 6.8% 마이너스성장을 기록했던 전투기를 포함한 미군수산업이 10월 들어 아프간 전쟁이 본격화하면서 3.3% 플러스 성장으로 돌아섰다.
아직도 미국의 실업률은 높은 편이다. 앞으로 추가해고를 하겠다고 선언하는 기업들도 적잖다. 미국내에서는 엔론이라는 사상최대 규모의 기업파산 사태가 발생했는가 하면, 미국의 뒷뜰인 남미에서는 아르헨티나가 파산직전의 위기에 몰려있기도 하다. 일본과 유럽 경제의 회복 여부도 아직 불투명하다. 곳곳에 지뢰가 널려있는 것이다. 때문에 FRB는 “아직 경기회복을 말하기란 이르다”는 신중한 입장이다.
***경제는 '심리'다**
그러나 '살아있는 생명체'인 경제는 ‘실물’인 동시에 ‘심리’다.
어떤 때는 실물경제의 정도보다 심리가 과민하게 반응해 실물경제를 악순환 고리에 빠트리기도 한다. 자그마한 돌맹이 하나만 물에 던져도 송사리떼가 쏜살같이 도망치는 식이다.
그러나 어떤 때는 정반대로 실물경제보다 심리가 앞서 반응해 실물경제 회복을 앞당기는 순기능을 하기도 한다.
지금 미국경제는 ‘소비자의 심리’가 경기회복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FRB의 의도대로 경제가 방향을 잡기 시작한 셈이다. 아구스 리서치사의 수석경제학자 리처드 야마론같은 경우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내년 1.4분기에 미국경제가 회복국면에 들어설 것”이라는 과감한 전망을 내놓기까지 할 정도로 지금 미국은 들뜨기 시작했다.
요즘 한국에서 외국계가 주식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국내는 긴가민가 하는 분위기다. 아직 국내 경제상황도 곳곳에 암초가 널려있다. 내년의 불확실한 정치상황 등을 고려해 아직 기업들은 투자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은 ‘소비 부문의 심리’다. 소비자들의 심리를 긍정적 방향으로 돌리기 위한 경제주체들의 노력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러기 위해선 '약간의 거품(Mini-Bubble)'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미래의 수익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져야 비로소 돈이 돌기 시작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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