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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돈 속의 등장인물, 문제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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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우리 돈 속의 등장인물, 문제 없나

'사농공상' '남존여비' 뚜렷

우리나라 돈에 실린 인물 초상들이 사농공상(士農工商), 남존여비(男尊女卑), 숭문천무(崇文賤武)라는 봉건 초기의 완고한 시대정신을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반면에 선진 각국은 예술가, 발명가, 과학자, 교육자, 탐험가, 여성, 개혁가 등 시민사회의 선구자들을 화폐의 주인공으로 담고 있어 큰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들은 또한 이에 만족하지 않고 90년대 들어 화폐속 등장인물들을 대대적으로 세대교체했다. 새로운 시대정신, 국가정신을 담기 위해서이다.

새로운 시대정신, 국가 비전을 필요로 하고 있는 우리 사회도 작금의 혼란상을 극복하고 다양성이 확보되는 성숙한 시민사회로 나가기 위해선 돈에 새로운 시대정신을 담는 방안을 전향적으로 검토할 때가 됐다.

***화폐속 네 인물의 네 가지 공통점**

현재 우리나라 돈에는 4명의 역사적 인물이 도안의 소재로 채택돼 있다. 1만원권에는 세종대왕, 5천원권에는 율곡 이이, 1천원권에는 퇴계 이황, 1백원짜리 동전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등이다.

네 인물은 모두가 ‘역사적 위인’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를 비롯해 많은 위업을 남긴 계몽군주로서 높게 평가받고 있다. 율곡은 9번이나 장원급제한 조선사상 유일무이한 성리학자이자, 임진왜란을 일찌감치 예견하고 10만 양병설을 주창한 인물로 유명하다. 올해로 탄생 5백주년을 맞이한 퇴계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성리학의 대가이다. 충무공은 임진왜란때 나라를 구한 명장으로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예외없이 우리나라를 대표할만한 인물들임에 틀림없다.

네 인물은 이밖에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첫 번째, 모두의 성이 이씨라는 점이다. 참고로 세종대왕의 본명은 이도이다.
두 번째, 예외없이 남성이라는 점이다.
세 번째, 모두가 조선시대 신분질서를 구분하는 사농공상 가운데 사(士)의 신분에 속하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네 번째, 한결같이 17세기이전 인물이라는 점이다. 세종대왕(1397~1450)을 비롯해 퇴계(1501~1570), 율곡(1536~1584), 충무공(1545~1598) 등이 그러하다. 조선시대 봉건질서는 16세기말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17세기부터 급속히 해체됐다.
요컨대 이씨 왕조가 지배하던 조선사회 전반기의 엄격한 봉건질서를 대변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이밖에 우리 화폐속 인물은 은연중 봉건시대의 숭문천무(崇文賤武) 사상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무신으로 충무공이 끼어있기는 하다. 그러나 초기에 5백원짜리 지폐 앞면에 자리잡고 있던 충무공 초상은 지폐가 없어지고 동전이 만들어지면서 5백원짜리가 아닌 1백원짜리 동전 뒷면으로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 일종의 격하(?)다.

***문화예술인을 중시하는 프랑스 프랑화**

화폐속 인물은 그 나라의 얼굴이자, 국가정신의 거울이다.
네덜란드의 굴덴화, 새로 만들어진 유로화, 스리랑카의 루피화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가 인물 초상을 화폐 앞면의 도안으로 사용하고 있다. 인물이야말로 이같은 국가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하는 데 가장 적합한 소재라는 판단에서이다.
특히 선진국의 경우 화폐 인물을 선정하는 데 있어 남다른 정성을 들이고 있다.

프랑스 프랑화에는 인상주의 음악의 시조로 유명한 작곡가 클라우드 드뷔시, <어린 왕자>의 저자인 작자 생텍쥐베리, 후기 인상주의 화가 폴 세잔느, 에펠탑을 세운 건축가 G. 에펠,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퀴리부부 등이 실려있다. 예술문화의 종주국임을 자부하던 까닭에 종전에는 예술문화가들만 도안 소재로 채택했으나, 93년에 5백프랑짜리 신권을 발행하면서 과학자인 퀴리부부를 포함시켰다. 프랑스를 유럽의 과학센터로 키우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다.

<사진1>

***교육,발명가까지 내세운 이탈리아 리라화**

이탈리아도 프랑스 못지않은 문화대국이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이탈리아 리라화에는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컬럼부스, 베르디 등 중세 이탈리아가 낳은 세계적 문화예술인과 탐험가가 실려 있었다. 그러나 85년 대변신을 단행했다. 중세 인물 위주에서 근.현대 인물까지 포함하는 방식으로 세대교체를 단행한 것이다.

세계적 교육가인 몬테소리 여사를 비롯해 증기선 발명가인 마르코니, 바르코시대의 조각가 베르니니, 발명가 볼타, 오페라 작곡가 벨리니, 화가 바지오, 화가 라파엘로 등이 화폐의 새 얼굴이 됐다. 미켈란젠로, 다빈치 등만 실었던 데 대한 사과일 것이다. 이탈리아다운 여유이자 탄력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사진 2>

***신산업정신을 반영한 영국 파운드화**

영국 파운드화는 여러모로 독특하다.
화폐 앞면에는 예외없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초상을 싣고 있다. 아직도 대영제국시절의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는 보수적인 사회인 까닭이다. 그러나 돈 뒷면은 다르다. 파운드화는 세계 화폐들 가운데 유일하게 뒷면에도 인물 초상을 싣고 있다.

93년 이전까지 파운드화에는 영국이 자랑하는 근대물리학의 아버지 뉴튼을 비롯해 나폴레옹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웰링턴 장군,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 영국이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고 자랑하는 문호 세익스피어가 실려 있었다.

그러나 93년 영란은행은 대대적 인물교체를 단행했다. 17세기에 세계최초로 영국에 철도를 놓은 산업혁명의 선구자 스티븐슨(G.Stepbenson), 세계최초로 전동기를 만든 과학자 미첼 패러데이(M. Faraday),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의 초대총재 휴블런(Houblon), 19세기 영국이 낳은 위대한 소설가 찰스 디킨스 등이 그들이다. 영국을 유럽의 신산업혁명, 세계금융, 문화산업의 중심지로 재건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교체였다.

<사진 3>

***남녀평등 정신에 철저한 독일 마르크화와 호주 달러화**

독일 마르크화는 남녀평등 원칙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는 게 두드러진 특징이다.

마르크화에는 8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남성과 여성을 각각 네명씩 출연시키고 있다.
남성은 독일이 자랑하는 세계적 언어학자인 그림 형제를 비롯해 수학자 가우스(C.Gauss), 건축가 노이만(B.Neumann), 철학자이자 의사인 파울 에르리히(Paul Ehrlich) 등이다.
여성은 작가 아르민(Armin), 시인인 드로스테 흘쇼프(Droste Hulshof), 음악가인 슈만(C.Schumann), 과학자이자 화가인 메리안(Merian) 등이다.

호주 달러화도 남녀평등 원칙에 충실하기는 마르크화 이상이다.
호주 달러화의 경우 앞면에 여성인물이 있으면 반드시 뒷면에는 남성의 인물초상이 들어있으며(5달러, 20달러, 1백달러), 반대로 앞면에 남성의 인물초상이 있으면 뒷면에는 반드시 여성의 인물초상을 안배하는 세심함을 보여주고 있다(10달러, 50달러).

<사진 4>

***도전정신을 형상화한 뉴질랜드 달러화**

뉴질랜드 화폐는 신생국가답게 ‘도전정신’이 돋보인다.

뉴질랜드 달러화에는 세계 최초로 여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한 케이트 셰퍼드(Kate Sheppard), 세계 최초로 에베르스트산을 오른 에드먼드 힐러리(Edmund Hillary), 최초로 외국으로 유학을 가 노벨물리학상까지 수상한 루서포드(Ruther ford), 최초로 마오리족 출신으로 뉴질랜드 대학을 졸업하고 국민화합을 이끌어낸 아피라나 나가타(Apirana Ngata) 등 네 명이 실려있다.

<사진 5>

***메이지정신을 담은 일본 엔화**

옆나라 일본만 해도 우리보다 인물 선택에서 훨씬 개방적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기 전까지 엔화에는 군국주의 정치인과 군인 일색이었다. 화폐를 군국주의 선전의 도구로 활용한 탓이다.

그러다가 패망후인 46년 성덕태자 등 역사인물을 싣다가 지난 83년 개편을 통해 1868년 메이지유신을 이끈 교육자와 사상가, 문인들을 싣고 있다. 소설가 나스메 소세키, 도쿄대 총장을 지낸 ‘일본자유주의의 아버지’ 니도베 이나조,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지주이자 게이오대학 설립자인 후쿠자와 유기치 등이 그들이다.

<사진 6>

***바꾸고 싶어도 바꿀 수 없는 미국 달러화**

미국 달러화에는 초대 대통령이자 국부로 추앙받는 조지 워싱턴, 미국 독립선언을 쓴 벤자민 프랭크린, 노예해방을 이끌어낸 16대 대통령인 에브러험 링컨, 미국의 초대 재무장관인 A. 해밀턴(Hamillton), 7대 대통령인 A. 잭슨(Jackson) 등 다섯 명의 초상이 실려있다.

미국은 지난 1928년이래 70여년간 단 한번도 화폐속 인물을 바꾸지 않았다. 달러화가 세계 기축통화인 까닭에 도안 교체시 막대한 비용과 혼란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달러화 인물들이 다른 나라들 화폐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치성이 강하고 보수적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사진 7>

***'화폐속 세대교체'가 필요하다**

화폐속 인물은 선정 및 교체가 결코 쉽지 않다. 문중이나 종파, 정파 간에 소모적 논란을 야기할 위험성도 적잖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진 각국은 화폐속 세대교체를 부단히 단행해왔고, 필요하다면 앞으로도 계속해나갈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도 세대교체를 단행하는 과정에 무수한 갈등을 경험했다. 그러나 이들은 합리적 논의와 조정과정을 거쳐 갈등을 합의로 이끌어냈다. 이같은 ‘갈등과 조정’ 과정이야말로 새로운 시대정신을 창출하는 한 과정인 탓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나침반 없는 난파선에 비유되고 있다. 새 시대정신이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시기이다. 그런 맥락에서 사농공상(士農工商), 남존여비(男尊女卑), 숭문천무(崇文賤武)라는 화폐속 봉건 이데올로기를 수정할 때가 됐다는 지적이 많다.

누구를 택할 것인가.
그러나 중요한 것은 ‘누구’를 택할 것인가가 아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누구’를 고집하기에 앞서, 먼저 이같은 논의를 가능케 할 ‘여유와 합리성’이기 때문이다. 새 시대정신을 담을 화폐속 인물로 누가 적합할 것인지는 그 다음 문제일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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