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먹고 갈래요?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이영애가 연기하는 은수가 남자주인공인 상우에게 늦은 밤 헤어짐을 유보하기 위해 던지는 말이다. 방송국에서 일하는 은수와 소리를 수집하는 직업을 가진 상우의 사랑은 강원도 풍경 위로 겹쳐 자라나고 또 사그라진다. 삼척 신흥사의 대나무 숲에서 댓잎들이 바람에 맞닿으며 스르르 하고 소리를 연이어 쏟아낼 때마다, 우리는 상우와 은수가 사랑에 한 발 가까워졌음을 알게 된다.
은수가 해변에서 상우가 담아내는 파도의 소리를 듣는다. 파도소리를 담아내던 남자가 마이크를 제 쪽으로 옮겨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우리는 삼척 맹방해수욕장의 파도소리와 희미한 상우의 노랫말로 이들의 사랑이 더 깊어졌음을 느낀다. 둘의 이야기의 배경이 되었던 영화 속 풍경들을 사진처럼 간직하고 있다.
이 풍경을 애틋한 마음으로 간직하고 있는 이유는 영화 때문만은 아니다. 이 영화에서 본 장면들이 박제되어 필름 속에만 남아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한국의 마지막 석탄화력발전소 부지가 바로 이곳을 가까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발전소가 건설되면 해수욕장 초입에는 발전소 원료가 될 석탄을 싣고 나를 석탄부둣가 건설되고 해안을 메우게 될 것이다. 발전소의 온·배수가 들어가고 나올 터널이나 도로도 추가될 것이다. 내년 봄, 계획대로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면 5년 후부터 발전소를 완전 가동하게 될 것이라 한다.
봄철 미세먼지가 심각하지 않은 곳이 있기는 한가 싶지만, 삼척은 상황이 더 심각하다. 삼척시와 동해시를 걸쳐 참으로 사이좋게도 자리 잡아 있는 동양시멘트, 쌍용양회를 비롯한 동해북평화력발전소는 전국 대기오염물질 다량배출 사업장의 상위순위를 경쟁하는 사이다. 여기에 석탄화력발전소가 추가된다면, 사진처럼 간직된 삼척의 풍경 위로 미세먼지가 겹쳐지게 될 것이다.
게다가 더욱 안타까운 것은 맹방 해안림이다. 맹방 해수욕장을 따라 늘어진 소나무들은 길게는 100년부터 짧게는 50년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아마도 그곳 마을 주민들은 바닷바람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으로부터 농경지와 마을을 지키기 위해 소나무 중에서도 가꾸기 까다롭다는 해송을 길러냈을 것이다. 동해의 바닷바람 덕에 이 숲의 나무들은 수령에 비해 올곧게도, 두껍게도 자라나지 못했지만, 그 자체로 독특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이 숲은 이미 8년 전 한 번 큰 생채기를 겪었다. 강원도 곳곳이 골프장으로 몸살을 앓던 때, 숲 일부가 잘려나갔다. 삼척시는 공유지였던 맹방 해안림을 사업자에게 싼값에 넘기고, 원주지방환경청은 해안의 지질적 지형적 특징과 곰솔의 자연 문화적 가치가 매우 높기에 보전해야 한다고 말해 놓고도 골프장을 허가했다.
그래도 숲은 지난 수십 년간 바닷바람을 견뎌왔던 것처럼 그때의 위기를 견디고 영화에서처럼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사랑의 배경이 되고, 추억의 장소가 되어주고 있다. 굽어 자라는 소나무 숲은 여전히 아름답고 모래바람과 해일로부터 마을을 지켜내는 제 소임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석탄화력발전소는 다르다. 발전소가 건설되고 부두가 바다를 메워 세워지면 해류의 변화를 막기 쉽지 않다. 해류의 변화는 해안의 모래 유실을 불러오고, 모래가 쓸려 가면 숲도 불안해질 것이다. 해안침식이 시작되면 막을 방법이 없다. 게다가 며칠 전에는 석탄화력발전소 부지에서 계획과정에서는 확인하지 못한 천연석회동굴을 확인했다. 이 복잡한 연결고리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영향평가를 하고 저감 방안을 마련한다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일부에 그칠 뿐이다.
석탄화력발전소가 이 숲보다 더 중할 이유는 없다. 온 세계가 대기오염과 기후변화로 석탄 문명의 전환을 고민하는 시대에 말이다. 다행히 석탄화력발전소의 건설을 막으려는 주민 700여 명이 정부를 상대로 발전소 건설계획 승인 취소 소송을 올 4월에 제기했다. 해가 바뀌고 나면 소송이 재개될 것이다.
주민들과 함께하고 있는 변호사들에 의하면, 해안침식과 함께 기준이 초과된 석탄발전소가 배출하는 대기오염물질의 위해도에 관한 쟁점이 재판과정에서 드러날 것이라 한다. 석탄화력발전소를 건설하면 우리가 내주는 것은 숲과 바다의 풍경만이 아니다. 더욱 뜨거워지고 더욱 견디기 어려워지는 여름, 그리고 더욱 더러워지고 숨쉬기 어려운 봄이 기다리고 있다.
'봄날'만 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살만한 계절도 갈 것이다. 곧 열릴 재판에서 주민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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