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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타오,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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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후진타오, 누구인가

2003년부터 중국 이끌 지도자

차기 국가주석으로 확정된 후진타오(胡錦濤.59) 중국국가 부주석이 지난 27일부터 15박16일의 일정으로 러시아. 영국. 프랑스. 스페인. 독일 등 유럽 5개국 순방길에 올라 전세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내년 가을 개최되는 제16차 중국 공산당대회에서 장쩌민(江澤民) 현 국가주석을 승계할 후진타오의 이번 일정에 대해 중국 외교부는 "러시아는 실무방문이며 나머지 4개국은 공식방문"이라고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번 유럽방문은 연초부터 '차기 국가주석의 방문'으로 예고돼, 서방사회의 비상한 관심을 끌어왔다.

후진타오는 러시아 푸틴 대통령, 영국 블레어 총리 등과 잇따라 만나며 화려한 신고식을 하고 있다. 후진타오는 이에 앞서 지난달말에는 우리나라를 방문, 김대중대통령 등과 만나기도 했다. 집권후 외교전략 구사를 위한 고도의 탐색전을 진행중인 것이다.

***평민당 출신의 최연소 정치국 상무위원**

홍콩 권위지 둥팡르바오(東方日報)는 이미 지난 3월 22일 중국 각계의 미래 주역 12명을 선정 소개하면서 중국 정계 주역으로 후진타오를 첫손에 꼽았다. 그러나 국내에는 후진타오에 대한 정보가 아직 부족한 상태다.

후진타오는 1942년 12월 상하이 출생으로 칭화(淸華)대학교 공과대학의 수리공정계를 졸업한 엔지니어 출신이다. 가족으로는 처와 1남1녀를 두고 있다. 취미는 문학, 음악, 무용이며 현재 국가 부주석,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중앙군사위 부주석을 맡고 있다.

그는 중앙정치국에서 최연소, 그것도 이른바 혁명원로 자녀로 이루어진 ‘태자당’ 출신이 아닌 ‘평민당’ 출신으로 유명하다. 쑹핑(宋平), 후야오방(胡耀邦), 차오스(喬石) 등에 의해 발탁되었고 언변이 좋고 판단력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중국 시짱(西藏)자치구위원회 서기 재임중에는 시짱의 분리독립 움직임에 민첩하게 대처해, 당시 최고지도자였던 덩샤오핑(鄧小平)의 인정을 받았다. 94년 덩샤오핑으로부터 "내가 보기에 후진타오 이 사람은 아주 괜찮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은 이후 장쩌민의 뒤를 이을 재목으로 거의 공인되다시피 했다.

홍콩에서 출판된 후진타오 연구서(1997년)에 따르면, 그는 상하이에서 출생한 뒤 인근 장쑤(江蘇)성 타이저우(泰州)에서 자랐다. 타이저우 대포(大浦)소학교와 타이저우 중고교를 나와 칭화대로 진학하면서 베이징으로 진출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포함 1남2녀의 어린 자녀를 두고 죽어 할머니 슬하에서 자랐는데 아버지 후징즈(胡靜之)는 타이저우에서 토산품 잡화상의 경리로 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난하게 살았지만 지 주집안이나 자본가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력이 후에 그가 각종 계급투쟁과 이념투쟁에서 살아남는 요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가난한 출신인 까닭에 문화혁명때도 무사**

17세의 나이에 시골 출신으로 1959년 중국 최고 명문중 하나로 꼽히는 칭화대에 합격한 그는 이후 전형적인 테크노라트의 길을 걸었다. 그는 칭화대 수리(水利)공정과 하천 발전(發電) 분야를 전공했다. 그의 부인 류웅칭(劉永淸)도 같은 대학에서 만났다.

그는 6년제 과정을 마치고 65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는 대학 2학년때 당으로부터 이른바 '배양대상(培養對象)'으로 정해졌는데, 당시 공산당은 유망한 젊은이들을 고찰(考察)대상, 배양대상, 발전대상으로 분류해 발전대상 단계를 거친 젊은이들만 입당시켰다.

그가 정식 당원이 된 것은 졸업 석달 전인 65년 4월이다. 66년 문화혁명이 시작되면서 그는 자신을 지도하고 키워주었던 학과 당서기와 학과 주임을 비판하라는 압력을 받으면서 대학 현실에서 발을 빼는 '소요파(逍遙派)'로 전향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68년 중국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으로 꼽히는 간쑤(甘肅)성의 수력발전소 건설공사 현장의 노동자로 일하면서 초고속 승진을 했다. 평범한 노동자로 출발해, 이듬해인 69년 발전소 건설 담당 기관인 수리전력부 제4공정국 813분국(分局)의 기술원이 됐다. 그로부터 며칠되지 않아 분국 사무실의 비서가 됐고, 71년 수리전력부 제4공정국 기관(機關)당총지부의 부서기로 승진했다.

후진타오는 덩샤오핑이 78년 공산당 11기 3중전회에서 개혁개방을 확인한 이후 촉망받는 지도자감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82년 9월 당대회에서 당중앙 후보위원으로 수직상승했다. 일개 부국장급 간부가 당중앙 후보위원이 된다는 것은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40세에 최연소 중앙위원이 된 그는 당시 ‘작은 공산당’으로 불리던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의 2인자로 자리잡았다.

***"서기는 서기이지, 청소부가 아니다"**

후진타오의 기질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그는 당시 공청단 지도부가 ‘간부나 일반 단원이나 똑같은 사람들’이라며 화장실이나 복도 청소를 간부들도 돌아가며 하는 풍토에서 당시 1인자였던 왕자오궈(王兆國)이 자기 차례가 오면 정시에 도착해 깔끔히 청소를 한 반면, 후는 거의 청소를 하지 않았다. 그는 실사구시 정신에 입각해 ‘서기는 서기이지 청소부가 아니다’라면서 자신은 사무실에서 매일 새벽 2~3시까지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퇴근하는데, 청소는 다른 사람이 해도 무방하지 않느냐는 논리를 폈다.

또 한가지. 왕자오궈는 지방 시찰을 갈 때 일체 접대를 거절해 그를 접대하려던 지방 조직원들의 원성을 샀다. 반면에 후진타오는 술잔도 열심히 주고받아 지방 간부들의 체면을 살려주는 대신에, 여비를 주면 나중에 비서를 시켜 조용히 되돌려주었다고 한다.

혁명원로들의 자녀들로 구성된 ‘태자당’의 견제를 받는 그는 구이저우(貴州)성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85년 중국 공산당에 대대적인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이해 9월 당 12기 4중전회와 전국대표대회, 12기 5중전회가 잇달아 열렸다. 호는 이때 전국대표회의에서 당중앙후보위원 딱지를 떼고 정식 중앙위원이 된다.

그는 구이저우성 서기로 있으면서 2가지 사업에 주력했다. 하나는 성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시장경제와 개인경제를 활성화시킨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육부문에 집중 투자를 한 것이다.

후진타오는 88년 구이저우성 서기에 재선된 직후 분리독립운동이 심상치 않은 시짱(西藏)·티베트자치구 서기 재직 당시에는 대규모 폭동이 발생하자 직접 철모를 쓰고 계엄부대를 지휘, 최고 지도부에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다. 시짱은 1959년 대규모 무장독립운동(중국식 표현은 무장반란)이 일어나 달라이라마가 인도로 망명한 뒤 늘 불안요소가 잠재돼왔다가 독립운동 40주년(1989년)을 앞두고 분란이 격렬해지고 있었다.

그는 부임한 지 얼마되지 않은 89년 3월, 티베트의 대규모 독립투쟁이 벌어졌다. 이때 사태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오히려 경제발전을 일으킨 공로가 크게 인정받았다.

***덩샤오핑이 차세대지도자로 지명**

92년 덩샤오핑의 ‘젊은 피 수혈’에 대한 강조가 있은 후 후는 권력 핵심부라고 할 수 있는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회 7인 중 한 명으로 진입했다. 권력서열 7위에 오른 것이다. 후진타오는 이어 97년 당 15기 4중전회에서 당중앙 군사위 부주석으로 발탁된다.

현재 7인의 정치국 상무위원을 서열로 보면 장쩌민(75) 주석→리펑(李鵬·73) 전국인민대표자대회(全人大) 상임위원장→주룽지(朱鎔基·73) 총리→리루이환(李瑞還·67) 전국정협회의(政協) 주석→후진타오(胡錦濤·59) 부주석→웨이젠싱(尉健行·70)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리란칭(李嵐淸·69) 수석부총리 순이다.

내년 당대회에서는 장쩌민 주석과 후진타오 부주석만이 남고 5명이 바뀔 것으로 알려졌다. 대신 새로 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하는 인물로는 현 부총리인 원자바오(溫家寶·59)와 우방궈(吳邦國·60), 국무위원인 우이(吳儀·63)와 뤄간(羅幹·66), 정치국 후보위원인 쩡칭훙(曾慶紅·62)으로 알려지고 있다.

장쩌민은 중국 정치의 중심이라는 상하이방(上海幇)의 기수로 공업 담당 부총리인 우방궈를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끌어 올렸고 또한 오른팔과도 같은 정치국 후보위원 쩡칭훙을 두단계(후보위원→위원→상무위원)나 도약시켜 상무위원으로 발탁한 것이다.

***"젊은 피로 21세기 중국을 이끌어라"**

덩샤오핑 이전에는 50대의 정치인은 어린애 취급을 받았다. 덩샤오핑이 사망한 97년 초반까지 80대 후반의 원로 8명을 일컫는 '팔로(八老)'라는 단어는 중국 정치의 고령화가 어느 정도인지 잘 보여준다.

작년 3월의 9기 전국인민대표대회 1차회의에서 선출된 국무원 각료 29명 중에는 불과 몇년 전만 해도 잘해야 부부장(차관), 부장조리(차관보) 정도에 만족해야 했을 나이인 50대들이 대거 부장(장관)급으로 등용됐다. 특히 거의 무명에 가까웠던 쉬용위에(許永躍)는 겨우 47세의 나이에 국가안전부장으로 입각했다.

지방 성이나 시 등으로 내려가면 젊은 간부들의 중용은 더욱 두드러진다. 비서장(기획실장)이나 사장(司長·국장) 등의 핵심 요직에 40세 전후의 새파란 간부들이 적어도 30∼40% 나 진을 치고 있는 것이 중국 정ㆍ관계의 오늘의 모습이다.

이는 95년 초에 내려진 중국 공산당의 내부 결정에 가장 크게 영향받은 현상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당시 장쩌민을 주축으로 하는 당 중앙은 중앙정부와 각 지방정부에 보낸 내부 통달(通達)을 통해 “앞으로 성장(省長), 부장, 시장 또는 각급 당위의 서기로 진출할 수 있는 간부 후보자 약 3분의 1은 40대 이하에서 과감히 키우라”고 지시, 전국적으로 젊은 인재의 발탁 붐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당 중앙이 내부적으로 확정한 고급간부 기용의 연령 기준인 부장 60세, 부부장 55세, 사장 50세, 처장(과장) 45세 이하의 원칙이 점차 강하게 적용되고 있다.

이러한 ‘젊어진 중국’을 이끌 21세 지도자가 바로 후진타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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