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한일청구권 협정 관련 사건에 대한 헌법재판소 내부 기밀을 빼내 김앤장 법률사무소에 건넨 정황이 드러났다.
'사법농단'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은 당시 법원행정처가 일본 전범기업을 대리하던 김앤장과 하나의 '팀'처럼 움직이며 김앤장에 헌재 기밀까지 알려준 것으로 파악했다.
5일 법원과 검찰 등에 따르면 서울중앙지검 수사팀(팀장 한동훈 3차장검사)은 2015년 10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헌재 파견 법관으로부터 헌법소원 관련 기밀을 넘겨받아 김앤장에 건넸다는 복수의 진술과 관련 문건을 확보했다.
임 전 차장은 김앤장 송무팀을 이끌면서 신일철주금·미쓰비시 등 전범기업 소송 대리를 지휘하던 한모 변호사에게 한일청구권 협정 헌법소원 사건의 심리 계획과 담당 헌법연구관의 법리 검토 내용까지 알려준 것으로 파악됐다.
당시 법원행정처는 일본 전범기업에 배상책임이 없다는 쪽으로 기존 대법원 판결을 뒤집을 계획을 세우고 김앤장과 사건 처리 방향을 논의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한일청구권 협정의 위헌 여부에 대한 헌재의 판단이 대법원에 계류 중이던 민사소송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이 같은 무리수를 둔 것으로 검찰은 보고 있다.
한국 국민의 일본에 대한 청구권이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선언한 한일청구권 협정이 헌법에 어긋난다는 판단이 나온다면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전범기업으로부터 배상 판결을 받을 수 있는 여지가 그만큼 커지게 되는 상황이었다.
김용헌 당시 헌재 사무처장은 2015년 9월 헌재 국정감사에서 한일청구권 협정 헌법소원 결정이 늦어지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금년 말까지 마칠 것으로 안다"고 답했다.
이후 임 전 차장은 헌재에 파견 나가 있던 최모 부장판사에게 "헌법소원 사건을 자세히 파악해 보고하라"고 지시한 뒤 헌재 연구관 보고서 등을 10여 차례에 걸쳐 이메일 등으로 건네받고 이를 김앤장에 전한 것으로 파악됐다.
한 변호사는 그해 5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양승태 당시 대법원장과 만나 징용소송 처리 방향을 논의하기도 했다.
검찰은 옛 사법부가 소송의 일방 당사자인 김앤장에 재판 방향을 알려주는 수준을 넘어 불법 수집한 다른 기관 기밀까지 넘겨줄 만큼 심각하게 유착했다고 판단하고 있다.
법원행정처는 한일청구권 협정 헌법소원 이외에도 과거사 소멸시효 사건, 평택·당진항 일대 공유수면 매립지 관할을 둘러싼 권한쟁의심판 사건 등 법원과 밀접하게 연관된 헌재 사건의 내부기밀을 지속적으로 빼돌린 것으로 조사됐다.
검찰은 헌재 기밀유출이 법원행정처장을 연달아 지낸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의 지시에 따라 이뤄졌다고 보고 두 전직 대법관의 구속영장에 직권남용 혐의 범죄사실로 적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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