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선언에서 양국 지식인들은 △일본의 한국 병합 과정이 불의·부당하다는 점 △일본이 병합의 근거로 삼은 병합조약 역시 불의·부당하다는 점 △병합조약 및 그 이전에 체결된 모든 조약·협정을 원천 무효라고 선언한 1965년 한일기본조약 제2조에 대한 해석은 이미 원천 무효(already null and void)였다고 하는 한국 측의 해석이 공통된 견해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점을 선언하였다.
한일 지식인 선언은 병합조약 자체를 불법이자 무효라고 규정한 '불법무효론' 즉 '한일병합 불성립론'을 수용한 최초의 양국 지식인 선언이라는 점에 역사적 의의가 있다.
그동안 한일병합조약에 대한 일본 지식인 사회의 주류 시각은 일본이 한반도를 강점한 것은 도덕적으로 부당했지만 법적으로 유효하다는 '유효부당론'이었다. 종전 50주년이 되는 1995년 8월 15일 무라야마(村山富市) 총리는 담화문을 통해, "우리나라는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 특히 아시아 여러 국가 국민들에게 막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저는 의심할 여지도 없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여기서 다시 한 번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합니다."라고 사과하였다.
식민 지배와 침략의 부당성에 대해 반성을 표시한 '무라야마 담화문'은 식민 지배를 공식적으로 그리고 가장 적극적으로 사죄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그러나 강제 동원 피해자에 대한 배상 문제와 군 위안부 문제 등은 언급하지 않았으며, '한일병합의 강제성'을 인정하는 내용을 담지 않았다는 점에서, '유효부당론'에 머문 한계가 있었다.
이에 맞서 일본의 우익 단체인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은 식민 지배가 합법적이며 유효하다는 '합법정당론'을 주장하였다. 이들이 검정용으로 제작한 교과서에서는 한국 병합에 대해 "1910년 일본은 한국을 병합했다. 이는 동아시아 안정을 위한 정책으로 구미 열강의 지지를 받은 것이었다. 한국 병합은 일본의 안전과 만주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필요했다.(…) 한국 병합은 국제 관계의 원칙에 따라 합법적으로 이뤄졌다"라고 서술하였다. 일본의 식민 통치는 정당하며 병합조약 역시 합법적이라는 '합법정당론'에 입각한 서술 내용이다. 일제 강점기를 "근대 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함으로써 근대 국민국가를 세울 수 있는 '사회적 능력'이 두텁게 축적되는 시기"로 파악하는 뉴라이트와 다르지 않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제정하고 기려야 한다는 이른바 '건국절' 주장이다.
▲ 이명박 정부는 정권 초기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려다 반대에 부딛혔다. ⓒ청와대 |
1. 건국절 경축일 제정 주장
광복절보다 건국절을 경축일로 제정해야 한다는 뉴라이트 주장을 사회 전체로 확산시키는 데 앞장선 것은 친일·독재 미화 세력이었다. 광복절 하면 해방과 독립운동이 떠오르지만 건국절 하면 이런 의미가 희석되거나 사라지고 친일파가 복권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었다.
뉴라이트가 "대한민국이 환갑 잔칫상을 받는 해"라고 주장하는 2008년, 한나라당의 정갑윤·정두언·조전혁 의원 등 13명이 "8월 15일을 광복절이 아닌 '건국절'로 기념하자"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국경일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국회에 발의하였다(2008.7.3.). 8월 15일 기념식이 광복절의 의미에만 국한되어 있고, '대한민국 건국'의 의미는 축소되어 건국 이념과 역사적 중요성이 점점 잊혀간다는 이유에서였다.
8월 15일을 광복절이 아닌 '건국일'로 기념하여, 반세기 만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하는데 근원이 된 자유민주 건국 이념을 새롭게 가다듬고, 건국 정신을 드높여 대한민국 정체성과 정통성을 수호하며, 헌법 정신에 맞는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자연스럽게 국민 의식 속에 자리 잡게 함으로써, 자유와 번영이 넘치는 미래지향적인 대한민국을 추구함과 동시에 국민 의식 통합과 국가 발전의 의식을 고취하는 게 지향하는 목표였다.
이와 관련하여 교과서는 '건국절'의 역사적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8월 15일 광복절은 대한민국의 4대 국경일 가운데 하나이다. 광복절의 경축 대상은 1945년 8월 15일 한국 민족이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사건과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사건 두 가지이다. 이 두 사건은 모두 중요하지만 종래 1945년의 해방만 주로 기억하고, 1948년의 건국에 대해서는 민족의 분단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소홀하게 여겼다. 그렇지만 1945년의 해방만으로 해방의 진정한 의미가 성취된 것은 아니었다. 해방의 진정한 의미는 1948년 자유, 인권, 시장 등의 인류 보편의 가치에 입각하여 대한민국이 세워짐으로써 비로소 확보될 수 있었다. 지난 60년간의 대한민국 건국이 한국인의 삶을 자유롭고 풍요롭게 만들었다. 앞으로 다가올 통일한국도 대한민국의 이념에 입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시각에서 광복절의 역사적 의미를 미래지향적으로 고쳐 생각해야 한다. 종래 광복절을 해방절로만 기억해 온 것을 지양하고, 보다 중요하게 건국절로 경축해야 한다. 그날에 나라를 세우는 데 공이 컸던 선인들을 기리고 그들이 추구했던 건국 이념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144쪽)
지금까지 8월 15일을 대한민국이 일본제국주의의 식민 지배로부터 해방된 광복절로만 기억해 온 것을 지양하고, 앞으로는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된 건국절로 더 중요하게 경축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교과서는 그 이유로 △1948년이 대한민국 건국 원년이라는 점 △해방의 진정한 의미가 대한민국이 건국됨으로써 비로소 확보되었다는 점 △대한민국 건국 이념이 미래 통일한국의 이념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점 등의 세 가지를 들었는데, 이들 주장의 타당성 여부를 살펴보겠다.
2. 대한민국 성립 시점
먼저 대한민국 성립 시점에 관한 문제이다. 교과서는 1948년이 대한민국 건국 원년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명박 정부도 이와 같은 입장이었다. 2008년 8.15경축사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올해는) 대한민국 건국 60년'이라고 하였으며, 각계 원로와 전문가를 중심으로 건국60년기념사업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여러 가지 기념 사업을 추진하였다. 뉴라이트의 주장에 정부가 장단을 맞추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기점이 1948년이라는 주장은 '대한민국은 3.1정신을 바탕으로 한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다'는 헌법 정신을 부정하는 망발이다.
제헌헌법은 그 전문(前文)에서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 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 독립 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라고 하여, 1948년에 수립하는 대한민국 정부는 1919년에 삼천만의 민의에 의해 수립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여 '재건' 즉 다시 세우는 것이라고 하였다. 헌법에 따르면, 1948년에는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정부를 수립한 것이며, 이해는 대한민국 원년이 아니라 30년이 된다. 1948년 정부 수립을 선포할 당시 이승만 대통령을 포함해 어느 누구도 '건국'을 표방하지 않았다.
이승만이 대통령에 취임한 후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9월 1일자로 관보를 냈는데, 정부의 관보 1호에서 그 간기(刊記)를 "민국 30년 9월 1일"이라고 하였다. 민국이란 대한민국의 연호를 말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서기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국호인 '대한민국'을 연호로 사용했고, 1919년을 '대한민국 원년'이라고 했다. 대한민국이 세워진 해는 1948년이 아니라 1919년, 바로 임시정부가 세워진 해이다.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가 처음 열렸을 때, 초대 국회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개원식에서, "오늘 여기서 열리는 국회는 즉 국민대회의 계승이요, 이 국회에서 건설된 정부는 즉 기미년에 서울에서 수립된 민국임시정부의 계승이니, 이날이 29년 만에 민국의 부활임을 우리는 이에 공포하며, 민국 년호는 기미년에 기산할 것이요(…)"라고 하였다. 이승만은 대통령 취임사에서도 말미에 "대한민국 30년 7월 24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이라고 표기하여,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음을 분명히 했다.
이승만은 1948년을 건국의 해로 했을 때 생기는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1948년을 건국의 해로 잡으면 연합국, 즉 다른 강대국들이 한국을 해방시켜 주고, 그 덕분에 나라를 세운 타율적인 국가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제의 수많은 학정에도 불구하고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고 그 힘을 몰아서 나라를 세웠다고 해야만 참다운 독립국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이승만은 아주 분명하게 지적하였다(이만열, 2009, 121-122쪽).
대한민국 건국 원년이 1948년이 아니라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한 1919년임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라이트가 건국 원년을 1948년이라고 주장하는 까닭은 "임시정부는 자국의 영토를 확정하고 국민을 확보한 가운데 국제적 승인에 바탕을 둔 독립 국가를 대표한 것은 아니다. 실효적 지배를 통해 국가를 운영한 적도 없었다."(박효종 외, 2008, 114쪽)라는 데 있다. 자국의 영토와 국민에 대해 실효적 지배를 하지 못한 임시정부는 선언적·상징적 의미 이상을 지닐 수 없다는 주장이다. 임시정부는 실제적 국가가 아니므로, 진정한 국가 수립은 1948년에야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뉴라이트처럼 실효적 지배를 기준으로 일제 강점기를 파악할 경우 독립운동의 역사는 실종되게 마련이며, 한국의 영토와 국민을 실효적으로 지배한 조선총독부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결국 식민 지배는 합법적이고 유효하다는 '합법정당론'의 입장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일제의 불법적인 한반도 강점으로 인해 한국은 국가의 '행위 능력'은 상실하였지만 국가로서 '권리 능력' 내지 권리 주체성은 계속 보유하면서 존속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일제 강점 당시 우리 한국의 국가적 상태는 일본제국의 영토 강점으로 인하여 사실상 국가가 와해되어 제 기능을 다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기는 하지만 법적으로는 한국이라는 국가 자체가 소멸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한국이라는 국가가 사실상 존재를 잃고 사라졌으나 규범적으로는 그대로 존속하는 상태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제강점기 동안 비록 한국의 국가 조직은 일제의 물리적 힘에 의하여 와해된 상태에 있었으나, 그 국가 자체는 규범적·관념적으로 존속하고 있었다는 것이다(김승대, 2006, 16쪽).
제헌헌법에 이러한 정신이 잘 반영되어 있다. 헌법기초위원이었던 유진오 박사는 "금번 헌법을 제정하여 수립하고자 하는 정부는 기미년에 삼천만의 민의에 의하여 수립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계승하여 재건하는 것"이라고 하였다(헌법해의, 16쪽). 국가의 권리 주체성을 3.1운동에서 천명하였으므로, 이때를 대한민국 성립의 출발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국의 식민지하에 있었던 미국도 우리와 같은 입장이다. 미국이 독립기념일(Independence Day)로 기리는 1776년 7월 4일은 당시 북아메리카에 있던 영국의 13개 식민지 대표들이 필라델피아 의사당에 모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한 날이다. 독립을 선언하기는 했지만, 1776년 당시에 미국은 아직 영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독립을 인정받지 않은 상태였고, 영국과 전투가 한창이었다. 영국이 전투에서 패배한 후, 미국의 독립을 인정한 것은 그 뒤로부터 7년 뒤인 1783년이고, 미국의 헌법이 선포된 것은 1788년이며, 조지 워싱턴을 초대 대통령으로 미국 정부가 수립된 것은 1789년이다. 미국 역시 독립의 시점을 국가의 권리 주체성을 선언한 날로 보고 있다.
헌법이 대한민국 정통성의 뿌리를 독립운동에 두고 있기에, 해방 이후 식민 잔재를 청산하는 법을 마련할 수 있었다. 제헌헌법은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부칙 제101조)라고 규정하여,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반역 행위를 처벌하는 헌법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는 형벌불소급의 원칙에 반하는 위헌적 요소가 있는 규정이었다. 이에 대해 유진오 박사는 "본래 형벌불소급의 원칙이라는 것은 헌법의 동일성 즉 헌법 제정 권력의 동일성을 전제로 하여 성립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므로, 헌법의 동일성이 전연 끊어지고, 헌법 제정 권력이 전연 개체(改替)되는 혁명 시기에 있어서는 이러한 특별법은 다른 나라에 있어서도 그 예가 없지 아니하다."(헌법해의, 208쪽)라고 하여, '이행기의 정의(transitional justice)'를 내세워 소급 입법의 정당성을 역설하였다.
헌법이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행하여 민족에게 해를 끼친 자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국회가 제정할 수 있다고 한 것은, 한일합병으로 현실적으로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지만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규범적·관념적으로 존재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즉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강박과 위협에 의한 강제 점령으로서 법적 정당성이 결여된 불법 통치인 점 △일제강점기에도 한국의 국가성의 존속이 인정되어야 하므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일제 협력은 국가에 대한 반역 행위에 해당한다는 점 △일제의 강점 기간 동안 한국의 국가 기능은 사실상 소멸하여 행위 당시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처벌이 불가능하였으므로, 해방 이후 소급 입법에 의한 제재가 불가피하다는 점 등을 고려한 끝에 마련한 방책이었다(김승대, 2006, 53쪽).
이상 뉴라이트처럼 '실효적 지배' 운운하며 임시정부의 법통을 인정하지 않는 주장은, 대한민국이 독립운동의 전통을 계승하여 성립한 독립국가라는 헌법 정신을 부정하는 것이며, 조선총독부의 식민 통치가 정당하며 합법적이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3. 대한민국 성립 이념
다음은 대한민국 성립 이념이다. 교과서가 광복절보다 '건국절'을 기려야 하는 이유로 또 하나 든 것은 해방의 진정한 의미가 자유·인권·시장 등의 인류 보편의 가치에 입각해 대한민국이 건국됨으로써 비로소 확보될 수 있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민주주의의 실제 출발기점은 1948년 8월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보아야 한다"(박효종 외, 같은 책, 114쪽)는 주장이다. 여기서 말하는 민주주의란 자유민주주의를, 시장경제란 자유 시장경제를 뜻한다(자세한 내용은 앞의 글 '11월22일, 이승만-박정희가 부활한다' 참조). 그러나 이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식민 지배 억압과 차별에 맞서 싸우면서 내용을 채워나간 역사적 형성물이 아니라 외국을 통해 전래된 수입품으로 보는 입장으로, 다음 세 가지 점에서 잘못된 주장이다.
첫째,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출발점은, 뉴라이트가 주장하는 것처럼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수입한 1948년이 아니라 1919년 3.1운동이었다. 3.1운동 이후 운동 이념선상에서 복벽주의(復辟主義)가 청산되고 민주공화제 이념이 전면적으로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3.1운동을 통해 분출된 민족의 독립 의지를 결집하여 출범한 상해임시정부는 최초의 공화주의 정부였다. 같은 해 4월 11일에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임"을 선언하였다. 새로 건국할 민족국가의 기본 방향이 평등사회 건설에 있음을 밝힌 것이다. 임시정부에서 등장한 평등 이념은 제헌헌법에 지대한 영향을 주어 대한민국이 지향하는 기본 가치가 되었다.
둘째, 대한민국이 추구한 핵심 가치는 교과서가 주장하는 것처럼 '자유'가 아니라 평등이었다. 유진오는 제헌헌법의 특징으로 제일 먼저 '균등사회의 수립을 기한 것' 즉 경제적 민주주의의 수립을 꼽았다. "우리나라 헌법은 국민의 균등 생활을 보장하기 위하여 특히 노력하였으며, 그를 위하야 제종의 규정을 설치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 헌법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즉 우리나라 헌법은 다른 민주주의 국가와 같이 정치적, 법률적으로 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하고자 하였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실질적으로 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하고자 한 것"(헌법해의, 10쪽)이라는 설명이다.
제헌헌법은 형식적·정치적 민주주의가 약자의 경제적 불평등을 해결하지 못한다고 보고, 실질적·경제적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민주주의를 채택하였다. 이는 제헌헌법이 표방한 민주주의가 단순히 미국에서 직수입한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독립운동의 전통을 반영한 역사성이 있는 민주주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이 지향하는 민주주의는 뉴라이트가 주장하는 것처럼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의 자유를 보장하는 사회적·경제적 민주주의다(자세한 내용은 앞의 글 '11월22일, 이승만-박정희가 부활한다' 참조).
셋째, 대한민국이 표방한 시장경제는 뉴라이트가 주장하는 것처럼 약육강식을 정당화하는 자유 시장경제가 아니라, 경제 민주화를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 시장경제였다. 대한민국의 경제 질서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우리 헌법의 경제 질서는 사유재산제를 바탕으로 하고 자유경쟁을 존중하는 자유시장 경제 질서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이에 수반되는 갖가지 모순을 제거하고 사회복지·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국가적 규제와 조정을 용인하는 사회적 시장경제질서로서 성격을 띠고 있다."(헌재 1996.4.25. 92헌바47)라고 판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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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래 통일의 방향
마지막으로 미래 통일의 방향이다. 교과서가 건국절을 국경일로 기려야 하는 이유로 마지막으로 든 것은, 미래 통일한국이 대한민국의 건국 이념에 입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통일은 반드시 지난 60년간 대한민국이 지키고 가꾸어온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원리를 토대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인데, 아래 글에서 보는 것처럼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입각한 흡수통일론이다.
"우리가 왜 통일하려고 합니까? 하나의 민족이기에 하나로 합쳐야 한다고 얘기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통일해야 하는 이유는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됨으로써 북위 38선 이북 지역에도 대한민국의 법질서가 미쳐야 하는데, 분단되어 그럴 수 없으니 하루빨리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북한지역에서도 실현하여 그곳 주민들도 자유롭게 살 수 있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통일이지, 같은 민족이니 무조건 합쳐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김영호, 2008, 160쪽)
그러나 대한민국은 7.4남북공동선언 직후에 마련된 유신헌법에서 평화통일의 책무를 민족의 지상과제로서 헌법상 의무화하였다. 남북한의 통일은 평화주의에 기초한 통일이어야 한다는 평화통일의 원칙이 대한민국 통일의 기본 원칙이다. 남북 관계에서 괄목할 진전을 보인 것은 6월 항쟁 이후에 성립한 제6공화국에서였다.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의 7.7선언에 이어, 이듬해 국회에 보고된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1989.9.11.)은 남북연합을 거치는 단계적 통일이라는 한국 정부의 기본 방향을 제시한 역사적 문건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1991년 말에 서명되어 1992년 초 발효한 '남북기본합의서'라는 뜻깊은 열매가 뒤따랐다(백낙청, 2012, 101쪽).
2000년 6.15공동선언을 통해, 남북의 정상들은 국가연합 내지 낮은 단계의 연방이라는 중간 과정을 거쳐서 통일로 간다는 점에 합의하였다. 그리고 2007년의 제2차 남북정상회담과 10.4선언을 통해, 민족의 존엄과 이익을 위해 6.15공동선언을 고수하고 적극 구현할 것을 다짐하였다. 남북 간의 화해와 협력, 공존과 불가침이라는 시대적인 흐름에 발맞추어 평화체제 구축과 남북연합 건설이 앞으로의 핵심 의제다. 반면 뉴라이트의 흡수통일론은 1950년대에 이승만이 주창하였던 북진통일론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냉전적 사고에서 나온 분단 고착화 주장이다.
게다가 분단 정부 수립을 정당화하기 위해, "대한민국을 건국한 공로는 1948년 8월 정부수립에 참여했던 인물들의 몫으로 돌리는 것이 마땅하다."(박효종 외, 같은 책,114쪽)는 주장까지 하였다.
이들 주장대로라면, '좌우 통합과 남북 협상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 운동'을 주도하다가 살해된 여운형이나,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에 맞서 '삼천만 동포에 읍소(泣訴)한다'는 제목으로 남조선의 단정 수립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한 김구, 그리고 공동 성명 형식으로 남한 총선거 불참의 의사를 표시한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조성환, 홍명희, 오화영 등 통일정부 수립 운동에 참여한 이들은 대한민국 건국 공로자가 될 수 없다.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였으므로, 대한민국의 정체성·정통성을 부정한 반국가사범이 된다. 그러나 이들 민족지도자들은 단선·단정은 필연적으로 민족 상호 간의 혈투를 초래하여 "내쟁(內爭) 같은 국제 전쟁이요, 외전(外戰) 같은 동족 전쟁"이 발발할 것임을 경고하였다. 동족의 피로써 국토를 물들이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막기 위해서는 남북협상을 통해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 단독 정부수립에 반대한 이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또한 뉴라이트 주장대로라면 건국 즉 남한 단독으로 정부를 수립하는 단정운동은 이승만 한민당과 함께 친일파가 주도했으므로, 친일파가 대한민국 건국 공로자가 되어야 한다. 뉴라이트의 '건국절'론은 반민족행위자인 친일파를 건국 유공자로 둔갑시키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주장이다.
"건국절? 헌정 질서 짓밟는 참으로 위험천만한 발상"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임시정부의 법통과 4월혁명의 저항정신을 국가 정체성으로 선언한다. 친일세력과 독재세력을 배격하는 게 헌법의 기본 이념이자 정신이다. 대한민국 헌법이 그동안 9차례 개정되었지만 전문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였다"는 내용이 부정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헌법 정신에 비추어 볼 때, 식민 지배는 불법이고 무효이다. 반면 '건국절'론은 식민 지배가 합법적이고 정당하다는 '합법 정당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대한민국의 헌법 정신을 부정하며 헌정 질서를 짓밟는 참으로 위험천만한 발상이다.
한국 현대사는 세 물줄기를 계승하고 있다. 첫째, 항일 독립투쟁, 둘째, 반독재 민주화투쟁, 셋째, 분단 극복 통일운동이다. 그런데 이를 거부하고 왜곡하는 자들이 바로 건국절을 주장하는 이들이다. 항일 독립투쟁을 거부하고, 독재에 협력하고, 통일에 반대하는 그야말로 반민족·반민주·반통일 부류가 바로 그들이다(함세웅).
참고한 글
김승대,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에 대한 헌법적 법리 연구', 2006.8.
박효종 외, 『건국 60년 위대한 국민-새로운 꿈』, 기파랑, 2008.
김영호 편, 『대한민국 건국 60년의 재인식』, 기파랑, 2008.
이만열,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한 독립운동',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묻다』, 철수와 영희, 2009.
와다 하루키, '한국병합 100년과 일본의 사죄', 경향신문, 2010년 1월 5일
한시준, '대한민국의 원년은 1948년이 아니라 1919년이다', 한국일보, 2012년 4월 12일
백낙청, 『2013년 체제 만들기』 창비,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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