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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상식 팽개치고 피의자에 무죄 선물한 군사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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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성폭력 상식 팽개치고 피의자에 무죄 선물한 군사법원

[기고] '동의없는 성교는 강간'이라는 당연한 명제, 법조계가 살펴야

군인권센터가 지난 21일 국방부 고등군사법원이 법정에서 성폭력 피해자에게 피해 상황 묘사를 강요하는 등 불리한 재판을 진행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고 주장했다. 국방부 고등군사법원은 성폭력 가해 장교들에게 유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무죄를 판결했다. 성범죄에 무감각한 군사법원을 폐지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는 등 문제 제기가 지속될 전망이다.

국방부 고등군사법원은 이 사건의 선고공판에서 피해 여군의 진술 신빙성에 의심이 들고 폭행과 협박 등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피의자 두 장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피해 여성이 충분히 반항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앞세운 이번 판결은 여성 피해자 보호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는 치명적인 과오가 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유럽연합(EU) 소속 33개 국가 가운데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아일랜드 공화국, 벨기에, 키프로스, 룩셈부르크, 독일은 '동의 없는 성교는 강간'이라는 단순한 진실을 법제화 하고 있다<주-1>. 이는 성폭행 상황에서 발생하는 특수 현상이 2016년 과학적으로 입증되면서 내려진 결정이다.

성폭력 피해자가 폭행을 당할 때 고함치거나 다리를 오므리는 식으로 저항하는 게 일반적 행동인양 인식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실제 성폭력 피해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일시적인 무기력 증세에 빠져 저항하거나 비명을 지르지 못한다. 이는 과학자들이 밝혀낸 사실이다. 심리학적으로 '긴장성 무운동(tonic immobility)' 상태라고 불리는 이 무기력증은 피해자가 최면과 유사한 상태에 빠져 외부 자극이나 고통에 반응하지 않는 상태를 낳는다. '긴장성 부동화'로도 불리는 이 현상은 곤충, 어류, 파충류, 양생류, 조류 그리고 포유류 등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해당 증세를 보이는 동물은 움직이지 않으며, 눈을 간헐적으로 떴다 감았다를 반복한다. 몸이 굳으며 때로는 머리를 든 상태에서 짧게는 수 초, 길게는 수 시간 동안 같은 자세를 지속한다. 이 무기력증은 외부 공격에 저항이 불가능하거나 다른 수단이 없을 경우 발생하는데, 성폭행 피해자의 경우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심각한 우울증 등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주-2>.

성폭력 피해자들이 일시적인 무기력 증세에 빠지는 경우가 많은 데 대한 구체적인 연구 사례의 하나는 다음과 같다. 스웨덴의 스톡홀름 사우드 종합병원에 근무하는 애나 뮐러 박사 연구팀은 성폭력 피해를 당한 뒤 1개월 이내에 스톡홀름 성폭력 피해자 긴급치료 센터를 방문한 298명의 여성을 상대로 성폭행 당시 긴장성 무운동(tonic immobility) 상태를 경험했는지 여부를 진단하기 위해 △얼어붙은 듯 마비 상태가 된 것을 느꼈는지 △움직일 수 있는 상태인데 그렇게 하지 못했는지 △고함치거나 비명을 지를 수 없었는지 △무감각 상태에 빠졌는지 △한기를 느끼거나 고립감을 느꼈는지 등을 설문 조사했다<주-3>.

그 결과 피해자 가운데 70%는 폭행을 당할 당시 상당한 정도의 긴장성 무운동(tonic immobility) 상태를 경험했고, 이들 가운데 48%는 그 상태가 극심했다고 밝혔다. 저항은커녕, 얼어붙어 꼼짝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얘기다. 피해 여성들은 저항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들 여성의 70% 정도는 폭행 당시 마비 상태에 빠졌기에 어쩔 수 없었다. 특히 과거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는 여성이 피해를 입을 경우, 처음 겪는 경우보다 두 배 이상의 긴장성 무운동(tonic immobility) 상태를 경험했다. 또한 심각한 폭력을 수반한 성폭행을 당한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6개월 동안 검진을 받은 189명 가운데 38.1%는 PTSD를 겪었고, 22.2%는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긴장성 무운동(tonic immobility) 상태는 피해자로 하여금 PTSD에 걸릴 위험도를 2.75배 키웠고 심각한 우울증에 걸리게 할 위험도를 3.42배 크게 만들었다. 연구팀은 긴장성 무운동(tonic immobility) 상태가 알려진 것보다 매우 일반적이라며, 이는 성폭력과 관련한 법적 조치와 심리적 치료 등에 유익한 정보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PTSD 증상에는 감정 마비, 트라우마 상황의 기억이 자꾸 떠오르는 플래시백, 각성과민(주위 환경을 강하게 의식하거나 늘 경계를 취하고 있는 것) 등이 있다.

그간 법정은 대부분 피해자가 동의했는지 여부를 가리는데 초점을 맞춰왔는데, 일시적 마비로 인한 무저항 상태를 동의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연구팀은 강조했다. 아울러 "성폭력과 같은 극단적인 위협에 노출될 경우 피해자가 저항하지 못한 것을 탓해서는 안 된다"며 "무기력증에 빠지는 것은 정상적인 생물학적 반응"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성범죄의 법적 판단시 피해자의 동의 여부에 따라야 한다는 주장은 새로운 게 아니다. 유럽 컨벤션 의회가 지난 2011년 5월 제정한 '여성과 가정 폭력 예방과 근절 선언(The Istanbul Convention)'에서 강조하는 논리다. 이 선언은 여성 폭력에 대항할 가장 포괄적인 법적 조치로 인정받으면서 2018년 1월 현재 EU 회원국 중 20여 개 국이 비준했지만 그 절반은 자국 내 강간 범죄의 처벌법을 그에 맞게 고치지 않고 있다<주-4>.

유럽의 이런 현상은 성범죄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 여전히 구태의연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유럽인권위원회가 2016년 실시한 성범죄 인식 조사에서 '동의 없는 성행위 중 범죄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에 대해 응답자 3분의 1은 '피해자가 자발적으로 타인의 집에 간 경우, 속옷이 비치는 옷을 입은 경우, 분명히 안 돼 라고 말하지 않은 경우, 육체적으로 반항하지 않은 경우' 등을 들었다.

세계 최대 인권단체 국제앰네스티는 "성범죄에 대한 광범위한 편견이나 피해자 비난논리 등이 성범죄 근절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요인"이라면서 "미투 운동에서 강조되는 것처럼 강간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인권이라는 점에서 정부는 동의 없는 성행위는 강간이라고 규정하는 법제를 추진할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법원이 판결 시 '피해 여성의 반항이 약해서 겁탈을 당한 것'이라고 보거나 '여성이 충분히 반항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앞세우는 것은 여성을 보호해야 할 법관이나 제도가 제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자초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미투 운동 중 성범죄 피의자로 지목된 일부 저명인사들이 공개적으로 '법정에서 보자'는 식의 태도를 취하는 것도 한국의 관련 법체계가 미흡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한국의 미투 운동도 관련법을 정상화하는 것을 목표로 이뤄져야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동의없는 성관계는 범죄'라는 상식이 법제화 되지 않는 현실이 예비 성범죄자들과 전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심각하다. 이는 여성 자신이 성폭행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해야 한다는 책임론을 낳으면서 되레 성범죄 피해자의 책임을 묻는 식의 반인륜적인 행태가 되풀이 되게끔 하는 요인이다. 이런 태도는 극히 위험하고 심각한 문제이며 즉각 시정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는 날로 커지고 있다. 2018년 4월 현재 EU에서 강간당한 15살 이상 여성의 수는 900만 명에 달한다. 여성 성범죄는 법치 사각지대에 놓였다는 비판이 유럽 전체에서 강하게 일어나는 이유다. 한국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주-3>Anna Möller, Hans Peter Söndergaard, Lotti Helström. Tonic immobility during sexual assault - a common reaction predicting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and severe depression. Acta Obstetricia et Gynecologica Scandinavica, 2017; DOI: 10.1111/aogs.13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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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우

전 한겨레 부국장, 전 한성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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