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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멱산이 부려놓은! 한강변 ‘독서당 가는길’의 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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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목멱산이 부려놓은! 한강변 ‘독서당 가는길’의 비경

2018년 12월 서울학교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역사지리전문가) 제71강은 12월, 무술년 한해를 보내는 송년답사로, 서울학교가 새로 개척한 두 번째 답사코스로 안내합니다. 바로 목멱산(남산)이 한강변에 부려놓은 매봉산·둔지산 산줄기에 기대고 있는 비경과 문화유적들을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매봉산 정상 팔각정에서 바라본 한강 전경Ⓒ서울학교

서울학교 제71강은 2018년 12월 9일(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 서울지하철 2호선 한양대역 3번출구(실내)에서 모입니다(정시에 출발하니 출발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양대역 3번출구-살곶이다리-응봉산(한강/중랑천 조망)-달맞이봉-두모포/동빙고터/사한단터-점심식사 겸 뒤풀이-독서당터-매봉산(벌아현)-한강진-이태원부군당/유관순추모비-회나무길-해방촌/호국신사108계단-이태원터-외국군주둔지(청/일/미)-삼각지역

*현지 사정에 따라 코스가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서울학교 제71강 답사도Ⓒ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12월 <독서당 가는 길>에 대해 들어봅니다.

살곶이다리는 서울에서 제일 오래된 다리

한양의 안산(案山)에 해당하는 목멱산의 산줄기가 동쪽으로는 벌아현을 지나 매봉산을 향해 차츰 그 높이를 낮추다가 응봉산을 지나 마침내 중랑천으로 숨어드는데 그 끝자락에 살곶이다리가 놓여 있습니다. 남쪽으로는 보광동과 이태원을 지나 동빙고, 서빙고동으로 높이를 현저히 낮춘 후 마침내 반포대교 북단에서 한강으로 숨어들고, 서쪽으로는 해방촌을 지나 둔지산에서 외국군 주둔지를 부려놓고 용산전자상가를 지나 원효대교 북단에서 한강으로 숨어듭니다.

조선시대 한양의 교통로는 도성을 나온 길이 성저십리(城底十里)를 지나 육로와 수로로 전국으로 연결되었는데 그 길목에는 청파역, 노원역의 2개의 역과 동대문 밖 보제원, 서대문 밖 홍제원, 남대문 밖 이태원, 광희문 밖 전관원의 4개의 원이 방향에 따라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원(院)은 공적인 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되는 관리나 상인 등에게 숙식 편의를 제공하던 공공 숙박시설로 역(驛)과 함께 설치되었는데 삼국시대부터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사신이 왕래하는 곳에 관(館)을 두었던 점으로 보아 이때부터 역원제도가 실시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역이 나라의 공문서, 체전(遞傳) 등 공무로 여행하는 관리들의 숙박 편의를 도모하던 관영기관이었다면 원은 관영이 아닌 일반사람들이 이용하던 민영 숙박시설로 나라에서 토지만 제공하고 건물과 물자는 모두 지방유지가 맡아서 공급하며 운영하였습니다.

원 제도는 고려시대에 처음 시작되었는데 해가 저물면 길손들을 묵어가게 하고, 병자에게 약을 나눠주기도 하고 은퇴한 관리를 위해 기로연(耆老宴)을 베푸는 등, 다양한 역할을 하였으며 특히 조선시대에는 한성부의 네 곳의 원과 동·서 활인원(活人院)에 응급구제기관인 상설진제장이 설치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 1,310개소의 원이 설치되었는데 해당지역에는 원우(院宇)를 짓고 서울지역은 5부, 지방은 수령이 부근의 주민 가운데 승려, 향리, 관리를 원주(院主)로 임명했으며 이들에게 잡역을 면제해 주는 대신 원 운영의 책임을 맡겼습니다.

원은 사용자가 제한되었기 때문에 점차 쇠락하여 공용여객의 숙식을 고을이나 역에서 담당하는 사례가 많았고 특히 임진왜란 이후에는 그 폐해가 많아 주막 또는 주점으로 변모하기도 하였으며 특히 역에 참점(站店)을 설치함으로써 원은 그 모습을 감추고 지명만으로 남아 있는데 동대문 밖 보제원, 서대문 밖 홍제원, 남대문 밖 이태원 등이 그것입니다.

전관원(箭串院)은 대재나루를 건넜으나, 도성 문을 닫는 인정(人定)종이 울리기 전에 도성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된 나그네와 도성 문이 열리는 파루(罷漏)종 시간보다 더 이른 새벽에 곧장 나루를 건너 지방으로 가려는 나그네들이 묵어가던 여관으로 지금의 행당중학교 자리에 있었습니다.

▲살곶이다리는 서울에서 제일 오래된 다리다.Ⓒ서울시

살곶이다리는 중랑천과 청계천이 만나 한강으로 흘러들기 전에 놓여 있는 한양과 동남 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통로로 사용되었던 서울에서 제일 오래된 다리였습니다. 세종 대에 영의정 유정현과 공조판서 박자청이 감독하여 세워졌는데 원래의 이름은 “마치 평평한 평지를 걷는 것과 같다”하여 ‘제반교(濟盤橋)’라 불렀으나 전관원(箭串院)이 있었던 연유로 살곶이[箭串]다리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지형적으로는 동쪽으로 강릉을 가고, 동남쪽으로 송파에서 광주, 이천을 거쳐 충주와 죽령을 넘어 영남에 닿는 교통의 요지일 뿐만 아니라 태조의 헌릉과 순조의 인릉을 참배하고자 할 때나 뚝섬나루를 거쳐 성종의 선릉, 중종의 정릉과 봉은사를 찾아 가자면 반드시 이 돌다리를 건너야만 했으며 주변은 넓은 들판에 풀과 버들이 무성하여 조선 초부터 나라의 말을 먹이는 마장(馬場)과 군대의 열무장(閱武場)으로 사용되었던 곳이었습니다.

이 다리는 정종과 태종의 잦은 행차 때문에 1420년(세종 2) 5월에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나 태종이 죽자 왕의 행차가 거의 없어 완성되지 못하였다가 이 길을 자주 이용하는 백성들을 위해 만들 필요성이 제기되어 1475년(성종 6) 다시 공사를 시작하여 1483년(성종 14) 완성되었습니다.

고종 대에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이 다리의 석재를 이용했기 때문에 다리의 일부가 손상되었고 1913년에는 일본인들에 의해 상판에 콘크리트가 덮여지고, 1920년에는 집중호우에 의해 다리의 일부가 떠내려가 방치된 것을 1971년에 보수, 복원하였습니다.

▲봄, 개나리의 천국을 보려면 응봉산에 가라.Ⓒ서울시

두한강 본류와 중랑천이 어우러져서 두무포
두모포(豆毛浦)는 도성 동남쪽 5리쯤에 있었다고 하는데, 이곳은 지금의 옥수동 한강변 즉 동호대교 북단으로 동쪽에서 흘러오는 한강의 본류와, 북쪽에서 흘러오는 중랑천의 물이 합류되는 지점입니다. 두 물이 서로 어우러진다는 의미로 두뭇개라 불렀으며 한자로 옮기면서 두모포가 되었습니다.

두모포 뒤편 매봉산에서 동쪽으로 내려간 작은 매봉(응봉)이 한강을 바라보고 벼랑을 이룬 것을 선돌개(입석포)라 하는데 지금의 금호동인 무수막(수철리) 일대로 조선 초 ‘경도10영’의 하나인 입석조어(立石釣魚)가 이곳의 풍광을 그린 것입니다.

용산강(용산지역의 한강)을 남호(南湖), 마포강(마포지역의 한강)을 서호(西湖)라고도 했던 것처럼 두모포 역시 도성 동쪽의 풍광이 뛰어난 물가라는 의미에서 동호(東湖)라고도 불렀으며 아름다운 풍광 때문에 주변에는 많은 누정이 세워졌습니다.

두모포 일대에 있었던 정자는 왕실 소유로는 세종의 제천정, 낙천정, 화양정과 연산군의 황화정, 예종의 둘째아들 제안대군의 유하정, 문신들의 정자로는 한명회의 압구정, 김안로의 보안당, 김안국의 범사정, 정유길의 몽뢰정, 이사준의 침류당, 김국광이 지어 이항복의 소유가 된 천일정, 송인의 수월정 등이 즐비하였으나 지금은 낙천정만 유일하게 남아 있습니다.

또한 두모포는 농산물과 목재 등 각종 물산이 드나드는 나루터였는데 경상도와 강원도 지방에서 남한강을 경유하여 오는 세곡선이 집결했던 곳이고, 1396년(태조 5) 설치한 동빙고가 부근에 있어 얼음을 나르는 배들도 드나들었으며 1419년(세종 1) 6월 대마도 정벌 때는 세종과 상왕인 태종이 친히 두모포 백사장에 나와 이종무 등 여덟 장군을 전송하며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습니다.

▲흥미로운 사연이 전하는 버티고개 인근에 조성된 산책로Ⓒ서울시

아름다운 풍광으로 정자들 즐비
저자도(楮子島)는 두뭇개(옥수동)와 무수막(금호동) 사이의 한강에 있었던 모래섬으로 경치가 매우 좋았으며 해마다 기우제를 지냈던 곳입니다. 닥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 그로부터 섬 이름이 유래되었습니다. 도성 안을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청계천이 동대문 밖을 지나 양주에서 흘러 내려오는 중랑천과 합류되어, 다시 서남으로 꺾이면서 한강으로 접어드는 곳에 생겨난 삼각주가 바로 저자도로, 멀리서 보면 아이가 춤추는 모습을 닮았다고 무동도라고도 불렀습니다.

중랑천은 경기도 양주시 산북동 불국산(불곡산)에서 발원해 도봉천, 방학천, 당현천, 우이천, 묵동천, 면목천 등 13개의 지류를 받아 안고 흘러 사근동에서 청계천과 합류한 후 한강으로 유입하는 하천입니다. 도봉동 부근에서는 도봉서원이 있어 ‘서원천(書院川)’, 창동 부근에서는 한강의 위쪽을 흐르는 냇물이라는 뜻으로 ‘한천(漢川)’ 또는 ‘한내’, 상계동 부근에서는 한강의 새끼강이라는 뜻으로 ‘샛강’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청계천은 한양도성 안에서 백악, 목멱산, 인왕산, 낙산에서 흘러내린 백운동천, 삼청동천, 옥류동천, 쌍계동천, 청학동천을 받아 안고 도성 밖에서 성북천, 정릉천을 합류하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왕십리 밖 살곶이다리 근처에서 중랑천과 합쳐 서쪽으로 흐름을 바꾸어 한강으로 흘러드는데, 원래 이름은 개천(開川)이었습니다.

청계천은 처음에는 자연하천으로 홍수가 나면 민가가 침수되는 물난리를 겪었고, 평시에는 오수가 괴어 매우 불결하였는데, 태종이 처음으로 개거공사(開渠工事)를 하였으며 영조 때는 준설, 양안석축(兩岸石築), 유로변경 등 본격적인 개천사업을 하여 물의 흐름이 비로소 직선화되었고 개천에는 24개의 다리가 놓였습니다.

사연 많던 모래섬이었으나 물 속에 사라진 저자도
저자도는 한성백제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덕무는 저자도에 온조왕의 옛 성터가 있었다고 하며 <삼국사기>에는 온조가 낙랑을 공격할 때 아차산 아래를 지났다는 기록이 있어 아차산과 가까운 저자도에 주둔하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이후 조선 초기부터 왕실 소유의 섬으로 왕이 즐겨 찾던 놀이터였고, 중국 사신이 왔을 때 저자도에서 양화도까지 선유(船遊)를 베풀었으며, 기우제를 올리고 출정하는 병사들의 전송 행사를 하는 곳이기도 하였으며 문사들의 별서가 있었던 큰 규모의 섬이었습니다.

저자도는 고려 말에는 정승 한종유의 소유였고 조선 초에는 태조의 이복형제인 의안대군 이화의 소유였다가 세종 대에는 정의공주에게 하사하고, 공주는 남편 안맹담에게 주었고 다시 막내아들 안빈세에게 내려주었는데 이때부터 사대부 자제들의 학습처가 되었으며 연산군, 성조, 중종 때는 군신의 유희처로 사용되었습니다.

조선 중기에서 후기까지는 명망 있는 문사들의 은둔처가 되었는데 광해군 때 구용, 효종 때 허걱, 숙종 때 홍득우, 이세백, 김창흡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특히 김창흡은 ‘현성(玄城)’이라는 정자를 지어놓고 남한산을 오가며 풍류를 즐겼고 근세에는 개화파 금릉위 박영효가 이 섬에 정자를 지어 동지들과 자주 담소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또한 세조 때부터는 저자도의 얼음을 채취해 빙고에 갈무리했다고 하는데 빙고(氷庫)는 나라의 제사 등에 쓰이던 얼음을 저장하고 출납하는 것을 관장하던 관아로, 동빙고의 얼음은 종묘와 사직단 등의 제사에 쓰게 하고 서빙고의 얼음은 궁궐이나 백관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1396년(태조 5) 예조 소속으로 옥수동 미타사 입구에 동빙고를. 둔지산 기슭 서빙고초등학교 부근에 서빙고를 설치하고 얼음이 잘 얼게 수우신(水雨神)인 현명씨(玄冥氏)에게 제사지내는 사한단(司寒壇)을 동빙고의 북쪽에 세웠으나 동빙고와 사한단은 1504년(연산군 10) 서빙고의 동쪽으로 옮겨지고 지금은 표지석만 남아 있습니다.

저자도는 1925년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로 아름다운 풍경은 잃어버린 채 모래와 자갈만 쌓여 있다가 1970년 초에 압구정동 아파트 건설에 이 섬의 흙을 파내어 이용하면서 지금은 완전히 물속에 잠겨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젊은 학자들에게 휴가 주어 독서에 전념토록 하라”
독서당(讀書堂)은 국가의 중요한 인재를 길러내기 위하여 건립한 전문 독서연구기구로 달리 호당(湖堂)이라고도 하였습니다. 한양에는 옥수동 근처 한강변에 동호당, 마포에 서호당, 용산에 남호당 등 세 곳에 있었는데, 특히 동호당은 율곡이 특별휴가를 받아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저술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세종은 1426년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를 실시하였으나 장소가 자택으로 한정되었으므로 독서에만 전념하기에는 미흡하였습니다. 1442년 제2차 사가독서를 시행할 때 세종은 독서에 지장이 없도록 신숙주, 성삼문 등 6인을 진관사에서 독서하게 하는 상사독서(上寺讀書)를 실시하였는데 1451년(문종 1)과 1453년(단종 1)까지 이어졌습니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여 집현전을 혁파함으로써 사가독서제는 폐지되었다가 성종 대 1476년과 1486년에 다시 사가독서제를 실시하였으나 자택에서 하는 독서는 내방객들 때문에 연구에 불편한 점이 많고, 상사독서는 불교의 여러 폐습에 오염될 가능성이 많으므로 상설국가기구인 독서당을 두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서거정의 주청을 받아들여서 1492년(성종 23)에 남호독서당(南湖讀書堂)을 개설하였습니다.

장소는 지금의 마포 한강변에 있던 귀후서(歸厚署) 뒤쪽 언덕의 사찰이었다고 하며 이 절을 20칸 정도로 확장하여 1495년(연산군 1)부터 1498년까지 매년 5, 6명이 독서하였으나, 1504년 갑자사화의 여파로 폐쇄되었습니다. 연산군의 뒤를 이은 중종은 인재양성과 문풍 진작을 위해서 독서장려책을 적극 권장하였고, 1507년에 독서당제도를 부활하여 지금의 동대문구 숭인동에 있던 정업원을 독서당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정업원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는 마땅한 장소가 아니라는 주청이 끊이지 않자 중종은 1517년에 두모포에 있던 정자를 고쳐 지어 독서당을 설치하고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이라 하였는데 이때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소각될 때까지 75년 동안 학문연구와 도서열람의 도서관 기능을 수행하였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독서당은 복구되지 못하다가 1608년(광해군 1)에 대제학 유근이 다시 설치할 것을 청하여 우선 한강별영(漢江別營)을 독서하는 처소로 삼았으나 인조반정 뒤에 일어난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등으로 인하여 사가독서제도가 정지됨에 따라 독서당의 기능도 크게 위축되었으며, 영조 때까지 존립했던 것으로 보이나 정조 때 규장각이 세워짐에 따라서 완전히 그 기능이 소멸되었습니다.

그리고 독서당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사가 인원을 줄이고 규정을 엄격히 하였는데 대표적인 예로서는 1515년(중종 10) 5월에 사가독서원으로 김안국 등 16인을 선발하였으나 엄격히 재심한 결과 7인만이 최종적으로 뽑혔다는 것입니다. 독서당의 선발 연령은 연소문신(年少文臣)을 원칙으로 삼았으나 40세가 넘어서 선발되는 경우도 가끔 있었고 대제학은 독서당을 거친 사람만이 가능하게끔 제도화했습니다.

독서당의 원수는 1426년부터 1773년까지 350여 년 동안 총 48차에 걸쳐서 320인이 선발되었는데 인원이 가장 적었을 때인 1585년이 1인, 가장 많을 때인 1517년과 1608년 등이 12인이었으나, 일반적으로는 6인 내외를 선발하였습니다.

장충동에서 한남동을 넘어가는 고개는 약수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와 더불어 벌아현(伐兒峴)이라고 불렀는데 사연은 이렇습니다.

한양의 종조산(宗祖山)에 해당하는 삼각산 세 봉우리 중의 하나인 인수봉은 수려한 자태를 뽐내지만 허리 부분쯤에 조그마한 바위가 불거져 나와 있어 그 모양이 멀리서 보면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업고 있는 형상이라 부아악(負兒岳)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아이가 어머니 품속을 벗어나면 위험하므로 때로는 혼내주고 때로는 얼러줄 필요가 있어서, 아이를 혼내준다는 버티고개[伐兒峴]와 떡으로 달랜다는 떡전고개의 지명이 생겼는데, 그야말로 당근과 채찍으로 아이를 혼내고 달래며 엄마 등에서 가만히 있기를 바라던 마음에서 그리 하였을 것입니다. 벌아현은 약수동 고개에 세워진 버티역이라는 지하철역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한강진은 한남동에 있던 나루터로서, 한강도·사수도·사리진이라고도 하였으며 강안 맞은편의 사평나루는 조선시대 판교역을 지나 용인, 충주로 통하는 대로의 요충지로서 이곳에는 별감(후에 도승)이 파견되어 인마의 통행을 기찰하고 통행의 편의를 도모하였습니다. 관선 10척을 관리하다가 후에 15척으로 늘렸으며 조선 후기에는 이곳에 진(鎭)을 설치하여 훈련도감에서 관리하면서 도승은 별장으로 명칭이 바뀌었는데, 진도의 군사적 기능이 강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목멱산(남산)에서 내려다본 해방촌과 미8군기지Ⓒ서울학교

유관순 열사추모비가 세워진 사연
이태원부군당은 주민들이 제를 올리면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던 곳으로, 유관순 열사의 추모비가 함께 세워져 있습니다. 유관순 열사가 순국 후 이태원공동묘지에 묻혔는데 일제가 이곳에 군용기지를 조성하는 과정에 열사의 유해는 행방이 묘연해졌습니다. 그래서 잠시나마 이곳에 묻혔고 죽어서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던 유관순 열사의 넋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이곳 주민들이 추모비를 세웠습니다.

해방촌은 용산고등학교의 동쪽, 목멱산의 남쪽 기슭에 형성된 마을로 광복과 함께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들과 또 북쪽에서 월남한 사람들,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인해 피난을 온 사람들이 정착하게 되어 해방촌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해방촌 지역은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 제20사단의 사격장으로 사용했다가 해방 후 미 군정청이 그 지역을 접수하였지만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여 일본군 육군관사 건물을 월남 실향민들이 차지하여 사용했으나 미 군정청이 이들을 퇴거시키자 그 위쪽의 사격장에 움막을 짓고 살기 시작하면서 해방촌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곳에 1943년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때 전사한 일본군과 조선인을 위령하기 위해 경성호국신사를 세웠는데 그 참배 길의 108계단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이태원은 조선시대 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기 위하여 둔 역원(驛院)으로 용산고 정문 앞에 있었으며 그곳에 배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인데 한자로 어떻게 표기하느냐에 따라 민간 어원적 전설은 그 내용이 매우 다르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 나오는데 유래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항복한 왜군들이 귀화해서 이곳에 살았으며 그들을 ‘이타인(異他人)’이라고 불렀고, 그들이 사는 곳이라 이타원(異他院)이라는 마을 명칭이 유래되었다는 것입니다.

이태원(異胎院)의 명칭에 대한 유래는 두 가지가 전해지고 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 일본군이 서울로 쳐들어왔을 때 목멱산 아래 황학골에 비구니들이 거주하는 운종사(雲鐘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는 부하들을 이끌고 이 절에 들어가서 비구니들을 탈취하여 얼마 동안 머무르며 지내다가, 이곳을 떠나며 그 절을 불태워 버렸다고 합니다. 그때 왜장들과 관계를 가졌던 비구니들은 갈 데가 없어 융경산(隆景山) 부군당 밑에 토막을 짓고 살다가, 아이를 낳게 되자 이웃 마을 사람들이 이를 알고 그곳을 이태(異胎)가 있는 집이라고 그 일대를 이태원(異胎院)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병자호란 이후 심양으로 잡혀간 조산의 여성들이 그곳에서 모진 고초를 겪다가 애를 낳고 돌아온 여인들을 이곳에 집단 거주하게 하게 되자 ‘태가 다른[異胎]’ 아이들이 함께 산다고 해서 이태원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사실의 진위를 떠나 ‘이태(異胎)’, ‘이타인(異他人)’이 사는 지역이라는 전설의 내용은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어지는 이태원의 애절한 연고를 반영하고 있는 지명의 유래입니다.

용산(龍山)이란 지명의 근원을 따져보면 한양도성의 서쪽 안산 자락이 남쪽으로 뻗어나간 산줄기가 한강을 향해 구불구불 나아간 모양이 용의 모습을 닮았다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지금의 효창공원과 원효로 서쪽 일대의 구릉지가 본래의 용산이고, 미군기지와 삼각지, 이태원 등이 자리 잡은 일대는 ‘신용산’이라 불리다 ‘신’을 빼고 용산으로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서울 10대 야간명소로 꼽힌 매봉산 정상에서의 야경Ⓒ서울시

외국군 주차지가 된 용산의 기구한 운명

본래의 용산은 도성에 접해 있으면서 한강을 끼고 있는 지역으로 조정의 군수창고 기능을 했던 군자감 등이 있었던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임진왜란 당시 한양에 머무른 왜군이 이 일대에 자리잡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으나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는 원효로 일대에, 가토 기요마사의 부대는 갈월동 부근에 주둔하여 현재의 용산기지와는 다소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882년 임오군란 때 파병된 청나라 군사가 임오군란을 진압한 뒤 이곳에 주둔하였고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청나라 주둔지에 그대로 눌러앉았으며 현재의 모습으로 정착된 것은 일본이 러일전쟁을 치르기 위해 국내에 진주시킨 ‘한국주차군’ 때부터입니다.

일본군은 1906년부터 1913년까지 1차 기지공사를 완료하고 한양 일대 주요 지점에 분산 주둔해왔던 일본군 부대들을 용산기지로 집결시켰으며 러일전쟁이 끝나고도 한반도 식민지배와 대륙 침략을 위한 전초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2차 기지공사를 1922년까지 진행하여 현재의 형태와 비슷한 모양으로 기지가 형성되었습니다.

주한미군이 용산에 자리 잡은 때는 1945년으로 미 24군단 예하 7사단이 서울과 인천에 있던 일본군을 무장 해제시키고 주요 시설물 보호와 치안 유지를 담당했다가 1948년 남한정부가 수립되자 미군은 400여 명만 남고 모두 철수했으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투입되었고 본격적인 용산 미군기지 시대가 열린 것은 1957년 주한미군사령부가 창설되면서부터입니다.

‘왜명강화지처비’는 원효로4가 주택가 한편에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한양에서 철수하기 전 용산 일대에 주둔하고 있었던 사실을 보여주는 유적입니다.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한양을 지나 평안도와 함경도까지 진격해 갔으나 조선 관군과 의병이 체제를 정비하고 명나라 군대까지 파병되면서 전황은 왜군에 불리하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1593년 행주대첩에서도 패한 왜군은 한양 철수 전 강화를 맺고 최대한의 실리와 퇴로를 확보하고자 했는데 이 상황에서 전투로 인한 병력 손실을 피하기 위해 왜군과 적극 강화협상에 나선 명군이 강화를 맺은 곳에 세운 비석이 바로 ‘왜명강화지처비’입니다.

용산기지 바깥에 있는 외국군 주둔의 흔적은 ‘왜명강화지처비’나 용산구 후암동에 있던 ‘호국신사’ 터 앞 108계단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도시개발 과정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걷기 편한 차림, 모자, 선글라스, 장갑,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참가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랍니다. 꼭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참가비, 웹주소,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서울학교'를 찾으시면 12월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서울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은 재미있고 깊이 있는 <서울 해설가>로 장안에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는 서울의 인문지리기행전문가이며, 불교사회연구원 원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서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공동체로서의 '마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 보니 서울이 공동체로서 '가장 넓고 깊은 마을' 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적인 요소가 발현되지 않는 '마을'이어서입니다.

남한의 인구 반쯤이 모여 살고 있는 서울(엄밀히 말하면 수도권)이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호남향우회, 영남향우회, 충청향우회 등 '지역공동체 출신으로 서울에 사는 사람'만 있지 '진정한 서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엄연한 현실이 서울의 현주소입니다.

이러한 문제인식에서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적 접근을 통해 그곳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마을 공동체로서 서울에 대한 향토사가 새롭게 씌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역사, 풍수, 신화, 전설, 지리, 세시 풍속, 유람기 등 가능한 모든 자료를 참고하여 이야기가 있는 향토사, 즉 <서울학>을 집대성하였습니다.

물론 서울에 대한 통사라기보다는 우리가 걷고자 하는 코스에 스며들어 있는 많은 사연들을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그 내용은 정사도 있겠지만 야사, 더 나아가서 전설과 풍수 도참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서로는 <최연의 산 이야기> <이야기가 있는 서울길>이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서울학교>를 여는 취지는 이렇습니다.

서울은 무척 넓고 깊습니다.
서울이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려고 끼리끼리 합종연횡 치열한 싸움을 벌였을 때입니다. 한반도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서울은 꼭 차지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서울은 고려시대에는 남쪽의 수도라는 뜻의 남경(南京)이 있었던 곳이며, 조선 개국 후에는 개성에서 천도, 새로운 수도 한양(漢陽)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망국(亡國)의 한을 고스란히 감당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에 합병되는 그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곳도 서울입니다.

이렇듯 서울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서 역사 유적의 보고입니다. 또한 개항 이후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펼쳐 놓은 근대문화유산 또한 곳곳에 산재해 있어 서울이 이룩해 놓은 역사 문화유산은 그 넓이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깊이와 넓이만큼 온전하게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곳도 서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소실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의도적으로 우리 문화를 파괴, 왜곡시켰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도 동족상잔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박정희 이후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개발독재세력은 산업화와 개발의 논리로 귀중한 문화유산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피맛골 등 종로 일대의 '무분별한 개발'이 그 비참한 예입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 접하고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은 점(點)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러한 점들을 하나하나 모아 선(線)으로 연결하고, 그 선들을 쌓아서 면(面)을 만들고, 그 면들을 세워 입체의 온전한 서울의 문화유산을 재구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서, 지리지, 세시풍속기 등 많은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합니다만, 그 기록들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은 '역사적 상상력'으로 보완해야 합니다.

최근의 관심 콘텐츠는 <걷기>와 <스토리텔링>입니다. 이 두 콘텐츠를 결합하여 '이야기가 있는 걷기'로서 서울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서울학교>를 개교하고자 합니다.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기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울학교는 매달 한 번씩, 둘째 주 일요일 기행하려 합니다. 각각의 코스는 각 점들의 '특별한 서울 이야기'를 이어주는 선입니다. 선들을 둘러보는 기행이 모두 진행되면 '대강의 서울의 밑그림'인 면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기행을 통해 터득한 여러분들의 상상력이 더해질 때 입체적인 '서울 이야기'는 완성되고 비로소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기행의 원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대략 오전 9시에 모여 3시간 정도 걷기 답사를 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맛집에서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한 후에 1시간 30분 가량 가까이에 있는 골목길과 재래시장을 둘러본 후 오후 3∼4시쯤 마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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