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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두구육 타령 그만하고 곱창구이에 소주나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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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두구육 타령 그만하고 곱창구이에 소주나 한 잔

[김성민의 'J미디어'] 일본 영화 속 야키니쿠와 재일조선인, 그리고 일본인

재일조선인 마을에서 한바탕 축제가 벌어진다. 주인공 김준평이 돼지의 목에 칼을 꼽아 피를 뽑자 남자들이 달려들어 배를 갈라 내장을 쓸어 담고 여자들은 그 내장으로 순대를 만든다.

영화 <피와뼈> 속 한 장면이다. 영화는 돼지 해체의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줌으로써 소수민족의 이질감을 극대화시켜 표현한다.

▲ 영화 <피와뼈> 중

일찍이 불교의 영향으로 육식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던 일본에서 사람들이 고기요리, 특히 야키니쿠(焼肉)로 불리는 고기구이를 외식으로 먹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부터라고 한다. 오늘날 일본의 대표적인 외식 메뉴 중 하나인 야키니쿠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은 셈이다.

특히 야키니쿠집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곱창구이, 즉 호르몬야키(ホルモン焼)는 더욱 그렇다. 고기와 친하지 않았던 일본인들이 유독 내장만을 즐겨먹었을 리 없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일본인들이 지금처럼 즐겨먹게 된 호르몬의 역사는 전쟁 후 일본에 남은 재일조선인의 삶과 떼어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그것은 곱창을 가리키는 호르몬(ホルモン)의 어원에서도 알 수 있다. 적지 않은 문헌과 구전들은 호르몬이라는 단어의 뿌리를 재일조선인의 문화에서 찾는다. 오사카 지방에서 일본인이 먹지 않고 내다 버린 소와 돼지의 내장을 재일조선인들이 주워다 먹었다고 해서 '버리는(放る)것(もん)', 즉 '호르몬'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 이견이 있기는 하지만 이 통설이 재일조선인의 삶과 호르몬이라는 음식과의 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듯 하다.

영화 <불고기>에서는 재일조선인 형제의 요리 대결을 통해 내장 부위와 살코기 부위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흥미롭게 그려진다. 일본에서는 내장 부위를 하얀고기(白肉), 살코기부위를 붉은고기(赤肉)라고 부르는데, 내장을 먹는 문화가 상대적으로 저급한 것으로 취급되어 왔다.

"할아버지, 방송에 출연하세요. 방송에 출연해서 전국에 이름을 알리기만 하면 이런 더럽고 조그만 가게 개조도 할 수 있고, 고기도 싸구려 내장 말고 고급 고기를 쓸 수 있어요. 거기다 여긴 손님들까지 질이 떨어지잖아요." (영화 <불고기> 중에서)

▲ 영화 <불고기> 중

그러나 수많은 재일조선인에게 호르몬은 그들의 삶을 지탱해준 소중한 음식 문화였다. 일본인들조차 제대로 취직할 곳이 없었던 패전 직후의 일본에서 재일조선인이 아무 일이나 구할 수 있을 리 없었고, 당시 그들에게 허락된 이 직장이라고는 교육 수준에 상관없이 토목, 운송, 소규모의 유기(遊技)장, 영세한 가내공업, 파쇠가게, 그리고 야키니쿠집이 고작이었다.

그러니까 재일조선인에게 있어서 야키니쿠는 취향의 수준이 아닌 '먹고 사는' 문제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리고 어느새 야키니쿠, 특히 호르몬은 극심한 빈곤과 차별을 경험해야 했던 재일조선인 스스로에게도, 그들을 바라보는 일본인들에게도 자이니치(재일조선인의 약칭)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문화로 각인되게 된다.

그러나 그런 호르몬은 이제 더 이상 재일조선인만의 문화가 아니다. 전후 수십 년이 지나면서 일본인들에게도 그 문화가 널리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가난했던 시절 재일조선인 어머니(オモニ)가 만들어준 싸고 맛있는 호르몬과 소주 한 잔에 살아 갈 힘을 얻었던 일본인들이 이제는 일상생활의 음식으로 호르몬을 즐겨먹게 된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영화 <박치기>가 일본인과 재일조선인의 관계의 변화를 호르몬을 통해 표현한 것은 살짝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영화 속에서 재일조선인 경자를 짝사랑하는 케이스케는 재일조선인들의 잔치에 초대받아 막걸리를 받아 마시고는 만취해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어머니가 '도대체 뭘 먹은 거냐'며 타박하자, 잔치에서 경자와 함께 '임진강'을 연주해 재일조선인들은 물론 경자의 마음까지 얻은 케이스케는 한껏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이렇게 외친다. "호르몬이요, 호르몬!"

▲ 영화 <박치기> 중에서

오래 전부터 무엇을 먹는가, 먹지 않는가는 그 집단의 문화적 정체성을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여태까지 먹지 않던 것을 먹게 되면서, 또는 자신들만 먹어 왔던 것을 다른 집단과 공유하게 되면서 이미 공고하게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였던 문화적인 벽들이 소리 없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흔치 않게 경험한다.

또한 우리는 이제 한국인들이 초밥을, 우동을, 사케를 편하게 즐기는 것이 일본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한국의 음식이 소개되고 수많은 일본인들이 일상에서 불고기를, 비빔밥을, 막걸리를 즐기는 것이 전혀 신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너희 음식은 양두구육이다", "그러는 너희 음식이야말로 양두구육이다"… 이런 논쟁을 보고 있자니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한 서민들의 혀가 엘리트들의 혀보다 훨씬 더 솔직하고 똑똑한 게 분명한 듯 하다. 한국과 일본, 이제 조금은 다른 얘기를 하면서 지내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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