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씨는 지난 2010년 11월 서울중앙지법에 관련 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했고, 법원은 11개월 후인 지난해 10월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 검찰은 선고 직전 "법과 원칙에 따라 현명하게 판단해 달라"며 별도의 구형을 하지 않았다. 검찰이 재심 결정 과정 및 재심 절차 진행에 순순히 응한 것이다.
과거사 재심 사건에 사사건건 항소 또는 항고를 해 피해자 배상을 지연시켜왔던 검찰이 태도를 갑자기 바꾼 것일까?
▲ 김지하 시인 ⓒ연합뉴스 |
김지하, 39년 만에 '긴급조치 위반' 무죄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대선 직전 사과를 한 '유신 피해자' 김지하 씨를 옭아맨 것은 유신 시절을 상징하는 대통령 긴급조치다. 긴급조치는 유신 헌법에 규정된 53조의 대통령긴급조치권에 따라 1호에서 9호까지 선포됐다. 이 중 긴급조치 1호, 2호, 4호, 7호, 9호는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위헌적 요소를 담고 있다. 나머지 3호, 5호, 6호, 8호는 앞서 선포됐던 긴급조치를 해제하는 내용이거나 민생 조치를 담고 있다.
특히 1호, 4호, 9호는 많은 시국 사범을 양산했다. 긴급조치 1호는 지난 1974년 1월 선포됐는데, 유신 헌법을 부정하거나 반대·비방만 해도, 또 유신헌법 개정을 제안만 해도 영장 없이 체포·구속돼 처벌을 받도록 돼 있다. 심지어 이 조치를 비방하기만 해도 영장 없이 체포·구속됐다.
김 씨는 긴급조치 4호 위반 혐의로 체포됐다. 제2차 인혁당 사건으로 이어진 민청학련 사건을 계기로 박정희 대통령은 1974년 4월에 긴급조치 4호를 선포했다. 박 대통령은 이 조치 1항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았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과 이에 관련되는 제단체를 조직하거나 또는 이에 가입하거나 단체나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 고무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그 구성원과 회동 또는 통신 기타의 방법으로 연락하거나, 그 구성원의 잠복, 회합 그밖의 활동을 위하여 장소, 물건, 금품 기타의 편의를 제공하거나, 기타 방법으로 단체나 구성원의 활동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김 씨는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같은 해, 제2차 인혁당 사건에 연루된 8명은 긴급조치 4호 위반 등으로 군사재판에 넘겨져 사형 선고를 받았고, 선고 후 하루도 지나지 않아 처형됐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후보 시절 "두 개의 판결이 있다"고 한 것 중 '첫 번째' 판결이었다.
제2차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을 당했던 인사들은 지난 2007년 재심을 통해 무죄를 확정지었다. 당시 검찰도 항고를 하지 않았다.
또 긴급조치 4호(민청학련 사건) 위반 등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던 박형규 목사에 대해 지난해 9월 서울중앙지검 공판2부 임은정 검사는 '무죄'를 구형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임 검사가 당시 낸 논고문 마지막 문단이다.
"피고인이 위반한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와 제4호는 헌법에 위반되어 무효인 법령이므로 무죄이고, 내란선동죄는 관련 사건들에서 이미 밝혀진 바와 같이 관련 증거는 믿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피고인이 정권 교체를 넘어 국헌 문란의 목적으로 폭동을 선동했다고 볼 수 없으므로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검찰 조직이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를테면 임 검사는 최근 박정희 정부 시절 간첩 사건 재심 도중 구형 과정에서 "법과 원칙에 따라 선고를 해달라고 구형 의견을 내라"고 주문한 검찰 상부의 지시를 어기고 무죄를 구형했다가 징계를 받을 처지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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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긴급조치 관련 이중 잣대?
언뜻 보면 검찰 내부에서 과거사 사건을 다루는 것과 관련해 모종의 변화가 생긴 것 같지만 실상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이번 '김지하 재심 판결'이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깔끔하게 무죄 판결을 받은 김지하 시인은 일찌감치 박근혜 당선인 지지 선언을 한 인물이다.
과거 검찰은 '박정희 독재의 첨병'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용공 사건 등을 기소할 때 '소신 검사'가 간혹 기소를 거부하는 일이 발생하면 기소 검사를 바꿔서라도 '그림'을 만들어냈던 게 검찰 조직이었다. "검찰은 한 몸이며, 과거의 검찰도 지금의 검찰이다"라는 식의 논리를 뒷받침해 주는 검사동일체 원칙이나 검사무결점주의 등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
지난해 6월 긴급조치 4호 위반 사건 재심이 무죄로 결론이 나자, 검찰은 항소를 했다. 당시 서울중앙지검 박 모 검사는 항소이유서를 통해 "유신헌법은 정당한 절차를 거쳐 제정되었고, 유신체제 철폐를 요구하는 학생들에게 긴급조치 위반과 내란예비음모죄로 중형을 선고한 비상군법회의의 판결은 옳다"는 취지의 주장을 했다.
'긴급조치의 종합판'으로 불리며 1975년 5월 선포돼 박 전 대통령이 사망하기까지 4년 이상 수천 명의 '범법자'를 만들어낸 긴급조치 9호와 관련된 법원의 재심 결정 4건에 대해 지난해 12월 27일 검찰은 줄줄이 항고를 했다. 재심 결정을 번복해달라는 취지다. 박형규 목사와 김지하 시인 사건에서 검찰이 보인 태도와 대비되는 모습이다.
검찰의 항고로 인해 재심 결정이 늦어지면 대부분 고령인 피해자가 국가 배상을 받아낼 길이 더 멀어지게 된다. 이는 결국 '긴급조치는 위헌'이라는 법원의 판단에 검찰이 불복하고 있다는 것으로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긴급조치의 근거가 된 유신헌법 제53조와 긴급조치에 대해 헌법재판소에서 명확하게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국회 법사위 소속 민주통합당 박지원 의원은 지난해 10월 헌법재판소 국정감사에서 이강국 헌법재판소장에게 "지난 2010년 2월 유신헌법 제53조와 긴급조치 1호, 2호 등에 대해 민변에서 헌법소원을 청구한 사실이 있는데 헌법재판소에서 2년 8개월이 넘도록 결정이 안 되고 있다"고 지적하며 "대법원은 2010년 12월 전원합의체 판결로 '긴급조치 1호는 발동요건을 갖추지 못한 채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였다'며 위헌 결정을 했는데 헌법재판소에서 아직도 결정하지 않는 이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했었다.
바통은 '보수 편향' 논란을 빚은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에게 일단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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