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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변 옛 도읍지 노닐며 한 해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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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한강변 옛 도읍지 노닐며 한 해를 보낸다

2018년 12월 고을학교는 <하남·광주고을>

12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 제62강은 송년기행으로, 한성백제 옛 도읍지로 비정되는 <하남고을>과 왕족·사대부들의 묘역이 많이 남아있는 <광주고을>을 찾아갑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광주고을 천진암은 18세기 후반 유학의 젊은 선비들이 불교의 암자에서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고 실천하며 천주교회를 세운 곳으로 세계에서 유일하게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신앙생활이 시작된 역사의 현장이다.Ⓒ디모테오

고을학교 제62강은 2018년 12월 16일(일요일) 열리며(성탄연휴로 한 주일 당겨 셋째 일요일에 열립니다^^) 오전 8시 서울을 출발합니다.(서울에서 가까워 출발시각을 오전 8시로 한 시간 늦춥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7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62강 여는 모임.

이날 답사 코스는 하남IC-하남시-선성군묘역-이성산성(동문지/건물지)-동사지(3층석탑/5층석탑)-광주향교-교산동건물터-교산동마애약사여래좌상(선법사)-사충서원-점심식사 겸 뒤풀이-광주시-이택재-정충묘-신립장군묘역-허난설헌묘-천진암-서울의 순입니다.

▲<하남·광주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62강 답사지인 <하남·광주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한성백제의 도읍지 아니었을까
광주는 지금은 하남과 나누어져 있지만 역사적으로 하나의 지역으로서 신주, 북한산주, 남천주, 한주 그리고 광주로 시대에 따라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하남지역은 한성백제의 도읍으로 비정되는 곳으로 그와 관련된 유적이 남아 있고 광주지역은 한양에서 한강 건너 가까이에 있어 왕족과 사대부들의 묘가 많이 있습니다.

하남시 춘궁동과 교산동 일대가 한성백제시대 도읍지(위례성)라고 정확하게 명시된 사료는 아직까지 발견되지는 않았습니다만, 옛 문헌과 현재 발굴된 사료 등을 종합하여 남한산성 북문 밑 춘궁동 일대(궁안 또는 고골)를 백제의 첫 도읍지로 보는 소수의 견해가 있습니다.

춘궁동과 교산동 일대는 동쪽에 남한산성과 검단산이, 서쪽에 이성산과 이성산성이, 남쪽과 북쪽에 한강과 비옥한 평야 등이 펼쳐져 있는데, 검단산 정상 부근에서 동명성왕(주몽)에 제(祭)를 지냈던 제단으로 추정되는 유적이 발견되었고 도읍의 방어시설로 보이는 이성산성 정상에서도 천단(天壇)과 지단(地壇) 등으로 여겨지는 8각, 9각 건물지가 발굴되었습니다.

이를 뒷받침 하듯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온조왕이 백제를 건국한 원년(BC 18년) 동명묘를 세웠고 이후 나라에 우환이나 왕이 등극한 정월에는 왕이 직접 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8차례나 나오고 고이왕 10년에 대단(大壇)을 설치해 제를 올렸는가 하면 근초고왕 2년에 천지신께 제를 올렸다는 기록도 나옵니다.

검단산(657m)은 한성백제 500년의 도읍지인 하남 위례성을 지키는 영산으로, ‘검’은 거룩하고 신성한 숭배의 대상을 일컫던 말로 ‘검단’이란 성스러운 제단을 의미합니다. 곳곳에 백제 초, 중기의 왕들이 국가의 번영과 태평을 빌었던 재단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교산동 건물지는 검단산의 한 줄기인 객산 기슭에 있으며 북쪽을 제외한 동, 서, 남쪽에 대형건물지가 ‘ㄷ’자 형태로 자리 잡고 그 외곽으로 토루가 둘러싸고 있습니다. 이곳은 백제의 하남 위례성과 관련된 건물지로 오랫동안 주목을 받아왔으나 기전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조사를 한 결과 백제의 하남 위례성과 관련된 유구 및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고 ‘관(官)’ ‘광주객사(廣州客舍)’ 등의 각종 명문 기와를 비롯하여 백자와 제기들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광주의 주치(州治)와 관련된 건축물로 추정됩니다.

이성산은 돌로써 성을 둘러쌓은 흔적이 남아있고 주춧돌과 기와장, 그릇의 파편이 발견되고 있어 이곳이 건물지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전설에 백제왕자 두 사람이 이 산에 거주하였다하여 이성산이라 하였다고 하나 분명한 증거가 없으며 백제왕자 두 사람이 아니라 비류와 온조 두 사람을 가리킨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한강지역 요충지 이성산성
이성산성(209.8m)은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에서 북쪽으로 내려오는 산줄기와 만나 길게 맥을 형성하는 금암산에 접해 있으며, 남쪽은 높은 산들이 있으나 북쪽은 작은 구릉만 있어 한강 주변지역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요충지입니다. 성벽의 높이는 6∼7m, 둘레는 1.84km로, 주봉을 중심으로 자연지형을 따라 축조하였으며 성안에서 삼국시대 건물지(8각, 9각, 장방형 등)와 부대시설(문지, 배수구 등), 목간, 철제마 등 총 3,352점의 유물이 발굴되었습니다.

발굴된 목간에 명시된 명문기록 중 ‘무진년’은 603년으로 추정되며 출토된 토기들은 황룡사, 안압지에서 출토된 토기들과 유사하여 통일신라 토기로 보이며 신라가 5세기 중엽 한강유역을 점령한 후 축조된 것으로 매우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하남지역을 왕궁지라고 주장하는 이유 중에 이곳 지명들이 왕궁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춘궁동을 ‘궁안’ 또는 ‘궁말’ 등이라고 불렀고 상사창동(上司倉洞)과 하사창동(下司倉洞) 등도 왕궁의 곡식 등을 저장하던 창고(정부의 양곡창고)와 연관된 명칭이며 항동(巷洞)이란 지명에 왕궁 주위로 관공서들이 즐비한 골목을 뜻하는 항(巷)자가 들어 있습니다.

또한 왕궁터 남쪽에는 천왕사지(天王寺址)가, 서쪽(고골저수지)으로는 동사지(桐寺址)가 자리하고 있으며 이 사찰들의 이름과 불사를 한 흔적, 규모, 위치 등으로 미뤄 건립시기를 한성백제로 볼 수도 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특히 천왕사지는 조선시대까지 있었다는 것이 사료를 통해 확인됐으며 규모면에서도 약 6만㎡에 이르는 큰 사찰이었습니다.

동사지(桐寺址)는 동북으로 남한산성과 이성선성이 보이는 분지에 있는 고려 초기에 창건된 거대 규모의 절터로서, 금당의 규모가 경주 황룡사에 필적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1988년 발굴 작업 시 ‘桐寺’라는 명문기와가 출토되어 절터임이 확인되었고 이외에도 금동불상과 막새기와, 동으로 만든 불기와 도자기들이 출토되었습니다. 8각 구조물과 건물터 등 유구의 상태, 건축양식 또한 독특하여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절터에는 현재 두 개의 석탑이 남아 있습니다.

동사지 5층석탑은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2층의 기단과 5층의 탑신으로 이루어져 있고 몸돌 비율이 상층에 이를수록 급속히 줄어들고 1층의 몸돌이 2단으로 이루어진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체적인 느낌은 날렵하고 경쾌하여 신라 석탑의 양식을 엿볼 수 있으며 보물 제1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동사지 3층석탑도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2층의 기단과 3층의 탑신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층의 몸돌이 지나치게 큰데 비해서 2층과 3층은 현저히 줄어들고, 지붕돌도 이에 비례해 줄어들었습니다.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을 그대로 이은 정사각형의 석탑으로 조성 연대는 고려 중기 이전으로 보고 있으며 보물 제1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교산동마애약사여래좌상은 1m가 되지 않는 삼각형 바위에 조각된 마애불로 조각술이 정교하고 불신의 비례도 훌륭합니다. 왼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으며 불상의 왼편에는 ‘太平二年丁丑七月二十九日古石佛在如賜乙重修爲今上皇帝萬歲願’이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는데 새겨보면 “태평 2년(977) 정축 7월 29일에 옛 석불이 있던 것을 중수하오니 지금 황제의 만세를 기원합니다”입니다. ‘태평 2년 정축’은 고려 경종 2년(977)이며 보물 제981호에 지정되었습니다.

신라가 553년(진흥왕 14) 한강 하류지역을 차지하고 하남 일대에 신주를 설치하고 초대 군주로 김유신의 조부 김무력을 임명하였는데 신주의 위치는 이성산성 일원 또는 교산동 건물지 일대로 추정됩니다. 557년(진흥왕 18) 신주를 폐지하고 한강 이북인 지금의 서울 지역에 북한산주를 신설하여 그 관할로 들어갔으며 662년(문무왕 2) 남천주, 664년(문무왕 4) 한산주, 757년(경덕왕 16) 한주로 그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고려시대는 940년(태조 23) 행정구역을 주, 부, 군, 현으로 바꾸면서 하남이 속한 지역은 광주(廣州)로 바뀌고 983년(성종 2) 지방 관제를 실시하면서 목사를 파견하여 광주목을 설치하였고 1310년(충선왕 2) 원의 침입으로 광주목(牧)이 혁파되고 광주부(府)로 강등되었으며 1356년(공민왕 5)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행정구역을 다시 광주목으로 되돌렸습니다.

조선시대 전국을 8도 체제로 확립하면서 경기도 소속이 되었고 관아인 읍치를 하남 ‘고골(춘궁동)’에 두고 동, 서, 남, 북 등 4개면으로 나누었으며 1577년(선조 10) 광주목이 부로 승격되었고 1623년 임진왜란 때 한양을 방어해야 하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유수 겸 수어사 체제로 승격되었습니다. 1682년 광주를 유수부로 삼았고 1895년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유수부에서 광주군으로 바뀌고 1989년 광주시의 동부읍(12개 리)과 서부면(11개 리), 중부면 일부(상산곡리) 등 24개 법정리 지역을 합쳐 10개 동으로 승격시켜 하남시가 탄생하게 됩니다.

▲이택재는 실학자 안정복의 저술의 산실이다.Ⓒ쪼꼬

광주향교와 사충서원

광주지역에는 관학인 광주향교와 사학인 사충서원이 남아 있습니다.

광주향교는 정확한 창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703년(숙종 29) 이성산성 아래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경내에는 대성전, 명륜당, 동무, 서무를 비롯한 6동의 건물이 있으며, 대성전에는 공자와 4성, 송나라와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광주향교는 수원, 화성, 의왕, 성남, 광주, 강동, 강남, 송파까지 관장하던 전국에서 제일 큰 향교였다고 합니다.

사충서원(四忠書院)은 신임사화 때 희생된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등 노론의 4대신을 제향하기 위해 1725년(영조 1) 노량진 사육신묘 부근에 설립된 서원입니다. 영조는 즉위하자 이들을 배향하는 서원을 건립하였으나 정미환국(1727년)으로 소론정권이 들어서자 서원은 철폐되었다가 1740년 다시 충신으로 판정되어 1756년에 서원이 복설되면서 사충서원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였던 1927년 사충서원 자리가 철도용지로 편입되어 용산구 보광동으로 이건하여 한국전쟁 때 파괴되었고 1968년 현재의 자리로 이전, 중건하였습니다.

광주지역의 사대부 반가는 안정복의 이택재와 신익희 선생 생가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이택재(麗澤齋)는 안정복이 머물며 대부분의 저술을 이곳에서 했습니다. 1761년 창건 이후 1786년(정조 10)과 1880년(고종 20)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며 전면의 퇴칸을 개방하여 제사지내는 용도에 적합한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가구구조나 기둥크기 등은 조선후기 건축기법으로 전체적으로 안정복의 검약 정신이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택(麗澤)’이란 <주역>의 ‘태괘(兌卦)’에 나오는데 “이택은 두 연못이 붙어 있는 것이다(麗澤二澤 相附麗也)”라는 뜻으로 나란히 있는 두 못의 물이 물기를 유지하는데 서로 도움이 되듯이 친구가 학문을 강구하고 덕을 닦는데 서로 도움을 주는 것을 뜻합니다.

신익희 생가는 원래 지금 위치에서 동남쪽으로 약 200m 지점에 있었으나 1865년 을축 대홍수로 집이 파손되어 1867년경에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고 합니다. 안채와 바깥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채는 전체적으로 T자형을 이루는데 중앙의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우측에 안방, 좌측으로 건넌방을 두었고 안방 앞으로 부엌을 두었으며 바깥채는 ㄱ자형으로 가운데에 대문을 두고 좌측에 2칸의 사랑방을 두었습니다.

광주 일대에는 사옹원(司饔院)이 관리하는 관요가 설치되어 조선 후기까지 왕실과 관청에 필요한 백자를 사기장 380명에 의해 제작했습니다. 사옹원은 원래는 왕이나 궁중에 음식을 공급하던 일을 관장하는 관청이었으나, 백자 수요가 증가하면서 왕실 및 관청용 그릇제작을 직접 주관하는 기관으로 정착하였는데 현재까지 340여 기의 요지가 발굴되었습니다.

관요 설치 이전에는 전국 4곳에 왕실과 관청용 자기를 공납하던 상품자기소(上品磁器所)가 운영되었는데 초기에는 내시가 제작을 관리, 감독하였으나 1478~1486년을 전후하여 일반관리가 그 역할을 대체한 것으로 보이며 이들 관리를 ‘번조관’이라고 불렀습니다.

안정복의 이택재와 신익희 생가
광주는 실학파 중 경세치용학파(經世致用學派)에 속하는 안정복과 그 문하를 배출하였습니다.

안정복은 본관 광주로, 1712년(숙종 38) 제천현에서 안극과 전주이씨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광주안씨는 명문가였으나 남인에 속하여 조선후기에는 가세는 좋지 못하여 안정복은 제천, 영광, 한양, 울산, 무주 등으로 옮겨 다니며 성장함으로서 당시의 다양한 사회 실상을 경험할 수 있었고 후일 그의 사고와 학문적 관심을 넓히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736년(영조 12) 봄에 아버지 안극과 함께 광주 경안면 덕곡으로 이주하였고 1746년에는 안산에 살던 실학의 종장 성호 이익에게 사사하며 경세치용의 학문을 배웠습니다. 그의 학문적 태도는 <하학지남(下學指南)>의 편찬에 잘 드러나는데, 현실적인 측면을 무시하고 형이상학을 추구하는 경향을 비판하면서 하학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토지제도에 관심을 기울여, 정전제가 실제로 거행되었음을 증명하고 이를 토지개혁의 이상으로 삼는 한편 향촌사회의 안정적 통치를 중시하여, <임관정요(臨官政要)>를 저술하면서 향사법(鄕社法)을 만들었고 나아가 ‘경안이리 동약’을 제시하여 사회경제적으로 백성들의 성장을 자율적으로 돕고, 이를 통해 국가가 성장하기를 기대하였습니다.

권철신(權哲身)은 어려서 부친 권암을 따라 안정복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으며 이때 전수된 자득(自得)의 학풍을 중시하고, 일상생활에서 꼭 필요한 덕목을 실천하는데 노력하여 서학, 즉 천주교에 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소장학자들과 천주교 관련 서적을 돌려가며 읽고 자발적으로 교리를 습득하였고 나아가 신앙의 차원으로까지 확대시켰습니다.

정약전(丁若銓)은 1776년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권철신에게 나아가 학문을 전수받았습니다. 서학에 관심이 있어 이벽, 이승훈 등과 교유하면서 천주교를 신봉하게 되었습니다. 1801년에 신유박해 때 흑산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복성재(復性齋)’를 짓고, 저술활동에 전념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남긴 <자산어보(玆山魚譜)>는 유배지 흑산도의 해양생물에 대하여 연구한 최초의 수산학 저서로 자연 사물을 이용후생의 관점에서 이해한 저술입니다.

권일신(權日身)은 형 권철신과 함께 안정복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안정복의 딸과 결혼하여 사위가 되었습니다. 자득의 학풍을 계승하여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수립하였는데, 이러한 면모는 양명학의 수용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승훈으로부터 영세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정약용(丁若鏞)은 이익의 학문을 사숙하였고 성호 문인들의 영향을 받으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학문체계를 완성하였는데 공부의 목적을 민생안정과 같은 현실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으로 규정하면서, 치민(治民), 변속(變俗), 이재(理財) 등에 대한 지식을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그는 유형원 이래 성호학파를 거치면서 현실화를 모색해 나가던 실학의 개혁 전통을 집대성함으로써 조선 최고 실학자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황덕길(黃德吉)은 1774년 안정복 문하에 들어간 이래 1791년 스승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양천과 덕곡을 왕래하면서 수학했고, 스승의 사후에는 양천에 칩거하며 성호학파의 핵심적인 학풍을 담고 있는 문헌들을 읽고 가르치며 근기 남인계의 실학 전통을 계승, 발전시켰습니다.

허전(許傳)은 21세 되던 해 서울로 올라와 황덕길 문하에 들어가 약 10여 년간 수학하였고 39세에 과거에 합격한 후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며, 성호 문인 중에 가장 다양한 관력을 지녔으며 이익의 균전(均田) 이념을 계승한 토지개혁의 실시를 주장하였습니다.

이벽(李檗)은 이익 문하의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권철신 등과 교유하면서 자신만의 성리학설을 마련하여 경전해석에 독창적이었는데 특히 <중용>에 대해 전통적인 이해방식에서 벗어나 하늘을 완전한 인격적인 존재로 보았으며, 특히 하늘을 천리(天理)가 아닌 천주(天主)로 파악하고, 우주생성의 주인으로 인식하며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한강지역 요충지였던 이성산성의 동문지Ⓒ하남문화원

젊은 유학 선비들과 천진암
천진암(天眞菴)은 원래 앵자봉 아래에 있던 사찰로, 1779년을 전후하여 폐찰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곳에서 이벽,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등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젊은 선비들이 1770년부터 1784년까지 약 15년간 이벽의 지도 아래 태양력 계산법과 기하원본, 천문, 지리, 양명학, 천학(天學), 수학 등을 배웠으며, 천주교를 학문의 대상만이 아니라 신앙의 차원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유학의 젊은 선비들이 불교의 암자에서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고 실천하며 천주교회를 세운 곳으로 세계에서 유일하게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신앙생활이 시작된 역사의 현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광주지역에는 왕족의 묘역이 많이 있습니다.

선성군(宣城君) 묘역은 정종의 넷째 아들 선성군 이무생과 그의 부인 정씨, 김씨, 한씨를 비롯하여 그의 후손인 병산군, 지산군, 이원군, 대구도호부사 이준도, 동복공 등 선성군파 종문(宗門) 10여 기의 묘가 있는 곳입니다. 선성군 묘역에는 선성군 신도비를 비롯하여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제작된 묘갈, 장명등, 상석, 혼유석, 석양, 망주석, 동자상, 고석, 향로석, 문인석 등 수많은 석물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 묘역은 조선시대 왕자 묘의 규모나 규범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이곳의 석물들은 조선시대 석물의 변천과 형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띠고 있습니다.

의안대군 방석묘에는 앞쪽에는 세자빈 심씨의 묘와 묘비가 있고 뒤쪽에는 산신제단이 있습니다. 이 묘역은 고려시대 묘제의 특징을 지닌 조선 초기의 것으로 돌담이 있고 봉분은 직사각 모양의 호석이 둘러져 있는 한강 이남에서는 보기 드문 형태입니다. 의안대군은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으로 태조 이성계의 여덟 번째 아들입니다. 1392년(태조 1)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 세자 책봉에 불만을 품은 이복형들에 의하여 유배되던 중 이방원의 명을 받은 이숙번에게 피살되었습니다.

밀성군 묘역에는 서거정이 쓴 것으로 알려진 선도비가 있습니다. 밀성군 이침은 세종의 다섯째 서자로 총명과 지혜가 뛰어나 세종으로부터 남다른 사랑을 받았으며 7세에 밀성군에 봉해지고 13세 연상의 수양대군(세조)과 우애가 깊어 세조가 왕위에 오르는데 힘이 되어주고 세조 즉위 후 오위도총부도총관, 의금부도위관 등 요직을 역임하였고 1468년(예종 즉위) 익대공신 2등, 1471년(성종 2) 좌리공신 2등에 책록 되었으며 1478년(성종9) 50세로 생을 마쳤습니다.

운산군 묘역에는 남곤이 찬한 신도비가 있습니다. 운산군 이계는 밀성군 이침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세조의 귀여움을 받았으며, 세조가 직접 사서와 경서를 가르쳤습니다. 1464년(세조 10) 운산군에 봉해졌으며 이후 흥록대부, 흥록상전 종부시의 도제조에 이르렀습니다. 1506년(연산군 12) 중종반정 때 병충분의익운정국공신의 호를 받았고 1509년(중종 4) 종친부 종부시, 사옹원 제조가 되었습니다.

광주에는 광주이씨, 동래정씨의 중종 묘역이 있습니다.

광주이씨 중흥조 이당(李唐)의 묘는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묘소를 잃어버렸다가 1754년(영조 30)에 14대손 창하가 이곳에 묻혀있던 비석을 발견하여 지금의 묘소를 찾게 되었습니다. 이 묘역은 600년 이상 된 풍수상의 명당으로 광주군의 토성인 광주이씨 문중의 중흥조의 비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당은 고려 말 국자감생원을 지냈고, 조선에서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자의금부사의 증직을 받았으며 이씨 부인과의 사이에 인령, 원령, 희령, 자령, 천령 등 5형제를 두었고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습니다. 특히 둘째 아들 원령은 둔촌 이집은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 등과 교류를 하였습니다. 후손 가운데 조선조 문과급제자가 186명에 달하며, 이극배, 이준경, 이덕평 등 상당수가 영의정을 지냈습니다.

동래정씨 소평공파 종중 묘역은 소평공 정광세와 기묘명현의 한 사람인 정충량 부자를 위시하여 모두 7대에 결친 종중의 묘역으로 원래는 김포 통진에 있었는데 불가피하게 이곳으로 이장하면서 석물도 함께 옮겨왔습니다.

정광세는 1479년(성종 10)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홍문관부수찬, 사간원 정언, 헌납, 사헌부 장령 등을 거쳐 시강원보덕으로 서연관이 되었습니다. 연산군 즉위 후 동부승지, 우부승지, 좌승지, 개성유수를 거쳐 형조참판을 지냈으며 강원도관찰사, 안주선위사를 거쳐 중종 대에 형조판서, 평안도관찰사, 지중추부사, 공조판서, 경기관찰사 등을 지냈습니다. 정광세 묘의 문인석은 중종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16세기 초반의 문인석이 많지 않은 상황이므로 보존가치가 높은 자료로 평가됩니다.

정충량은 광주 장지동 동래정씨의 입향조로 1501년(연산군 7) 생원, 진사시를 거쳐 150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에 임용된 뒤 대교를 거쳐 1507년(중종 2) 봉교가 되었습니다. 전적, 헌납, 홍문관직제학, 도승지가 되었으나 사헌부, 사간원으로부터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는 탄핵을 받아 곧 이조참의로 옮겼으며 기묘사화가 일어나 대간의 탄핵으로 공조참의로 논척을 받아 파직된 후 벼슬에서 쫓겨나 있다가 죽었습니다.

정충량 묘에는 묘갈 2기와 문인석 1쌍이 세워져 있습니다. 묘갈 2기중 처음의 비석은 김안국이 비문을 짓고, 김희수가 글씨를 썼는데 이수의 조각이 우수하여 석비조각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됩니다. 비석의 마모가 심해지자 안정복의 도움으로 1776년(영조 52) 방부개석 양식의 비석을 다시 만들어 나란히 세웠습니다. 문인석은 1776년 묘갈을 다시 세울 때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중요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맹사성, 최항, 신립, 허난설헌의 묘소
그리고 광주지역에는 맹사성, 최항, 신립, 허난설헌의 묘도 있습니다.

맹사성은 양촌 권근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1386년(우왕 12) 27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춘추관 교열을 지냈고 조선조에는 수원판관, 예조정랑, 시어사, 이조참의, 예문관제학을 거쳐 이듬해 시종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판한성 부사가 되었습니다. 그 후 이조참판, 예조판서, 호조판서, 공조판서 겸 예문관 대제학이 되고 문신으로서는 최초로 삼군도진무가 되었다가 68세에 좌의정에 올랐습니다.

최항은 1434년(세종 16) 알성시에 장원급제하여 세종의 인정을 받아 즉시 집현전 부수찬에 임명되어 훈민정음 창제 집현전 8학사의 일원으로 훈민정음의 반포에서 훈민정음 언해를 찬진할 때까지 18년을 집현전에서만 근무하였습니다. 1453년(단종 1) 승지, 세조 때 호조참판이 되었고, 그 후 <동국통감>과 <육전>의 수찬을 비롯하여 <관음현상기> <십이준도> 등을 찬하고 <명황계감>의 번역과 <어제유장설> 3편을 신숙주 등과 같이 주해하였습니다.

신립장군은 1567년(선조 원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도총부도사를 지내고 진주판관이 되었으며 1583년(선조 16) 은성부사가 되어 북변에 침입해 온 이탕개를 격퇴하고 두만강을 건너가 야인들의 소굴을 소탕하고 돌아와 그 전공으로 함경도 북병사에 승진하였습니다. 1587년(선조 20) 흥양에 왜구가 침입하니 경상우방어사가 되었고 평안도 병마절도사, 한성부 부사를 거쳐 임진왜란 때 삼도순변사가 되어 빈약한 병력으로 출전하여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적군과 대결하였으나 참패하여 부장 김여물과 함께 강물에 투신 순국하였습니다.

허난설헌 묘는 원래는 약 500여 m 오른쪽에 있었으나 중부고속도로 개설로 1985년 현 위치로 이전되었습니다. 허난설헌은 1563년(명종 18)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허엽의 딸로 강릉에서 태어나서 1589년(선조 22)에 27세를 일기로 요절한 조선조의 대표적이며 천재 여류시인입니다. 본명은 초희이며 허균의 누이입니다. 시인 이달에게 글을 배웠는데 천품이 뛰어나고 아름다운 용모를 타고나 어렸을 때 여신동이라고 칭송이 자자하였습니다.

광주 지역에 남아있는 특이한 사당인 정충묘(精忠廟)는 병자호란 때 쌍령리전투에서 분투하다 전사한 장군을 모신 사당으로, 봉안된 신위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허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민영, 안동영장 선세강, 죽산산성 성주 이의배 등 4위입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면서 전국의 근왕병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을 때 허완과 민영이 각각 2만씩 합이 4만의 병력을 이끌고 상경하여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대쌍령리에 포진하고 있을 때 청군기병 300여 명의 선제공격에 두 지휘관과 병사들 반 이상이 궤멸당한 전투입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 모자, 선글라스, 식수, 장갑, 윈드재킷, 우비,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환경 살리기의 작은 동행, 내 컵을 준비합시다(일회용 컵 사용 가급적 줄이기)^^

<참가 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반드시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고을학교'를 찾으시면 12월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와 해외캠프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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