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다섯달 전인 지난 5월22일, 우리들로 하여금 국제사회에 고개를 들 수 없게 만든 사건이 발생했다.
이날 미국의 다우존스 통신은 미국 칼라일그룹의 한국사무소 직원인 정모씨(24)가 5월 15일 11명의 외국친구들에게 보낸 ‘왕처럼 살고 있다’라는 제목의 전자메일 내용을 공개했다. 문제의 정씨는 미국 메릴린치 증권에서 일하다가 올해 4월 칼라일그룹으로 자리를 옮겨 서울로 들어온 신참직원이었다.
“한국에서 일주일하고 반을 지낸 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인생은 좋다’는 거야.
나는 지난해 새로 지은 아주 좋은 방 3개짜리 아파트에서 살고 있어. 왜 나에게 방이 필요하나구? 좋은 질문이야. 안방은 퀸 사이즈 침대(Queen size bed)를 위한 곳이야. 내가 뜨거운 영계들과 앞으로 2년동안 잘 곳이지.
두 번째 침실은 내 영계들을 위한 할렘이고, 세 번째 방은 너희들 모두가 한국을 방문할 때를 위해 비워둔 방이야. 나는 서울 여기서 왕이야.”
***“서울은 할렘이다.”**
정씨는 이 글에서 이같은 향락은 여러 은행의 임직원들로부터 큰 대접을 받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우존스 보도는 그후 전세계 인터넷을 타고 퍼져나갔고, 24일 미국의 유력일간지 워싱턴포스트가 이를 상세히 후속보도하기도 했다.
일부 국내언론도 이를 보도했다. 그러나 외신을 단순히 옮기는 수준, 그것도 자세한 이메일 내용은 생략한 채 ‘여성 편력’ 운운하는 선에서 멈췄다. 아마도 이메일 내용을 완역하기에는 민족적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렇게 간단히 넘기기에는 그 안에 담긴 함의가 너무나 복합적이다. 특히 의문이 가는 대목은 ‘왜 한국에 온 24살짜리 피라미에게 한국의 은행 임직원들은 경쟁적으로 향락을 제공해야 했을까’라는 점이다. 단순히 외국계 펀드의 직원이래서? 아무리 IMF위기후 외국계의 위상이 거대해졌다 해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답은 하나이다. 그것은 상대방이 바로 ‘칼라일그룹’ 직원이기 때문이었다.
***잇따르는 칼라일 그룹 임원들의 방한 행렬**
이 스캔들이 최초로 다우존스 통신에 보도된 지 사흘 뒤인 지난 5월25일, 서울 신라호텔에서는 유상철 포항제철회장, 손병두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등 재계의 거물급 인사 1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강연회가 열렸다. 이날 강연의 강사는 미국의 제임스 베이커 전 국무장관. 그는 이날 ‘미국의 신외교정책’이라는 주제아래 새로 출범한 부시정부의 한반도 정책을 포함한 미국의 새 외교정책 기조와 경제.통상정책 방향을 설명했다.
국내언론들도 강연회 사실을 보도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사실만은 빼놓고 보도했다. 베이커 전 국무장관이 칼라일그룹의 파트너(공동주주)라는 사실이었다. 재계는 조지 부시 전대통령이 고문으로 있고, 부시 현대통령도 한때 임원으로 있었던 칼라일 그룹과의 관계 강화를 위해 베이커를 초청했던 것이다.
이처럼 부시 정권 출범후 국내 금융계나 재계는 칼라일 그룹과의 관계 개선에 ‘필사적’이라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매달리고 있다. 이같은 상황은 지금까지 계속해 최근에는 한 경제신문사가 조지 부시 전대통령을 연사로 초청한 뒤 이 사실을 사고(社告) 형식을 빌어 대대적으로 홍보하기도 했다. 속내가 들여다보이는 행사였다. 부시 전대통령은 한번 강연료로 8만~10만달러의 고액을 받기로 유명하다.
***한미은행 인수 직전, 칼라일 그룹 임원들 제주도에 집결**
이같은 칼라일 그룹 거물들의 잇따른 방한은 앞으로 칼라일 그룹의 한국내 위상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짐작케 한다는 점에서 앞으로 예의주시해야 할 대목이다.
칼라일 그룹은 부시 정부의 집권이전부터 이미 국내 금융계 및 재계에서는 무시못할 절대 파워 중 하나였다. 칼라일 그룹 안팎에 포진하고 있는 로비인맥이 그만큼 거대했기 때문이다. 그런 대표적 예가 한미은행 인수과정에 보인 칼라일 그룹의 파워이다.
한미은행은 지난해 11월 주식예탁증서(DR) 발행형식을 빌어 4천4백47억원을 증자에 참여시키는 조건으로 자신의 지분 40.1%를 칼라일 그룹에 넘겼다. 이로써 한미은행의 최대주주는 종전의 삼성, 대우, BOA(뱅크 오브 아메리카) 3대 주주에서 칼라일로 바뀌었다.
그런데 칼라일의 한미은행 인수가 있기 다섯달 전인 지난해 6월21일의 일이다. 제주도에 때아닌 세계적 정치거물들이 모여들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적이 있다.
참석자는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 피델 라모스 전 필리핀 대통령, 파냐라쿤 전 태국 수상, 제임스 베이커 전 미 국무장관 등 50여명.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쟁쟁한 국제거물들이 총집결하다시피 한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방한할 때 신분인즉 칼라일그룹 아시아 고문 및 임원 자격이었다.
6월 21일부터 이틀 동안 서귀포시 중문관광 단지내 제주신라호텔에서 열릴 예정인 칼라일그룹 아시아 고문 및 임원 연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자가용비행기 등을 이용해 대거 방한한 것이다.
칼라일은 지난 99년 국내 3대 생명보험회사중 하나인 대한생명 인수에도 적극 나섰을 정도로 일찌감치 우리나라의 금융기관 인수에 강한 의욕을 보여왔다. 그런만큼 당연히 이날 회의에서 한미은행 지분 인수건이 깊숙이 검토됐을 가능성이 높다.
***앞으로 예의주시해야 할 칼라일의 행보**
당시 총리였던 박태준씨가 칼라일 그룹의 고문인 대목에서도 알 수 있듯, 한국정부에도 상당한 영향력 행사가 가능한 정치거물들이 모인 칼라일 그룹이 과연 당시 한국정부를 상대로 어떤 물밑 비즈니스를 벌였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미국의 뉴욕 타임스지가 지난 3월5일자 기사에서 “부시 전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해 국무총리와 정부 고위관리 및 재계인사들을 만났으며, 이후 칼라일은 한국내 몇 안되는 건실한 은행의 하나인 한미은행의 지배권을 둘러싼 경쟁에서 다른 상대들을 눌렀다”고 보도하긴 했으나 확인이 힘들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세계적 정치거물들이 모인 ‘제주도 회동’후 칼라일의 한미은행 인수협상은 급류를 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칼라일 그룹은 그후 쌍용정보 통신을 인수직전까지 협상을 이끌다가 정보통신주가 폭락하자 이를 백지화하는 등 국내 기업 인수합병에 강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국내 각계 인사들이 지금 이 순간도 미국 부시정부와의 관계 개선을 희망하고 있다는 대목을 고려하면, 앞으로 칼라일 그룹의 행보는 예의주시해야 할 체크 포인트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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