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초 쓰루(김학렬 당시 경제부총리)는 포항제철을 건설하고 죽었다. 그로 인해 10년뒤인 80년대 한국경제는 중화학공업화의 결실을 따먹으며 살 수 있었다.
80년대초 김재익 경제수석은 정보통신의 토대를 다지고 아웅산에서 죽었다. 그 결과 90년대 한국경제는 남보다 앞선 정보통신의 과실을 따먹으며 살아갈 수 있었다.
90년대 경제관료들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지난 10년간 댐 하나 지은 것이 없다. 기껏 남겼다는 것이 주가 억지부양을 위한 투신사 부실이었다. 그 결과 90년대말 우리 경제는 외환ㆍ금융위기를 맞았고 지금 이 순간 ‘앞으로 무얼 먹고 사나’를 걱정하고 있다.
2001년 지금 경제관료들은 무엇을 하고 있나. 10년후 우리 경제의 먹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밤을 하얗게 새우는 관료들이 과연 우리에게 있는가.”
***"왜 지금은 10년 대계를 그리는 경제관료가 없는가?"**
얼마 전 만난 S그룹 임원의 개탄이다.
그는 업무의 성격상 많은 경제관료들을 접한다 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목격되는 것은 일에 찌들은 ‘피곤함’과 발등의 불끄기 식의 ‘임시변통’뿐이라 했다. S그룹은 작금의 극심한 경기불황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국내기업들 가운데 가장 잘 나가는 그룹이다. S그룹도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앞으로 5년뒤 과연 무얼 먹고 살까”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한다. 그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우리 경제가 내부적으로 얼마나 취약한지를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는 ‘60년대 보릿고개’ 시대가 다시 도래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때처럼 먹거리가 떨어져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사는 일이야 없겠지만 대학교를 졸업한 자녀들이 일자리를 잡지 못해 빈둥거리다가 쪼그라드는 모습은 60년대 보릿고개 때와 뭐 다를 게 있겠느냐”는 게 그의 주장이다. 서울대학교 졸업생의 33%만이 취업이 될 정도로 요즘 구직난이 심각하다 하니, 공감이 가는 대목이다.
재정경제부 등 경제관료들도 “경제부총리나 장관의 업적은 재임 당시가 아닌 10년후에 나타나는 법”이라고 말한다. 이들 또한 과거 70~80년대와 달리 90년대이후 경제각료들이 ‘10년 대계(十年大計)’라는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는 점을 자인하고 있다.
현 정부는 출범후 ‘벤처 대국’이라는 10년 대계를 제시한 후 수조원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귀착점은 한탕주의식 ‘머니 게임’이었고, 벤처기업의 무더기 도산과 불황 장기화로 많은 젊은이들이 거리를 헤매고 있다. 속단하기란 아직 이른지 모르나, ‘벤처 대국’은 10년 대계가 못되었던 셈이다.
***'조루형 권력시스템'이 문제다**
왜 90년대이래 우리 사회에서 ‘10년 대계’가 사라진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내가 한 일은 아마 1백년후에나 사람들이 알아줄 걸”이라고 말하던 배포 큰 김학렬이나 김재익 같은 불세출의 경제각료가 그후 배출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90년대 들어 빠른 속도로 경제주도권이 정부에서 민간부문으로 넘어간 때문일 수도 있다. 경제운영 시스템이 중장기적 이익을 중시하던 게르만형에서 단기이익을 중시하는 앵글로색슨형으로 전환된 탓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경제관료는 보는 시각이 다르다.
경제정책 수립운영 총괄부처인 재정경제부의 한 중견관료는 그 핵심 원인을 ‘대통령 단임제’에서 찾고 있다. ‘단명(短命)한 정치권력 시스템’이 경제관료들로 하여금 10년 대계는커녕 5년 대계도 못 세우게 만드는 근원이라는 지적이다.
“90년대 이후 경제관료들이 변변한 10년 대계 하나 못세웠다는 비판을 100% 인정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모든 책임을 관료들에게 돌리는 시각에는 반대한다.
관료들은 독자적으로 힘을 낼 수 없는 존재다. 통치권자의 절대적 지원없이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70년대초 김학렬 부총리가 포항제철 등 중화학 기간산업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적극적 지원사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80년대초 김재익 경제수석이 공정거래법을 만들어 재벌경제를 견제하고 정보통신 방식을 기계식에서 전자식으로 바꾸며 오늘날 정보통신 강국의 토대를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전폭적 신뢰와 권한위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경제관료들은 정확히 말해 90년대부터가 아니라 88년부터 장기 경제개발계획을 못그리고 10년대계를 만들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이후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이 전임자들보다 경제관료들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았기 때문일까.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그런데 왜 이런 결과가 나왔나. 답은 ‘5년 단임제’이다. 박대통령은 18년 장기집권을 했다. 전두환대통령도 말이 단임이지 7년이나 집권했다. 4년제 대통령제로 치면 거의 재선을 한 셈이다. 반면에 노태우대통령부터는 5년씩밖에 집권하지 못했다. 말이 5년제이지, 대통령이 실제로 힘을 갖고 일을 할 수 있는 기간은 3년밖에 못된다.”
“반면에 기간산업이라는 것은 건설에만 최소한 10년이 걸린다. 고속도로를 뚫든, 댐을 만들든 마찬가지다. 그런데 대통령 임기가 5년이다 보니 위정자들은 자신의 임기내에 가시적 성과를 볼 수 있는 일에만 관심을 보인다. 10년이 걸리는 사업은 애당초 관심밖이다. 죽 쒀서 개 줄 일 있느냐는 식이다.
이러다보니 위정자들은 댐 건설같은 기간산업에는 관심이 없고 신도시 건설이나 아파트단지 건설 같은 단기간에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사업에만 관심을 가졌고, 그 결과 그 아래 경제관료들은 지난 10년간 댐 하나 짓지 못하게 된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5년 단임제가 계속된다면 앞으로도 10년 대계를 그려 소신껏 추진하는 경제각료들을 좀처럼 만나기 힘들 것이다.”
그의 주장인즉 5년 단임제라는 '조루형 권력시스템'이 우리 경제발전의 최대 암적 요소중 하나라는 것이다.
***민간 부문의 책임도 정치권력이나 관료 못지않다**
이같은 주장은 관료사회 및 재계에서 폭넓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정치가 주기적으로 불안정하다 보니, 정치권 지배 아래 있는 관료집단이나 재계가 큰 그림을 그리기 힘든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한국은행의 한 중견간부는 다른 지적을 한다.
"백번 맞는 주장이다. 정치가 안정돼야 관료든 기업이든 중장기적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민간경제가 언제까지 정치권력이나 경제관료에게 의존해야 할 것인가라는 점을 곱씹어 보아야 한다. 정치권력이나 관료는 민간지원에 그쳐야 하며 중심세력은 민간부문이 돼야 한다. 이미 세계경제는 그런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오래이다."
"한 예로 요즘 재계의 최대 화두가 되고 있는 중국진출 문제만 해도 그렇다. 다른 다국적기업들은 이미 10년전부터 중국을 예의주시하며, 중장기 투자를 해왔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중국을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한두해 전부터의 일이다. 막차를 탄 셈이다. 과연 중국진출도 정치권력이나 경제관료들이 그림을 그려 제시해야 하는 큰 그림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정부는 지난 92년 한ㆍ중수교를 통해 제 할일을 했다. 지난 10년간 민간이 중국이라는 큰 기회의 땅을 방치한 것이다. 최근의 비전 부재에 대해서는 정부 못지 않게 민간의 책임도 크다."
요컨대 지금 우리 사회가 직면한 '10년 대계 부재(不在)'라는 치명적 결함의 책임은 민ㆍ관 공동에게 있다는 지적이다. 맞는 말이다. 남은 문제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10년 대계 부재의 원인 분석은 이미 나와 있다. 그 다음 할 일은 잘못된 부문을 도려내고 새 살을 돋게 하는 것이다. 차기정권 창출에 여념이 없는 여야 정치권이나 뉴 리딩인더스트리(신 주도산업) 모색에 여념이 없는 기업등이 함께 고민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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