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17일 저녁 서울 JW메리어트 호텔에서 열린 세계지식포럼 특별강연에서 지금 세계가 지난 30년 대공황 및 90년대 일본이 경험했던 ‘유동성 함정’의 위기에 직면해 있음을 경고했다.
그는 요즘 경제위기를 9.11테러 결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며, 정보통신(IT)산업의 전세계적 과잉중복투자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따라서 한국을 비롯한 각국 기업들은 앞으로 2년간 과잉투자 해소 과정의 혹독한 고통을 감수해야 할 것으로 내다봤다.편집자
9.11 테러가 세계경제에 어떤 영향을 줄지 지금 모두 궁금해 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겠다.
첫번째, 테러로 큰 타격은 없었고 주가도 테러 이전 수준으로 돌아갔다.
두번째, 문제는 그 전부터 이미 경제가 어려웠고 지금도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개입하면 모든 문제가 풀리는 줄 알고 있었다.그리스펀이 금리로 해결 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렇질 못했다.
내년이 어떻게 될지는 나 자신도 예측하기 힘들다.
나는 일본에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니라, ‘이상하고 걱정스런 경제모델’에 관심이 있었다. 일본은 비즈니스 사이클이 운영되지 않는 나라다. 통화재정정책도 효과가 없다. 그런데 최근 일본과 미국은 차이가 있다고 봤는데 점점 그 차이가 좁아져서 미국이 일본처럼 변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들이 있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조심은 해야 한다.
미국의 경우는 그리스펀의 미연준이, 독일의 경우는 분데스방크가 통화정책으로 문제를 해결한다고 믿었다. 일본은 그러나 예외였다. 98년에 금리는 0%까지 떨어졌으나 경기침체는 계속됐다. ‘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의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전에 이런 경우가 단 한번 있었다. 1930년대 미국 공황이 그랬다. 금리 0%에서는 어떤 조치도 문제를 해결 못한다.
현재 가장 많은 걱정은 ‘수요부족’이지만 이는 30년전부터 전해오던 걱정이다,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전통적인 정책 즉 ‘툴(tool)’이 유용하지 않다는 점이다. 통화정책이 핵심적인 이슈인데 더 이상효과가 없다. 문제 해결을 못하는 것이다.
미국을 예로 들면 지난 74,75년의 침체를 미연준이 개입하여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81,82년과 91,92년에도 같은 방법으로 회복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안 되고 있다. 그 이유는 비즈니스 사이클 자체가 좀 다르기 때문이다.
지금의 불황은 60년이래 40여년전에 겪고 처음 겪는 고전적 사이클이다.
지난 60년대 이전에 자연스런 호황의 끝은 없었다. 지나친 경기과열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중앙은행은 금리를 인상해 과열된 경기를 죽였다.
90년대말에는 금리인상을 약간만 해서 경기호황이 끝까지 가게 해 주었다. 인플레이션이 나타나지 않아서였다. 왜 인플레이션이 나타나지 않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미연준은 과열된 경기를 차단할 이유가 없었다.
그 결과 전통적인 비즈니스 사이클이 왔다. 너무 과잉 투자를 해서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이다. 정보통신(IT)산업 등에 특히 과잉 투자가 심했다.
그래서 문제해결이 더 어렵다. 60년대 경기 침체는 금리로 해결할 수 있었지만 이번은 그렇지 않다.
이제 상황은 더 어려워졌다. 통화정책이 소용없기 때문이다. 미연준 금리는 6.5%에서 2.5%까지 떨어졌지만 경기회복 기미는 없다. 앞으로 달라질 수도 있겠으나 현재 조짐은 없다. 불행하게도 이는 일본과 유사하다.
일본은 80년대말 인플레이션 없이 호황을 이뤘다. 주식시장도 3배나 커졌다.
미국 기업도 주가는 3배 증가 했으나 결국 슬럼프가 왔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슬럼프란 투자 저조를 의미한다.
하지만 차이도 있다. 미국은 부동산의 거품이 없었다는 점이다. 물론 지역적인 현상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없었다. 부채비율도 높지 않았다.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인구분포 등으로 볼 때 일본보다 나은 편이다.
그러나 분명 유사점이 있고,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금리에 대해 하나 더 언급할 점은 미국의 경우 장기금리 인하가 안돼 정책운용이 더 힘들어 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번 테러는 끔찍했고 일본의 고베지진과 흡사했다. 하지만 고베지진은 다른 나라경제 활동이나 성장에 영향이 적었다. 글로벌경제에 큰 수치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자연재해가 아니고 누군가가 저질렀고, 또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도 두렵다. 경제면에서는 직접적으로 항공업이 여행객의 감소로 힘들어졌고 보안절차가 까다로와지며 경제활동이 저하되고 있다. 생산에 차질이 오고 소비도 타격을 받는다. 자연재해라면 이런 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테러는 장기적 영향이 없을 것이다. 테러에 의한 경제의 어려움이 오래 지속 되진 않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이스라엘은 테러를 매일 당해도 소비는 계속 된다.
경기를 회복하려면 정책이 좋아야 하는데 그것이 어렵다. 서너달 뒤 상황도 알기 힘들다.
지금의 경기불황은 기업 경영자들의 책임이 큰데, 과잉확장과 과잉투자 때문이다.
이번 위기와 지난 97,98년 아시아 위기를 비교해보자.
지금 위기는 미국의 영향을 세계가 다 받기 때문에 일어난 경기 침체이다. 또한 직접 무역관계에서 오는 영향 외에 심리적 영향도 있다. 예컨대 IT산업의 거품이 그런 경우다. 독일과 일본도 미국과 함께 겪은 이 거품은 ‘심리적 오염’이라고 할 수 있다. 위성방송 뉴스 등을 통해 미국의 IT산업 성공을 보고, 따라서 자신들도 IT산업에 투자했다가 함께 그 거품이 터져 버린 것이다.
문제는 97,98년에 타격을 받았던 아시아는 이번에 다시 한번 타격을 받았다는 점이다. 운이 나빴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수출이 IT산업에 집중돼 있기에 영향이 더욱 컸다. 다른 지역은 생각만큼 타격이 크지 않았다. 단지 아르헨티나는 예외적인 경우로 자국내 문제가 많이 있었다.
현재의 상황을 너무 과장되게 해석하고 국제적인 영향이 좋지 않게 퍼지고 있긴 하나, 그렇다고 해서 4년전과 같은 위기가 반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개발도상국의 위기는 신뢰회복이 안되서 화폐가치가 떨어지고 해외부채가 늘며 투자가 떨어지면서 왔다. 손실은 줄고 최악의 경우 국내기업이 차례로 다 무너지고 끔찍한 슬럼프가 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가 이런 최악의 경험을 했다.
한국 등은 더이상 그런 예에 맞지는 않는다. 해외부채비율 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97년 위기 같은 위기의 재발 가능성은 적다. 물론 6개월후의 정확한 상황은 나도 모른다.
지금의 경기 침체가 특이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단기 기술, 설비투자과잉의 영향이다. 이론 악영향은 시간이 해결할 것이다.
98년 이전에는 비관주의가 팽배할 경우 그린펀스이 금리를 인하하고 자신감을 보이면 경기가 상승했다. 문제는 그린스펀이 이미 8번이나 이 마법을 써 봤으나 소용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비관주의 때문이 아니라, 투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경기후퇴는 지나친 낙관이 부른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지금 단기금리에 비해 장기금리는 인하폭이 적다. 사람들은 곧 금리가 오르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장기금리가 경기를 이끄는데 낙관론이 장기금리를 붙잡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에는 케인즈의 유동성 이론이 어느 정도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 단기금리뿐 아니라 장기금리에도 신경을 써야한다.
통화정책만으로는 개선이 힘들다. 장기 저금리에도 장기불황이 계속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창의적 정책 도입으로 경제회복이 가능하게 해야 한다.
미국의 경기는 기존설비가 낙후돼 전면교체해야 하는 5년 후에는 확실하게 회복될 것이다.
일본의 경우는 수요가 장기적으론 부족한 점을 극복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기업들은 부채비율이 너무 높다.
미국은 일본만큼 사정이 나쁜 것은 아니다. 몇십년의 연구를 거친 결과, 미국은 공식을 갖고 있다. 대안은 정부지출의 급증이다. 전 세계적 차원으로는 강력한 금리인하가 필요하다.
통증없는 해결은 힘든 법이지만, 앞으로 실업과 기업투자 손실이 뒤따를 것이다. 2년후에 경기가 회복할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 2년은 너무나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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