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의 경쟁적 중국행 러시로 일본, 대만, 싱가포르, 홍콩 등 중국 주변국의 ‘산업공동화(空洞化)’가 자국경제 기반 붕괴를 우려할 만큼 가파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동안 영세 중소기업 중심으로 중국진출을 해온 까닭에 상대적으로 산업공동화 위기감이 덜 했던 우리나라도 최근 들어서는 대기업들이 앞다퉈 중국행을 선언하고 나섬으로써 산업공동화 회오리에 말려들 가능성이 급속히 높아진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일본의 중국 생산거점 숫자가 북미 생산거점 앞질러**
중국의 급부상에 따른 산업공동화 위기감이 가장 심한 나라는 아시아 제1 경제대국인 일본이다.
일본의 국제협력은행이 19일 발표한 ‘2001년도 해외직접투자’ 앙케이트 조사결과에 따르면, 일본의 제조업들이 중국에 세운 해외생산거점 숫자가 사상최초로 미국 등 북미지역의 생산거점 숫자를 앞질렀다.
일본기업의 해외거점 숫자는 90년대 상반기까지는 압도적으로 북미지역이 많았으나 하반기부터 중국으로의 진출속도가 빨라져, 지난해에는 북미지역과 중국지역의 거점이 같은 수가 됐다. 그러다가 이번 조사에서 중국이 1백개사 이상 늘어나 7백72개사가 된 반면, 북미지역은 6백92개사에 그쳐 사상최초로 중국지역이 북미지역을 앞질렀다.
또한 일본기업들이 향후 3년간 투자하고자 하는 지역에서도 중국이 76%를 차지, 앞으로 중국지역으로의 진출기업 숫자가 계속 늘어날 것임을 시사했다. 이런 식의 추세가 계속될 경우 현재 전체 총생산고 가운데 23%를 차지하고 있는 해외생산고가 오는 2004년에는 30%대에 달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같은 일본기업들의 중국진출 러시는 곧바로 일본경제에 치명적 파장을 미칠 전망이다.
일본 경제산업상의 자문기구인 산업구조심의회가 19일 공개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의 가공스런 성장세에 짓눌려 일본의 산업공동화가 앞으로 빠른 속도로 진행될 것”이라며 “이런 상황을 방치할 경우 오는 2006~2010년의 일본 실질경제성장률은 0.5%에 그치고 실업률은 5%대까지 높아질 것”으로 내다봤다. 이와 함께 일본의 무역흑자 폭도 급속히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다.
산업구조심의회는 넉달 전인 지난 7월에 낸 보고서에서는 2006~2010년의 일본경제성장률을 3%로 낙관했었다. 그러나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계기로 일본 대기업 가운데 절반이상이 3년이내에 생산라인을 중국으로 옮길 계획을 세우는 등 일본기업들의 중국행 러시가 본격화하면서 종전의 전망을 대폭 수정했다.
***"중국쇼크로 아시아 제2의 위기 도래할 것"**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 중국의 급부상 이전에 ‘아시아의 용’들로 행세해온 아시아 중진국들과 동남아국가연합(ASEAN) 등 동남아 신흥국가들의 산업공동화 위기감도 급속히 높아지고 있다. 이들 국가의 공통점은 올 들어 성장률이 마이너스로 급락할 정도로 70년대 오일쇼크이래 가장 심각한 경제위기에 봉착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의 주력수출시장이던 미국 등의 경기침체에다가 ‘차이나 쇼크’라는 중국경제의 급신장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된 것이다.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은 자국 주력기업들의 중국행으로, 동남아국가연합은 그동안 자국에 진출해있던 다국적기업들의 중국행으로 산업공동화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도쿄시장 선거에까지 출마했던 일본의 대표적 경제평론가인 오마에 겐이치는 얼마 전 경제월간지 게이에이즈쿠(經營熟)에 기고한 글에서 ‘중국의 위협’을 경고하기도 했다.
그는 “아시아국가들이 과거 15년 이상에 걸쳐 건설했던 산업을 중국이 급속히 탈취해가고 있다”면서 “전자산업을 포함한 많은 분야에서 중국의 기업들은 기술혁신과 저임수출산업을 통해 싱가포르, 홍콩, 대만, 한국 기업을 위협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오마에는 “지난번 97년에 불어닥친 아시아 경제위기는 국제 금융자본가들에 의한 일시적 현상이었다”면서 “그러나 최근 중국의 급성장은 지난번 경제위기보다 훨씬 지독한 두번째 아시아 경제위기를 야기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이같은 차이나쇼크가 중국이외 아시아국가들의 산업공동화, 대규모 실업사태, 무역적자로 이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한국 대기업들도 "국내투자는 NO, 중국투자는 YES"**
이같은 오마에식의 시각은 자칫 서방국가들의 ‘황화론(黃禍論)’이 범하고 있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점에서 적잖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중국을 단순히 거대 저임생산기지로만 볼뿐, 거대 소비시장으로 보는 시각을 결여하고 있는 탓이다.
그러나 중국이라는 거대 소비시장을 돌파한 실력이 없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그럴 경우 중국에게 생산거점만 빼앗기면서 오마에 등이 우려하는대로 산업공동화라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런 위기구조에 노출되기란 결코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중국의 급신장에 따른 산업공동화 위기감이 상대적으로 우리나라에는 희미한 편이었다.
그동안 중국에 진출한 기업들이 대부분 사양업종으로 분류되던 영세형 중소기업들이었던 탓이다. 중국진출 국내기업들의 1개사당 평균 투자액이 30만달러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 상황이 급변하고 있다.
삼성, SK, LG, 현대기아자동차 등 굴지의 대기업을 비롯해 중견기업들이 잇따라 대규모 중국진출 프로젝트를 쏟아내기 시작한 탓이다.
한 예로 국내기업중 가장 많은 26억달러를 이미 중국에 투자한 삼성그룹의 경우 중국 수조우에 반도체 조립공장을 설립하는 등 중국진출을 가속화, 전자부문에서 오는 2005년까지 중국내 5대기업에 진출한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있다. LG화학은 현재 연간 22만t규모인 중국에서의 PVC 생산능력을 오는 2005년까지는 64만t으로 세배 가까이 늘리고 연산 15만t인 스티렌 생산능력을 2005년까지 30만t으로 늘려 중국최대 화공기업으로 키울 생각이다.
현대기아자동차는 내년말까지 중국에 3억달러를 투자, 현재 2만5천대에 불과한 자동차 생산능력을 30만대까지 확장시킬 계획이다. 포항제철은 중국합작기업에 1억달러를 투자해 현재 38만t인 생산능력을 78만t으로 늘릴 계획이다.
이밖에 중국내 라면 생산시설을 계속 늘려온 농심이나, 휴비스(삼양사와 SK케미컬 합작사).고합.효성.코오롱 등 주요 화학섬유업체들의 중국투자 강화계획도 최근 중국투자와 관련해 눈에 두드러지는 대목이다.
한마디로 요약해 요즘 국내 대기업들의 생각인즉 "국내투자는 NO, 중국투자는 YES"이다.
***"중국현지공장의 효율성이 국내보다 높다"**
요컨대 국내에서는 경기의 불투명성 등을 이유로 별다른 투자계획을 내놓지 않고 있는 대기업들이 중국에서는 대거 생산시설을 늘리는 투자계획을 추진중인 것이다. 이는 금명간 국내의 산업공동화를 예고하는 신호탄에 다름아니다.
경쟁력을 잃고 있는 기업은 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는 곳으로 이전하는 게 자본의 당연한 운동법칙이다. 그 대신 국내에서는 보다 고부가가치 경쟁력이 있는 산업이 발전돼야 이 땅에 사는 이들의 생존과 번영이 가능하다. 그러나 지금 과연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식의 산업발전, 산업구조혁명이 진행중인가.
삼성그룹의 한 관계자는 "중국현지 생산공장의 임금이 쌀뿐 아니라 작업효율성도 국내보다 10%이상 높다"고 말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우리는 아마도 금명간 '산업공동화'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가능성이 높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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