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정부는 출범과 함께 소득주도성장을 내걸고, 최저임금을 올렸다. 하지만 성과는 기대에 못 미친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올해 3분기 소득5분위 배율은 5.52였다. 5분위계층(상위 20%)의 평균 소득을 1분위계층(최하위 20%)의 평균소득으로 나눈 값이 5.52라는 뜻이다. 이 수치가 집계 이래 3분기 기준 비교로 최고치를 기록한 건, 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이었다. 그때가 지금과 같은 5.52였다. 요컨대 소득 양극화 수준은 지금 최악이다.
돈 쓰는데 인색한 정부, 하위 계층에 치명타
통계청에 따르면, 5분위계층(상위 20%)의 평균 소득은 33개월 연속 증가했다. 반면, 1, 2분위계층의 평균 소득은 9개월 연속 하락했다. 소득 순으로 줄을 세웠을 때, 끝에서부터 하위 40%까지는 평균 소득이 꾸준히 줄었다는 뜻이다. 통계청의 집계 방식에 대한 논란은 있다. 아직까지는 종전 방식을 쓰고 있으므로, 정확도에 대한 이견도 있다.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추정해도, 5분위계층(상위 20%)의 소득은 계속 늘어난 것으로 나타난다. 반면, 1분위계층(하위 20%) 소득은 그만큼 늘지 않았다. 요컨대 하위 계층 소득이 줄어든 폭을 둘러싼 논란이다. 약간 늘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상위 계층 소득 증가 폭에는 크게 못 미친다고 한다. 소득 양극화가 심화됐다는 점은 분명하다.
흔히 꼽는 이유는 현 정부 초기의 '사실상 긴축 재정'이다. 재정 건전성을 강조했던 지난 정부 기조를 그대로 이어받았다는 게다. 기획재정부 세수 추계 오류도 한몫했다. 기획재정부는 이듬해 세수 예상치를 실제보다 대폭 적게 잡곤 했다. 이런 예상에 따라 예산을 짜면, 결과적으로 긴축 재정을 하게 된다. 이런 일이 3년 간 반복됐다. 지난해 세수는 추계보다 약 23조 원이 더 걷혔고, 올해는 이를 크게 넘어설 전망이다.
정부가 재정 투입에 인색했던 탓에, 영세 상공업자들이 주로 타격을 입었다.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충격 역시 전문가마다 판단이 크게 엇갈린다. 그러나 충격이 아예 없다고는 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 충격이 주로 영세 상공업자들에게 쏠렸다는 점이다. 정부가 과감한 재정 투입으로 보호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소득 하위 계층이 피해를 봤다.
기본소득, 효과는 인정하는데 방법은?
그렇다면, 문제는 두 가지다. 정부가 쓸 수 있는 재정을 어떻게 늘릴 건가. 재정을 어떻게 쓸 건가. 후자에 대해선 현금을 직접 나눠주는 방식이 주로 거론된다. 하위계층 소득이 감소 혹은 제자리인 상황을 빠르게 벗어나려면, 그래야 한다고 한다.
대안 중 하나가 '기본소득'이다. 소득 및 자산에 대한 세율이 OECD 평균에 비해 낮은 한국에선, '기본소득' 시행에 따라 손해를 보는 계층은 극소수다. 대개는 낸 것보다 더 받게 된다. 재원 확보를 위해 중산층까지 세금을 늘려도, 수혜자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게 '기본소득' 진영의 주장이다. 그러므로 정치적 반발도 적다. 또 누구에게 줘야 하는지 따지는 행정비용이 들지 않으므로, 효율적이다. 현금을 직접 나눠 주므로, 공공사업을 벌이는 등의 방식에 비해 효과도 빠르다.
하지만 족쇄가 있다. 현 정부는 출범 초기에 '임기 내 중산층 증세는 없다'고 공언했었다. 부동산 보유세 강화 등에 대해서도 소극적이다. 기본소득 시행에 필요한 재원 확보가 어렵다.
'헬리콥터 머니'와 '기본소득'의 결합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는 자리가 마련됐다. 지난 23일과 24일 서울 청년문화공간 JU동교동 바실리오홀에서 열린 '2018 기본소득 연합학술대회'다.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와 경기연구원 등 7개 연구소와 단체가 공동 주최한 행사다.
안현호 대구대학교 교수는 '헬리콥터 머니'와 '기본소득'의 결합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안 교수가 말한 '헬리콥터 머니'란,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 처음 사용한 용어다. 하늘에서 헬리콥터로 지폐를 뿌리듯, 중앙은행이 돈을 새로 찍어내서 유통한다는 뜻이다. 불경기에 흔히 동원되는 '양적 완화(Quantitative Easing)'와는 다른 개념이다.
중앙은행이 돈을 푼다는 점에선 '양적 완화'와 닮았다. 그러나 '양적 완화'는 중앙은행이 찍어낸 돈을 직접 정부로 전달하는 게 아니다. 민간 은행 등이 보유한 국채를 중앙은행이 사들이는 방식이다. 현금 혹은 단기 국채를 시장에 내놓고, 장기 국채를 시장에서 거둬들이면, 장기 금리가 떨어지고 통화량이 늘어난다. 이는 경기 침체를 벗어나는데 도움이 된다.
반면, '헬리콥터 머니'는 중앙은행이 새로 찍어낸 돈을 직접 정부에 전달하는 방식이다. 정부에게 빌려주는 형식(국채 매입)을 택할 수도 있고, 말 그대로 그냥 전달할 수도 있다. 정부 재정이 늘어난다는 점에선 마찬가지다. 이런 방식으로 확대한 재정을 기본소득으로 쓰자는 게 안 교수의 주장이다.
'양적 완화'의 한계
이는 '양적 완화'에 대한 반성과 맞물려 있다. '양적 완화' 역시 전통적인 관점에선 몹시 이단적인 정책이었다. 그러나 지난 2001년 3월 일본 중앙은행이 처음 시행한 이래, 상식이 됐다. 전통적인 경제학의 금기를 깬 셈이지만, 위기 사황에선 쓸 수 있는 정책으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미국 역시 지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양적 완화'를 실시했다. 영국 영란은행과 유럽 중앙은행 역시 비슷한 정책을 썼다.
중앙은행이 직접 돈을 찍어내는 발상을 허용한다면, '양적 완화'보다 한발 더 나아간 시도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이게 '헬리콥터 머니'를 지지하는 논리다. '양적 완화'는 중앙은행이 민간 자산을 구입하는 방식으로 돈을 푼다. 따라서 자산 가치가 오르고, 결과적으로 양극화를 심화시킬 수 있다. 중앙은행이 정부에 직접 돈을 전달한다면, 이런 위험을 피할 수 있다. 정부는 이렇게 확보한 재정을 자산 투자가 아닌 국민의 소비를 위해 쓸 수 있다. 국민 전체에게 일정한 금액을 무조건 나눠주는 '기본소득'은 유력한 대안이 된다.
'일자리 파괴' 기술 혁신과 경기 침체, 통화량 늘려야
하지만 어떤 식으로건, 시장에 돈이 많이 풀리면, 물가가 오르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국민의 소득이 늘어난 효과 역시 상쇄되지 않겠는가. 이런 반론이 가능하다.
안 교수의 설명은 이렇다. 통화량과 화폐 유통속도를 곱하면, 물가와 실질 생산량을 곱한 값과 같다. (MV=PY. M: 통화량, V: 화폐의 유통속도, P: 물가, Y=실질생산) 화폐 유통속도가 높고, 실질 생산량이 비슷하다면, 통화량 증가는 물가 상승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경기 침체로 인해, 화폐 유통속도가 낮아진다면 통화량 증가에 따른 부작용은 없다. 혹은 실질 생산량이 크게 늘어나도, 통화량 증가에 따른 부작용이 없다.
그리고 경기 침체와 실질 생산량 증가 가능성은 모두 열려 있다. 전자는 자산 대비 부채 비율이 높아진 탓이다. 후자는 인공지능 등 신기술의 비약적 발전과 맞물려 있다. 노동력 사용을 대폭 줄이고서도, 재화와 서비스 공급을 늘릴 수 있다면, 소득 부족에 따른 경기 침체와 생산량 증가가 함께 올 수도 있다. 이 경우라면, 전통적인 통화정책 논리에 연연할 여유가 없다. '헬리콥터 머니'를 쓸 수 있다. 이렇게 확보한 정부 재정을, 효과적으로 쓰는 한 대안이 '기본소득'이다.
안 교수의 이런 입장은 주류 경제학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비슷한 주장은 외국에서도 나오고 있다. 조금씩 결은 다르지만, 중앙은행이 새로 찍어낸 돈이 곧장 정부로 향하게 해야 한다는 점은 마찬가지다. 예컨대 영국 노동당의 제레미 코빈, 미국 민주당의 버니 샌더스 등이 비슷한 주장을 한다. 전통적인 경제학 이론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무조건 배척할 이유는 없다.
국토보유세 도입하면, 국민 1인당 30만 원 배당 가능
'2018 기본소득 연합학술대회'에선 이밖에도 다양한 기본소득 재원 확보 방안이 소개됐다. 남기업 토지+자유연구소 소장은 국토보유세와 토지배당을 결합한 방식을 제안했다. 국토보유세란, 현행 종합부동산세를 대체하는 세금이다. 종합부동산세와 달리 토지에만 부과한다. 이렇게 확보한 세수를 국민 전체에게 균일하게 나눠주는 게 토지배당이다. 국가의 주인인 국민은, 국토 사용에 따라 발생한 이익을 배당받을 권리가 있다는 개념이다. 토지에만 매기는 세금을 도입하면, 불필요한 토지가 시장에 나오면서, 토지 이용의 효율이 높아진다는 주장도 곁들여 졌다. 아울러 국토보유세 도입에 따른 부담을, 토지 소유주가 부동산 임차인 등 약자에게 떠넘길 위험에 대해선, 전월세 상한제 등 다른 규제 장치 도입으로 막을 수 있다고 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주장한 '기본소득형 국토보유세'와 비슷한 주장이다. 이 지사와 남 소장의 주장에 따르면, 종합부동산세를 없애는 대신 토지 불로 소득을 국토보유세로 거둬들인다면, 국민 1인당 연간 30만 원 정도의 토지배당을 할 수 있다.
"재건축 초과 이익 환수해서 기본소득 재원으로 쓰자"
아울러 곽노완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학술위원장은 도시 재건축 초과 이익 등을 환수해서 기본소득 재원으로 쓰자고 주장했다. 도시 재건축 사업으로 인한 이익은, 건물 용적률을 높이거나 근처 상권이 활성화되는 등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는 부동산 소유주의 기여와는 무관한 요소라는 점이다. 정부 정책, 혹은 소비자들의 자발적 움직임과 맞물려 있다. 따라서 사회의 공유 자산을 개인이 가져간 셈이다. 그러므로 이를 세금으로 거둬들일 근거가 있고, 이는 국민 전체에게 균일하게 나눠줘야 한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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